수년 전 여름에 자전거로 다녀온 제주도 사진을 정리하며 1편과 2편, 그리고 3편과 4편에 이어 하루 단위로 쓰고 있습니다.
자전거 타다가 하루만 걷기로 생각했는데 숲길에서 만난 사람들을 따라 갔더니 의도치 않게 오늘 하루도 걷게 생겼다. 자전거는 서귀포 터미널쪽에 묶어둔 채로 섭지코지까지 이왕 왔고, 섭지코지-성산일출봉 구간은 올레길에도 있는만큼 오늘은 일출봉까지 걸어서 구경, 우도에 들어가서 구경 후 자전거가 있는 서귀포 터미널까지 가기로 얼추 계획을 세운다.
낯설고 어색한 밤이 지나고 숙소의 모두가 아침을 먹느라 분주하다. 사업차, 친목차 부부동반으로 모였던 이들은 하나둘씩 공항으로 떠나며 내게 '어이, 저 아저씨하고 좀 놀아줘. 저 아저씨는 비행기가 늦은 시간에 있으니 셔틀버스 시간까지 니가 잘 보살펴 드려야한다'는 말을 남겼다.
그와 나, 둘만 숙소에 남아있는 시간은 난생 처음 했던 소개팅보다 더 어색했다. 내 흐리멍텅한 동공은 TV로 향해있었지만 아나운서가 뭐라하는지는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면서 가끔씩 고개를 끄덕이며 알아듣는 척을 하고 있었다.
산책을 나가기로 했다. 내가 제안했을 것이다. '시간도 많은데 이 동네가 드라마 올인 찍은 곳 아닌가요? 밖에 한 번 보고 올까요'정도의 말로 우리는 슬리퍼를 신고 밖으로 나섰다.
길을 걸으며 하나마나한 그렇고 그런 대화를 나눴다. 그러던 중에 그는 갑자기 달라진 어조로, 내 귀에 쨍하게 박히는 말투로 말을 꺼냈다.
'야, 너는 여기 어제 모였던 사람들이 얼마나 친하다고 생각하냐? 많이 친해보이지?'
'아.. 예, 다들 학연도 있으시고 정기적으로 돈과 시간을 들여 이렇게 모여서 대화하시는 거 보니 엄청 친한 사이 같은데요.'
'꼭 그렇지는 않다. 우리는 학생 때는 서로 같은 학교 다니는구나.. 정도만 알거나 아예 모르던 사이였는데 비슷한 일을 하다보니 이렇게 만나는거지. 사실 니 나이 때는 옆에 있는 친구들하고 오래 갈 것 같은 생각이 들텐데.. 나이가 들면서 하는 일에 따라 비슷한 놈들끼리만 만나게 될거다. 지금부터 10년이 지나면 또 모르지, 어제 모인 우리들은 각자가 또 다른 사람들과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 다들 달라지거든. '
쉬운 말이었지만 알아듣기 힘든 말이었다. 나는 여전히 월급쟁이 친구들과 시간을 보낸다. 그의 말을 지금 곱씹어보면 사업을 하는 사람과 월급쟁이의 차이 같기도 하고 어른과 어른이의 차이 같기도 하고 변화가 많은 삶과 정체된 삶의 차이 같기도 하다.
짐을 챙겨서 방을 나섰다. 그가 셔틀버스를 타고 가는 걸 배웅한 뒤, 나는 배낭을 메고 걷는다. 요 며칠 자전거를 타는 동안 너무나 부러웠던 도보 올레꾼, 나도 오늘은 올레꾼이다. 풀도 잘 보이고 신발 바닥에 닿는 모래나 아스팔트, 잡초의 촉감도 좋다. 느리게 지나가는 풍경도 좋다.
걷고 싶으면 걷고, 앉고 싶으면 앉는다. 저 길로 잠깐 빠지고 싶으면 갔다가 언덕이나 해변도 걷는데 이게 참 매력적이다. 자전거로는 느끼지 못하는 매력이 있고 혼자가 아니면 느끼지 못하는 매력이 있다.
해변에 말이 있길래 조심조심 다가가 만져보았다. 만지거나 말거나 내겐 관심도 없다.
해녀의 집, 보말 칼국수와 막걸리. 일반 칼국수와 뭐가 다른지는 모르겠지만 좋았다. 이 사진은 아마도 내가 찍은 상차림 사진 중 가장 오래된 사진일지도 모른다.
성산일출봉에서 찍은 사진과 우도의 언덕에서 찍은 사진이 섞여있다. 폰카메라와 똑딱이 디카 두 개를 같이 썼는데 사진을 컴퓨터로 옮기면서 파일명을 뒤죽박죽 섞어 놓은 탓이다. 이 때부터는 슬리퍼를 신고 걸었다. 어제 바닷가에서 까불다가 파도를 맞고 신발이 젖은 뒤로 말리지 못하고 계속 걸었더니 발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봇짐장수처럼 운동화와 헬멧은 백팩에 묶어서 걸고 걷는 것도 나름 재미있었다. 걸음걸음마다 덜그럭덜그럭.
우도 사빈백사장에서 혼자 신나는 척 와~~~~하고 한 번 무릎깊이 까지 들어갔다가 터덜터덜 걸어나와 맥주 한캔을 마시며 바다를 바라보았다. 구름이 없었으면 물빛이 더 맑고 쨍하게 나왔을텐데. 걷는 건 좋았지만 우도에 드나는 과정에서 배 시간을 맞추느라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었다.
성산포 앞에서 버스를 기다렸다가.
버스를 타고 서귀포에 내렸더니 벌써 밤이다. 서귀포에 가는 '시외'버스 안에서 폰을 만지작거리면서 터미널 근처의 숙소를 물색하다가 운좋게 오늘 숙박가능한 게스트하우스를 찾았다. 그날의 숙소를 당일 오후 6시가 넘어서 알아보기 시작하는 이 무대책한 습관은 언제쯤 고쳐질까. 이거 참...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생각하니 '빈 방 없습니다'를 서너번 듣고 난 뒤 체념할 때쯤 '아이고 이 시간에 빈방 물어보는 사람은 처음이네. 마침 자리 하나 비었으니까 얼른 오세요'라는 소리를 들을 때의 짜릿함에 중독된 것 같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이쯤 되면 이건 평생 고쳐지지 않을 습관이 될지도 모른다.
근처까지는 갔는데 길을 찾기 힘들어 두리번거리고 있으니 전화벨이 울린다. '혹시 ㅇㅇ지점에서 헤매고 있으신거 아닌가요?' 게스트하우스 주인장은 귀신같이 내 위치를 알아맞히고는 봉고차로 픽업하러 가겠다며 잠시만 기다리란다. 오늘 숙소는 매우매우매우매우 만족스럽다.
여행지 정보
● 서귀포시 성산읍 성산 일출봉
● 제주시 우도면 우도
trips.teem 으로 작성된 글 입니다.
짱짱맨 호출에 응답하여 보팅하였습니다.
제주 올레길 참 좋군요. 일출봉 정상에도 올라가셨나봐요..
여기가 아마 올레길 1코스나 그 언저리쯤일겁니다. 해변따라 걷는 길이 참 좋더라고요. 일출봉도 이 때까진 좋았는데 다음번에 갔을 땐 사방에서 중국어가 들리는 바람에 흥이 좀 덜하더라고요.
으힛!!
제주도를 1박2일로 다녀와서 일출봉만 기억나는... ㅎㅎㅎ
ㅎㅎ겨울 제주를 좋아해서(가격이 싸니까...) 자주 가는데 풍광 자체가 매력이 있습니다. 렌트카로 산간도로 드라이브만 해도 기분이 끝내주던데요ㅎㅎ
대구님.. 제주도의 여운이 아주 깊으신거 같아요...
제주 버스는 정말 너무 오래걸려서 최악이던데..ㅠㅠ
제겐 여러모로 의미있는 여행이긴 했는데 당시에 블로그에 사진 몇 장 올려서 끄적거리다가 방치해둔 걸 정리하는 기분으로 다시 써 보고 있습니다. 저는 그 때 느낌도 생각나고 좋은데 보시는 입장에서는 구질구질한 이야기가 너무 많을 것 같네요;; 버스 배차간격이 촘촘하지 않은 건 별로였지만 결혼 전에 혼자 갔던 거라 그런지 버스타고 제주도 섬을 반바퀴 도는 건 괜찮더라고요. 가족여행으로는 렌트 아니면 못 갑니다ㅎㅎㅎ
옛 여행기를 쓰는 건 참 묘한 매력이 있는거 같아요 ㅎㅎ
사진을 보며 이때를 기억 하는 그 시간이 ㅎㅎ 좋은거 같기도 하고
이때로 돌아가면 뭘 다시 할수 있으려나 하는 생각도 할수 있고 ㅎㅎ
그분의 말이 알듯 말듯 하네요ㅎㅎㅎ
잠시동안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있으니 글쓴이에게는 매력적인 일이죠. 다 두고 난 바둑 복기하는 것처럼 그 때의 내 선택들을 돌아볼 수도 있고요. 마지막 그 분의 말은... 시간이 오래 지나서 제가 그의 말을 곡해하여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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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여행갔던 추억을 되살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자주 만나던 사람들도 잘 안 만나게 되기도 하죠. 그게 별로 애석해지지 않아질 정도로 계속해서.
나이들면 그게 당연한건데, 학교 다닐 때나 졸업직후까지는 잘 느끼기 힘들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