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인다 보여
"처음에는 명성도 높은 계정들이 넘사벽처럼 보였는데, 조금씩 적응해가다 보니 스팀잇의 구조가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뭐든지 모를 때가 행복한데 말이죠. 다른 코인들은 스팀잇처럼 공개적인 커뮤니케이션 공간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보니, 알아서들 투자하고 알아서들 빠져나가지만, 스팀잇은 그 특성상 갈등구조가 포스팅을 통해서 전면에 드러날 수밖에 없죠. 그게 매우 흥미로웠어요. 다른 시스템들은 오픈 채팅방에 삼삼오오 모여서 의견을 나누고 컨센서스를 구축한다고 하지만 그게 참여자 전체의 의견을 반영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러다 보니 자연히 왜곡이 일어나게 마련이고 예측 가능성이 현저히 떨어지죠. 일부 세력의 편법도 방어하기가 쉽지 않고 말이죠. 그런데 스팀잇은 그게 훤히 들여다보이니까. 이게 앞으로 블록체인/암호화폐가 어떻게 진화해 갈지 측정해 볼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되어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탈중앙화를 내세운 블록체인 시스템은 당연히 의사결정의 구조와 과정이 다른 시스템보다 더 효과적이고 투명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시작했으니 많은 시행착오를 겪겠고 진통도 있을 것이며 실패로 끝나 버릴 수도 있지만, 세상에 없던 시스템이 등장했고 그것이 10여 년을 버틴 끝에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알만한 위상을 가지게 되었으니, 10년 전 사토시 나카모토가 세상에 비트코인을 처음 선보였을 때를 생각하면 이미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경제 공부를 시작한 마법사는 당연히 이 새로운 시스템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이것은 단순히 수익만을 목적으로 하는 투자 플랫폼을 넘어서, 우리 사회의 근간을 새롭게 세팅해 보자며 등장한 정치사회적 시스템이기도 했던 터라 관심을 더욱 증폭시켰죠.
"돈과 권력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가 없죠. 그러나 이제까지의 정치 시스템은 그것을 철저히 분리한 척해 온 게 사실이에요. 뒤로는 합종연횡을 반복하고 정경유착을 밥먹듯이 하면서 겉으로는 전혀 다른 시스템인 양, 우리는 서로 아무 상관 없다는 듯 연기를 해왔죠. 뭐 다 아는데, 하는 놈들도 알고 당하는 놈들도 아는데 아무도 대놓고 얘기를 하지 않고 있던 걸, 이 블록체인/암호화폐 시스템이 전면에 드러내놓고 등장한 거예요. 저는 그렇게 보였어요. 돈과 권력은 어떻게 결합해야 하는가? 그것은 어떻게 서로를 견제하고 지지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을, 아마도 인류가 처음으로 대놓고 맞닥뜨리게 된 사건이 블록체인/암호화폐 시스템의 등장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죠.
보세요. 언제 그걸 전면에 내세운 적이 있습니까? 부르주아 혁명이었던 프랑스 시민혁명이 그걸 전면에 내세웠습니까? 아, 볼셰비키 혁명이 그랬나요? 노동자를 해방하겠다고 일으킨 그 혁명이 돈과 권력을 어떻게 조화시키겠다 선언했나요? 자본은 악이라고 선언하고 초월적 권력에 의한 통제만을 내세웠죠. 노동자들로부터 위임된 당의 권력 말이죠. 자본주의 역시 마찬가지예요. 돈은 돈이고 정치는 민주적이어야 한다며 돈과 정치를 철저히 분리시켜왔죠. 돈은 무한경쟁의 약육강식으로 벌어라 하고 정치는 민주적이어야 해. 1인 1표면 됐지. 돈과 정치는 아무 상관 없는 거야 하고는 천문학적인 선거비용으로 장벽을 세워 놓았죠. 겉으로만 말이에요. 돈과 정치는 분리되어있다며 자기 최면을 걸어 놓은 거예요. 알면서도 모른 척할 수밖에 없지만. 그런데 이 블록체인 시스템은 그걸 전면에 내세웠단 말이죠. 게다가 스팀잇은 더더욱 혁명적이었어요. 돈과 권력을 명성도와 스팀파워라는 권력지수를 부여하여 실험한 거예요. 모두가 대놓고 들여다보도록 지갑도 공개하고. 그거 저 북유럽 선진국에서나 한다는 건대. 놀랍지 않아요?"
스팀잇의 실험이 마법사의 마음을 강하게 끌었던 것은 그 대놓고 공개적인 시스템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 마음을 숨길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걸 할 줄 몰라서 그간의 사회시스템이 하지 않고 있었던 게 아닌데. 스팀잇은 그걸 과감하게 오픈해서 모두가 들여다볼 수 있게 했지요. 그러면 보통은 부담스럽고 불편해서 아예 손을 대지 않기 마련일 텐데, 스팀잇의 유저들은 약간 이성을 잃었는지(?) 돈에 환장했는지(?) 벌거벗고 덤벼든 셈이었어요.
"그게 참 신기해요. 다들 뭐에 씌웠는지, 그런 것쯤 아랑곳하지 않는 강심장들이었는지, 어떻게 지갑을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개하고 내가 수입을 어떻게 얼마나 버는지 훤히 들여다보도록 할 수가 있어요? 그리고 대놓고 부자들한테 계급을 부여하더란 말이죠. 명성도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긴 했지만, 그게 스팀에 투자를 많이 할수록 높은 계급을 얻게 되고 소득도 그에 비례하여 늘어나니, 이건 대놓고 금권사회를 구성한 거란 말이죠. 그게 오히려 솔직해 보일 정도였어요. 너무 투명해서. 그런데 오히려 사람들이 그런 공간에 마음을 열더란 말이죠. 그것도 아주 활짝, 안 보여줘도 될 것들까지, 한 번 기록되면 영원히 박제되는 포스팅 시스템에 별 얘기를 다 하더란 말이죠. 누군가는 심지어 왕따당한 이야기, 성폭행당한 이야기까지 하고.. 매우 예민하고 조심스러운 개인의 내적인 부분까지 과감하게 오픈하는 이들을 보며 '야.. 여기가 이거 천국이네. 바보들의 천국'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뭐 그만큼 순진하거나 순수한 이들이었던 거겠죠. 여기 모여든 사람들이.."
기술은 해결할 수 있을까?
투명한 시스템이 문제없이 원활하게 돌아가려면 참여자들의 성숙한 의식과 태도가 전제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피해가 양산되고 종국에는 아무도 발들이여 하지 않는 무용지물의 시스템이 되죠. 현재 상황만으로 보면 이미 그렇게 된 듯도 하지만 말입니다. 그러면 스팀잇의 초창기 참여자들은 어땠을까요? 그에 대한 평가는 각자가 해야 할 일이겠지만, 결과는 어쨌든 그간의 과정을 거치고 현재 남은 스팀잇의 유저수가 증명해 주는 것이겠지요.
"순진하고 어리석은 일이죠. 시스템적으로 완벽히 해결되지 않은 곳에서 자신을 무방비상태로 오픈하는 일 말이에요. 그러나 이제까지 사회가 그 반대로 무언가를 숨기고 뒤에서 해결하고 기득권의 마음대로 조종해왔던 터라, 그런 결과에 지친 이들이 이런 투명한 시스템에 환호하는 것은 일견 이해할 만한 일이에요. 얼마나 지쳤으면 아직 아무것도 검증되지 않은 시스템의 등장만으로 이렇게 열광할까? 얼마나 외로웠으면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오픈할까? 아니 그것이 새롭고 또 이제까지 만나본 적이 없던 사람들이라 가능했는지도 모르지요. 그것은 그러니까 한계이자 매력이었어요. 마법사에게도 그게 동시에 다가왔죠. 황당함과 끌림. 그리고 정말 이 시스템이 그런 가능성을 기술적으로 완벽히 해결했는지 궁금했죠. 알아보고 싶었어요."
기술적으로 그걸 해결할 수 있을까요? 인류는 그러한 기술을 개발해 낼 수 있을까요? 뭐 하늘을 날기도 하고 있고 수명을 배나 연장시켰으니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겁니다. 그리고 그런 위대한 도전에는 언제나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패가 있었으니 블록체인/암호화폐 시스템의 도전도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닐 겁니다. 그리고 몸으로 직접 경험한 이들이 그 결과를 가져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겠죠. 죽지만 않는다면 말이죠. 도전을 멈추지만 않는다면..
"그래서요. 일단 실험에 참여해 보기로 한 거죠. 그러려면 먼저 여기, 지금, 이 새로운 실험에 모여든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아야 하잖아요. 결국 모든 건 사람이 하는 거니까. 환상적인 시스템이라도 그걸 운영하는 사람이 개판이면 실패하고 말 테니까요. 반면에 개떡 같은 시스템도 운영하는 사람이 현명하면 의외의 해결책을 경험할 수도 있는 것이죠. 그래서 스팀잇 그중 kr 커뮤니티에 몸을 담가 보기로 한 거에요. 그런데 어찌나 모두들 반갑게 맞아 주던지.."
보상의 진실
마법사는 신이 났어요. 무플마왕이던 마법사의 글에 댓글이 달리고, 보팅이 오고, 심지어 리스팀이 되어 여기저기 퍼져나가기도 하고.. 어디서도 경험해 보기 힘들었던 확산과 열정적 호응의 에너지가 신기하기만 했대요.
"그렇지 않았으면 아마 오래 하지 못했을지도 몰라요. 이게 묘한 마력이 있어요. 그 보팅과 명성도 말에요. 마치 레이스 같은 느낌을 준단 말이죠. 초창기에는 활동을 할수록 빠르게 명성도가 올라가고, 또 보팅하고 댓글 달고 하는 응원의 활동이 나 자신에게도 유익이 되니 으싸으쌰가 장난이 아니었어요. 이건 뭐, 마치 월드컵 결승전처럼, 서로를 응원하고 지지하고 돕는 분위기가 꼭 마약 같더라구요. 틈만 나면 스팀잇에 접속해서 읽고 쓰고 보팅하고 댓글을 달게 되더라구요. 게다가 어찌나 모두들 열심이던지 이슈가 슉슉 지나가고 글들이 쌓이는 게 장난이 아니어서, 하루만 접속을 못 해도 전혀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느낌인 거에요. 나만 분위기 파악 못 하고 배제되는 거 아니야 하는 생각이 절로 들더군요. 초기 커뮤니티의 중요한 성공 요인인 강력한 흡입과 빠른 성장의 매커니즘이 초고속 출력을 보여주고 있었죠. 마치 다단계 영업집단처럼.. 그래서 모두들 빠르게 스팀잇에 안착했어요. 아주 쭉쭉 빨아들였죠."
돈의 힘이었을까요? 아니면 새롭게 등장한 시스템에 대한 과도한 기대감이었을까요? 글 써서 돈을 번다는 게 너무 멀고 어려운 얘기였던 작가들을, 마치 한풀이하듯 활동에 몰입하게 하는 마력을 보여주었던 스팀잇, 생각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긴다며 당신의 생각과 글을 보여달라던 스팀잇은 보상! 보상을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유독 보상에 인색한 한국 사회에 지친 이들이 환호하며 달려들었습니다. 글이 뭐라고, 포스팅 하나가 어찌 돈을 번다고, 모두들 반신반의하며 뛰어들었다 0.1의 보팅이어도 무언가 찍힌다, 누군가 반응한다는 신기함에 마음을 활짝 열게 된 것입니다. 역시 뭘 좀 멕여야 합니다.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여기는 겁니다.
"다들 마치 2인3각을 하듯 서로를 격려했어요. 지갑이 훤히 들여다보이니 나보다 높은 보상에 질투가 나고 불평이 생기기도 했지만, 누구와도 척을 지을 수가 없는 거예요. 함부로 불평불만을 내세웠다가 2인3각이 무너지면 나도 보팅을 받을 수가 없으니 입 밖으로 내놓기가 어려운 분위기가 자동 조성되었죠. 자칫 2인3각에서 떨려나면 나만 손해니까, 마음에도 없는 좋아요. 잘 읽었습니다. 좋네요를 남발하게 되기도 했죠. 하지만 초기의 분위기는 그것이 전면에 드러나지는 않았어요. 새로운 보상시스템에 모두들 환호 하고 있었고, 불합리한 면들이 보여도 결국은 내게도 유익이 될 거라 생각하고 있었기에, 어쨌든 어깨 걸고 세상을 바꾸어보자는 연대감이 강력했죠."
무명의 작가들에게는 돈 한 푼보다 인정이 더욱 중요합니다. 누가 내 글을 읽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격스러운데 게다가 정성스러운 댓글이라니, 심지어 누군가 내 글을 퍼가서 언급하고 리뷰를 하는 이들도 있단 말이에요. 이건 너무 신나는 일이죠. 그런데 돈까지 벌 수 있다니. 창작자들, 인고의 세월을 보내며 창작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던 작가들에게는 혁신적인 시스템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오랜 고생을 한방에 보상받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 마구 타올랐지요. 그게 돈의 힘이라는 진실은 모른 척한 채, 이게 다 내 글의 가치야 라며 기대감이 마구 자라났어요. 그러나 보상의 진실은 지갑의 투명함 만큼 빠르게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