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회의 품격은 죽은 이들을 대하는 방식에서 드러난다, 영화 스틸라이프의 우베르토 파솔리니 감독의 이야기다. 아무도 아는 이 없이, 심지어 아는 이조차 외면하는 무연고 사망자들의 죽음 그들의 죽음을 마지막으로 처리하는 주인공, 우리는 귀한 이 생명들의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고 애도해야하는걸까? 그렇게 환영받을만하지도 않고, 칭찬받을만하지도 않은 평범한 일상을 살다 외롭게 죽어가며 잊혀진 사람들을 최선을 다해 추도해주는 한 남자의 이야기 ‘스틸라이프
무연고로 고독사한 사람들의 장례식을 치뤄주는 일을 하는 런던의 어느 구청 공무원 존메이, 장례식때면 무연고인 사람의 지인들을 찾아내 일일이 부고를 알리고 참석을 요청하지만, 언제나 장례식에는 존메이 혼자이다.
아주 꼼꼼하고 책임감있는 그는 평생 외롭게 살다가 죽은 이들의 장례를 치르며 전혀 알지도 못하는 죽은이들의 사진을 모아 앨범을 만들고 그것을 종종 들여다보는 것이 유일한 취이이다. 무연고자들의 장례를 위해 비용을 들이고 시간을 들이는 존메이가 탐탁치않은 구청은 결국 그를 해고 하게 되고, 존메이는 마지막으로 존 스토크라는 사망자의 장례건만 처리를 요청하게 된다. 그리고 존 스토크의 지인들을 찾아나서게 된다. 어쩌면 해고라는 의미안에서 그의 죽음이 예고되었는지도 모르지만, 그는 존 스토크의 지인들을 직접 찾아 나서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그의 일상에서도 작은 변화들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외롭던 그의 삶에 또다른 외로운 사람이 사랑의 조짐으로 찾아오게 되고...
언제나 혼자만의 방에서 친구도 없이 살아가는 존메이는 그의 삶의 환경도 언제나 정형화 되어있다. 무연고로 쓸쓸히 죽어간 많은 사람들의 공간과 존메이는 죽었던 자들이 그렇게 살았을것같은 불안감으로 비슷한 종말에 대한 불안감을 드리운다. 시간의 차이만 있을뿐. 그의 해고 통보는 어쩌면 언제든 예고없이 찾아오는 우리 삶의 엔딩이 그렇다라고 말하는 지도 모르겠다.
존 메이의 습관중에 하나는 처리한 무연고 시신들의 사진을 정성스럽게 앨범에 모으는 일이다. 비록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없는 쓸쓸한 죽음들이었지만, 한 장 한 장 사망자의 사진을 모아놓은 그의 사진첩에서는 모두가 한때는 그렇게 예쁜 아이였고, 멋진 사람으로 살아난다.숫자에 뭍힌채 사라져갈 사람들의 삶의 자취가 존 메이의 방문과 그의 앨범안에서 하나 하나의 의미로 만들어져가는 것이다. 누구의 삶이든 삶은 그렇게 가치있는 것이라고 따스한 위로를 전해준다.
고급승용차를 타며 사회적인 지휘에 있는 존메이의 상사는 그런 그를 조롱한다. 어차피 장례식이란건 산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닌가 그러니 아무도 없으면 신경쓸 사람도 없다. 사실 살아있는 사람들은 모르는게 낫잖아. 장례식도 슬픔도 눈물도 없는게... 그래서 시간과 비용을 들이는 주인공이 마뜩치않다. 어차피 죽은 사람들은 그냥 처리해버리면 되는 단순한 일감중 하나일뿐이다. 한꺼번에 화장처리해버리면 된다. 존 메이가 부장의 고급 승용차에다가 오줌을 누는 장면은 그런 천박한 자본의 논리를 따라 사람의 가치와 신분을 결정하는 것에 익숙해져가는 우리들 마음 깊은곳을 향한 조소와 조롱이 아니었을까.
그의 헌신된 노력으로 결국 존 스토크에 장례에는 그와 관계됐던 사람들이 삶의 모든 일상을 뒤로 하고 한자리에 모이게 된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모인 그 장례식장옆자리에 존 메이의 묘자리가 만들어지고 아무도 그 자리에는 없다. 여느 무연고자들과 묘자리와 다를바없다. 아니 그때는 자기라도 있었건만 지금은 아무도 없는 가장 쓸쓸한 묘자리이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그어떤 영화보다 오래도록 기억될 감동의 장면을 접하게 된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위로받고 싶고 확인하고 싶고 힐링받고 싶어하는 감동의 그 장면이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게 된다.
무표정하고 건조한 일상너머 죽은 이들을 향한 그의 따스한 시선이야말로 이 영화가 영화가 아닌 서정적인 한편의 시가 되도록 하는 힘이다. 사람에 대한 이만큼 존엄하고 존귀하며 엄숙한 경의가 또 있을까.
아무도 기억할 수없이 스러져가는 숱한 생명들 역시 한때는 누군가의 사랑스런 아이였고, 남편이었고, 아내였고 아버지였고, 어찌 이 모든 것을 우리 살아가는 시스템과 이념에 따라 등급을 매기고 평가할 수있단 말인가. 죽은 자들을 대하는 방식이 그 사회의 품격이기도하지만, 그 품격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를 대하는 방식이기도 하지않은가. 생명을 대하는 자세에 죽은이와 살아있는 이가 다를게 뭐가 있겠는가.
종교가 됐든 이념이 됐든 제도이든 시스템이든 내가 속한 어떤 조직에서든 가장 근본적인 질문, '우리는 정말 사람에 대한 품격이 있는걸까?'
어쩌면 사람에 대한 가장 기독교적인 은유를 이 영화가 담고 있는게 아닐까.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두고 두고 잊을 수없는 감동적인 명화와 같다. 언제나 혼자만의 방에서 친구도 없이 살아가는 존메이는 그의 삶의 환경도 언제나 정형화 되어있다. 무연고로 쓸쓸히 죽어간 많은 사람들의 공간과 존메이는 죽었던 자들이 그렇게 살았을것같은 불안감으로 비슷한 종말에 대한 불안감을 드리운다. 시간의 차이만 있을뿐. 그의 해고 통보는 어쩌면 언제든 예고없이 찾아오는 우리 삶의 엔딩이 그렇다라고 말하는 지도 모르겠다.
존 메이의 습관중에 하나는 처리한 무연고 시신들의 사진을 정성스럽게 앨범에 모으는 일이다. 비록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없는 쓸쓸한 죽음들이었지만, 한 장 한 장 사망자의 사진을 모아놓은 그의 사진첩에서는 모두가 한때는 그렇게 예쁜 아이였고, 멋진 사람으로 살아난다.숫자에 뭍힌채 사라져갈 사람들의 삶의 자취가 존 메이의 방문과 그의 앨범안에서 하나 하나의 의미로 만들어져가는 것이다. 누구의 삶이든 삶은 그렇게 가치있는 것이라고 따스한 위로를 전해준다.
고급승용차를 타며 사회적인 지휘에 있는 존메이의 상사는 그런 그를 조롱한다. 어차피 장례식이란건 산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닌가 그러니 아무도 없으면 신경쓸 사람도 없다. 사실 살아있는 사람들은 모르는게 낫잖아. 장례식도 슬픔도 눈물도 없는게... 그래서 시간과 비용을 들이는 주인공이 마뜩치않다. 어차피 죽은 사람들은 그냥 처리해버리면 되는 단순한 일감중 하나일뿐이다. 한꺼번에 화장처리해버리면 된다. 존 메이가 부장의 고급 승용차에다가 오줌을 누는 장면은 그런 천박한 자본의 논리를 따라 사람의 가치와 신분을 결정하는 것에 익숙해져가는 우리들 마음 깊은곳을 향한 조소와 조롱이 아니었을까.
그의 헌신된 노력으로 결국 존 스토크에 장례에는 그와 관계됐던 사람들이 삶의 모든 일상을 뒤로 하고 한자리에 모이게 된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모인 그 장례식장옆자리에 존 메이의 묘자리가 만들어지고 아무도 그 자리에는 없다. 여느 무연고자들과 묘자리와 다를바없다. 아니 그때는 자기라도 있었건만 지금은 아무도 없는 가장 쓸쓸한 묘자리이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그어떤 영화보다 오래도록 기억될 감동의 장면을 접하게 된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위로받고 싶고 확인하고 싶고 힐링받고 싶어하는 감동의 그 장면이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게 된다.
무표정하고 건조한 일상너머 죽은 이들을 향한 그의 따스한 시선이야말로 이 영화가 영화가 아닌 서정적인 한편의 시가 되도록 하는 힘이다. 사람에 대한 이만큼 존엄하고 존귀하며 엄숙한 경의가 또 있을까.
아무도 기억할 수없이 스러져가는 숱한 생명들 역시 한때는 누군가의 사랑스런 아이였고, 남편이었고, 아내였고 아버지였고, 어찌 이 모든 것을 우리 살아가는 시스템과 이념에 따라 등급을 매기고 평가할 수있단 말인가. 죽은 자들을 대하는 방식이 그 사회의 품격이기도하지만, 그 품격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를 대하는 방식이기도 하지않은가. 생명을 대하는 자세에 죽은이와 살아있는 이가 다를게 뭐가 있겠는가.
종교가 됐든 이념이 됐든 제도이든 시스템이든 내가 속한 어떤 조직에서든 가장 근본적인 질문, '우리는 정말 사람에 대한 품격이 있는걸까?'
어쩌면 사람에 대한 가장 기독교적인 은유를 이 영화가 담고 있는게 아닐까.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두고 두고 잊을 수없는 감동적인 명화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