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간 정신없이 지냈습니다. 갈라쇼 하나에, 짧은 영상 몇 개, 그리고 운동. 사실 신체가 바쁜 건 아니었지만, 정리해서 글을 쓰기에는 심리적인 여유가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무엇이든 작품을 하거나 무대를 선다는 것은 많은 준비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첫 글을 쓰고, 며칠 새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남북이 대화의 물꼬를 트고 심지어는 미국도 북한과 대화하겠다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습니다. 정치사회적으로는 미투 운동으로 수많은 피해자와 가해자들을 TV와 SNS, 커뮤니티를 통해서 볼 수 있었습니다. 아직도 진실공방을 펼치고 있는 수많은 대상자들의 주장을 쉴 새 없이 듣다보면, 사실의 진위여부를 판단하는 것을 떠나서 수많은 정보의 폭풍에 피로감이 몰려오기도 합니다.(이런 걸 보면 법정에서 각종 법적공방을 펼치는 법조인들이 대단해보입니다.)
며칠 전 지인이 카톡으로, 유명 연예인의 핸드폰 유출사진이라고 떠도는 어느 아이돌의 사진을 보내왔습니다. 어떻게 합성했는지 신기할 정도로 정교한 사진에 진짜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사진을 처음보고 든 생각은 ‘아직 어린나인데 어쩌다가 이런 사건이 터졌을까.......’ 였습니다. 음욕이 들기보다는 연민이 섞인 안타까움이 드는 이유는 자의가 아닌 타의로 자신의 사생활이 공개되었다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아닐까 싶습니다. 당시에는 그 합성사진이 진짜 유출사진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한참을 지나고 난 뒤 이 사건에 대하여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올랐습니다.
그 중 한 가지가, 연예인들을 대상으로 한 합성사진은 예전부터 꾸준히 있어왔다는 것입니다.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통해 접할 수 있는 예쁘고 멋진 연예인들은 누군가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됩니다. 그것이 양적이든 음(?)적이든 말입니다. 방금 언급한 아이돌의 합성사진은 딥페이크 기술을 통해서 만든 사진이라고 합니다. 이 딥페이크 기술을 이용해서 사진이 아닌 동영상을 합성으로 만들기도 하더군요.관련기사 뉴스에서 말하길, 동영상이 정교해서 얼핏 보면 구별하지 못한다는 말에 일종의 공포감도 들었습니다. 연예인이 아닌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딥페이크 영상이 만들어진다면 자기방어에 상대적으로 더욱 취약한 일반 사람들에게는 재앙과도 같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연예인들의 합성사진을 만들고, 찾는 일은 왜 일어날까요? 어차피 만드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저 사진이 가짜라는 걸 뻔히 아는데 말입니다. 심지어는 야동 중에서는 원작을 패러디한 음란물들도 있습니다. 제목을 패러디 하든, 캐릭터를 패러디하든 다양하게 말입니다. 어쨌든, 이런 종류의 2차 생산물들은 끊임없이 만들어집니다.
2005년 자료지만 적절한 자료를 쓸 수 없음에 양해를.......
(제목을 이렇게 패러디하는것도 어떻게 보면 능력입니다)
이 사건을 생각하던 도중, 20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자 중 한명으로 장 보드리야르가 생각이 났습니다. 학교 다닐 때 한번쯤은 배웠던 시뮬라시옹 개념의 선구자이지요. 이 분이 말했던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의 개념을 정말 간단하게 소개하겠습니다. 시뮬라크르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놓은 인공물을 말합니다. 위에서 언급했던 연예인들의 합성사진, 딥페이크 기술들이 되겠지요. 물론, 이 경우에는 누구나 그것이 원본이 아니라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게 다르지만 말입니다. 시뮬라시옹은 이렇게 실제를 모방하여 복제품을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조금의 차이는 있지만 간단하게 말하자면 시뮬라시옹은 복제 과정, 시뮬라크르는 복제 결과라고 볼 수 있지요.
(철학자 장 보드리아르입니다)
원본보다 더 원본 같은 복제품들에 사람들은 무엇이 원본인지 구별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는 복제품을 소비하는 것을 선호하기도 합니다. 딥 페이크로 복제된 연예인들, 셀럽들은 다른 사람의 신체에 그들의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만, 합성의 재료가 되는 원본이 찾기 힘들게 된다면, 그것이 사실인지 복제품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됩니다.
어쩌면 굳이 구별하고 싶지 않은 것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1999년 개봉된 영화 매트릭스는 이러한 시뮬라시옹 이론을 절묘하게 녹여낸 영화입니다. 아마도 제가 봤던 액션 영화들 중에 이정도로 고급스러운 영화는 아직까지는 없는 것 같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은 진짜 현실인가?’, ‘내가 보고 있는 것은 실존인가?’, ‘내가 누리는 자유와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누군가의 통제 속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던져주는 작품으로, 영화를 보고 또 보고. 다시보고 다시 볼 때마다 생각이 달라집니다. ‘그냥 이렇게 살아도 되지 않나? 이렇게 사는 게 나쁜 건가?’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장 보드리아르가 지적했던 현대사회의 문제점인, ‘사유의 중지’가 실제로 머릿속에 일어납니다. 더 이상 생각하기 귀찮아질 만큼 방대한 정보와, 무분별한 복제, 원본보다 더 원본 같은 복제품의 파도에 휩쓸려, 진위 여부 판단에 대한 방향성을 잃어버리게 되는 거죠.
(어떤 색깔의 약을 먹을지는 본인의 선택이지만 생각하기 귀찮아질수록 파란약을 먹고 싶어진다고 합니다)
연예인의 딥페이크 사진을 통해서 별 잡생각을 다 했습니다. 한편으로 드는 생각은, 기술의 발전이 언제나 사람들을 ‘더 나은 세상 속에서 살게 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라는 것입니다. 편집기술의 발전은 영화산업에 있어서 더 나은 영상미를 제공해왔습니다만, 악용될 시 닥쳐올 후폭풍에 대한 감당은 어떻게 해야 할 지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제 머지않아 육체가 필요하지 않은 세상이 올거라고 합니다. 그때는 정신만 존재하고 필요할때 리셋을 통해 가상현실을 무한반복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때가 되면 그때에 맞는 철학적인 사유가 필요할텐데 과연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어떻게 흘러갈지 기대가 되면서도 걱정이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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