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얼을 캔버스 삼아
시계에 예술성을 투영하기 가장 쉬운 방법은 다이얼을 도화지 삼아 작업하는 것이다. 시계 제작사들은 고대 그리스의 비례미를 이용해 다이얼 배치를 결정하는가 하면, 아르누보, 아르데코 양식을 사용하여 다이얼을 꾸미거나 바우하우스 스타일을 계승하여 다이얼 요소를 완성한다. 아예 도화지로서 다이얼을 구획하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리는 브랜드도 있다.
베가본다지3(Vegavondage III), 폴 쥬른(F.P. Journe)
비례와 균형을 사용하여 다이얼을 구성하는 것은 고전적이지만 여전히 유용하다. 이것은 시각을 읽기 편리하게 도울 뿐 아니라 심미적으로도 안정감을 준다. 대표적으로 자케 드로(Jaquet Droz)가 삼각형 구도로 나사를 배치하여 안정감을 유지하는 방식이나 쥬른(F.P. Journe)의 다이얼 배치가 있다. 이것은 고전 그리스 예술부터 연구하던 비례와 균형에 대한 미감이 오늘날 기성 제품에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가를 교과서처럼 보여준다.
소네리 뚜르비용(Souveraine Tourbillon), 폴 쥬른(F.P. Journe)
쥬른은 균형감 있어 보이는 다이얼 배치를 추구하지만 실제론 완벽한 정비례를 추구하지 않는다. 완전한 비례는 감상자에게 지나친 안정감을 부여하여 지루해 보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얼토당토않는 곳에 다이얼 요소를 배치하면 시각적 균형감이 무너져 심미성을 잃는다.때문에 쥬른은 도형을 재활용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다이얼에 사용한 원의 곡률을 파워리저브에 재활용을 하고, 작은 다이얼의 지름을 메인 핸즈 길이와 동일하게 구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법은 비대칭 다이얼이 시각적으로 산만해지는 것을 시각적으로 단단하게 잡아 준다.
브레게 클래식 컴플리케이션 Ref. 3795
브레게(Breguet)는 무브먼트의 유선형 곡선과 화려한 기로쉐 다이얼 패턴으로 애호가들의 미감을 자극한다. 클래식 컴플리케이션인 Ref. 3795와 3797은 브레게가 솔리드 케이스백과 스켈레톤 케이스백에서 아르누보 양식을 어떻게 활용하는가를 잘 보여준다. 브레게는 무브먼트 브릿지를 장식 요소로 사용한다.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생각하면 무브먼트 브릿지를 직선으로 뻗는 것이 효율적이다. 그러나 브레게는 굳이 무브먼트 브릿지에 굴곡을 주고 그 위에 플루팅(fluted) 세공을 더한다. 다분히 장식적인 예술이다.브레게 클래식 컴플리케이션 Ref. 3797
브레게는 역사적으로 루이 14세 양식(또는 바로크 양식)을 계승한다 할 수 있고, 미술적으로는 아르누보 양식을 계승한다. 바로크 양식의 정수는 ‘쥬아 드 비바(Joie de vivre, 삶의 기쁨)’이라 할 수 있는데, 브레게의 시계를 보면 부의 풍요로움이 차고 흘러 넘친다. 이러한 양식은 3797에도 잘 담겨 있다. 브레게는 3797의 3/4 무브먼트 플레이트를 아예 캔버스처럼 활용한다. 그들은 무브먼트 위에 담쟁이덩굴의 형상을 가득, 화려하게 채워 넣음으로써 그들의 역사적 정통성과 섬세한 장인 정신의 계승을 증명한다.로저 드뷔 엑스칼리버 Ref. 0350
아르데코 양식은 아르누보 양식과 헷갈리기 쉽다. 그렇지만 전자는 후자보다 직선적이며 남성적이다. 로저 드뷔(Roger Dubuis)는 아르데코 양식을 계승하는 대표적인 브랜드다. 이들은 인덱스뿐만 아니라 케이스에도 홈을 파서 시계 분위기를 강인하게 조성한다. 로저 드뷔는 화려한 시계지만 곡선의 부드러움이나 장식미보다는 단단하고 화끈하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까르띠에(Cartier)는 아르데코 양식을 계승하는 또 다른 브랜드다. 산토스의 사각 프레임과 인덱스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겠다. 아래 있는 드라이브 드 까르띠에가 특히 재미있는데, 이 시계는 까르띠에가 산토스의 전통을 깨지 않고도 어떻게 아르데코 양식을 업데이트할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인덱스와 날짜창의 사각 라인, 서브 다이얼 눈금, 방사형으로 버지는 로즈 커팅 인그레이빙(rose cutting engraving) 기법은 까르띠에 고유 디자인 정체성과 아르데코 양식이 함께 공존하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
까르띠에(Cartier)의 드라이브 드 까르띠에(Drive de Cartier)
바로크 양식 이후 예술가들은 모든 평면을 캔버스처럼 생각하게 됐다. 크레파스를 쥔 아이들처럼, 14세기 예술가들은 귀족들의 사주를 받아 벽과 천정, 자신의 마차, 시계에도 화려한 그림을 그렸다. 풍요로움과 과시욕이 절정인 시기였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은 오늘날 회화-시계(artistic watch)로 연결된다. 이것은 시계 본연의 기능을 덮어버리기 일쑤기에 때문에 가독성을 저해한다. 그러나 고급 시계를 찬 현대인이 손목을 보고 시간 확인을 할까? 오늘날, 시계의 본래 기능은 바로크 시대의 그것보다 가치가 적다. 이에 시계 메이커는 과감하게 눈금을 없애고, 케이스를 프레임 삼아 다이얼을 조각한다.
에르메스(Hermes) 슬림 데르메스 그르(Slim dhermes Grr)
에르메스(Hermes)는 시계뿐 아니라 의류, 가방, 액세서리를 만드는 토털 브랜드(total brand)다. 이들은 역사 깊은 디자인 하우스의 명성을 다이얼 위에도 발휘한다. 에르메스는 시계의 기능적 관점을 우선하기보다, 아예 예술품으로 해석해버린다. 이들은 보석 팔찌에 시계를 삽입하는 방식으로 주객을 전도하거나 시계 다이얼에 그림을 그리고 눈금을 생략하는 방식으로 지름 38mm 캔버스에 그림을 그린다.반 클리프 아펠(Van Cleef & Arpels)의 포에트리 오브 타임(Poetry of Time) 제작 과정
예술 수단으로서 시계를 해석하는 것으로는 반 클리프 아펠(Van Cleef & Arpels) 또한 유명하다. 초기 반 클리프 아펠은 클로버 모양을 한 알함브라 주얼리로 이름을 알렸다. 이들은 상징(symbol)을 주제로 하는 보석 조형에 강하다.
이 브랜드는 럭셔리 기계식 시계를 설치 미술의 관점으로 접근한다. 콩트-주와 에나멜, 샹르베 에나멜, 스테인드 글라스 에나멜, 스톤 인그레이빙 등, 각종 고급 공예 기술을 끌어다가 자신들의 예술 정체성을 투영한다. 반 클리프 아펠은 주얼리 형태와 시계 다이얼 디자인에 일관성을 추구한다. 제품 간 연결성이 끈끈하다. 이것은 시계 제작 회사의 모습이라기보다는 공방(工房) 같다. 시계를 제작하는 장인들이 달라도 디자인적 일체감이 있고, 시리즈 별로 반 클리프 아펠 특유의 정체성이 느껴진다. 덕분에 반 클리프 아펠의 작업은 다이얼에 특별한 로고가 없어도 형태만으로 알아볼 수 있다.
예거 르꿀트르(Jaeger LeCoultre)의 리베르소 이클립스 빈센트 반 고흐(Reverso Eclipse Vincent van Gogh)
예거 르쿨트르(Jaeger LeCoultre)는 자체적으로 다이얼 디자인을 할 뿐 아니라 예술가를 헌정(tribute)하는 작업도 한다. 이 브랜드는 탁상용 시계 라인인 아트모스(Atmos)에 클림트(Gustav Klimt)의 작업을 새겨 넣는가 하면, 위의 리베르소 이클립스 반 고흐(Reverso Eclipse Van Gogh)처럼 화가의 작업을 그대로 다이얼에 옮기기도 한다. 편리하게 생각하면 미술관이나 관광지에서 랜드마크를 다이얼에 작게 옮기는 것이나, 캐릭터 상품 시계와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소위 ‘캐릭터 상품 시계’는 거의 모든 것이 아웃소싱이고 판매처만 고정이다. 그러나 예거 르쿨트르는 영감의 출처만 외부일 뿐이지 모든 것을 자사 브랜드에서 해결한다. 음악으로 비유하자면 전자는 표절, 혹은 짜깁기이고 후자의 경우는 원곡을 편곡하는 것에 가깝다. 만약 예거 르쿨트르가 아닌, 다른 브랜드가 이것을 시도한다 하면 오명이 남을 소지가 다분하다. 그렇지만 예거 르쿨트르는 모든 공정을 하우스에서 완성함으로서 원저자의 아이덴티티를 최대한 존중한 작업을 할 수 있다.
예거 르쿨트르는 전통 깊은 인 하우스 시계 제작사라는 특장점을 바탕에 깔고, 예술 헌정 시계를 시리즈로 만든다. 점점이 흩어져 있는 역사적 작업을 구슬로 꿰어 자신의 역사로 만든다. 이와 유사한 작업을 하는 다른 하이엔드급 브랜드는 바쉐론 콘스탄틴(Vacheron Constantin)이 유일하다.
시계미감2: 디자이너와 시계에 계속
살면서 시계 욕심 내 본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마지막 고흐 시계는 정말 가지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