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
당시 여자친구(지금의 아내)는 1999년에 지구가 멸망한다고 49%쯤 믿고 있었고, 죽기 전에 선행을 해야겠다는 심정으로 나를 구제했다.
그렇게 결혼해 첫 신혼 살림을 차린 곳이 수원의 팔달문 근처. 정확히는 팔달산 자락에 위치한, 보다 더 세밀하게는 팔달산 아래 첫 빌라. 오르막 급경사의 끝에 위치한 특이한 구조(삼각형! 집이 삼각형!)의 빌라 1층. 사다리꼴 모양의 방, 길고 좁은 주방, 창고 같은 다용도실, 거대한 나무(정말 거대한, 이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빌라의 구조가 삼각형이 됐다는)와 마주하고 있는 손바닥만한 베란다. 집사람의 직장과 멀지 않았고, 저렴한 가격에 내집을 구입할 수 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선택한 그 집에서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옥상 물탱크가 깨져 고산지대(?)의 장점이 무색하게 물난리를 겪고, 밤새 내린 눈 때문에 차를 두고 걸어 다니는 일도 있었다. 좋은 점이라면 숲에 둘러싸여 상쾌한 공기를 마실 수 있었고, 산책하듯 50m만 올라가면 식수가 가능한 약수터가 있었으며, 새해맞이 불꽃놀이를 바로 머리 위에서 감상할 수 있다는 점(서장대 화재 사고 이후 팔달산에서 폭죽을 쏘지 않는다), 주변에 음식점이 많다는 것. 젊고 가난한 신혼부부는 햄과 김과 김치만 있으면 만사 좋았고, 라면과 계란만 있어도 만족했지만, 틈만 나면 싸고 맛있는 음식점을 발굴해 끼니를 거르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이곳.
O L I V E - 올리브
이제는 조금 세월의 흔적이 보이지만, 산 중턱에 위치한 레스토랑은 가난한 부부가 감히 엄두를 낼 곳이 아니었다. 그저 지나칠 때면 늘 궁금했다. 저기에서는 어떤 요리가 있을까? 맛있을까?
수원을 떠난지도 십수년이 지났고 화성행궁 복원과 더불어 당시의 삼각형 집은 허물어 없어졌지만, 문득 생각나 들려본 그 식당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여보, 이제는 내가 여기서 음식을 사줄 수 있게 됐어. 마음껏 먹어."
하지만 가는 날이 장날인 걸까. 브레이크 타임. 그것도 사실은 4시라고 해서 남문 시장을 돌며 쇼핑하고 구경하다가 4시에 왔더니 이렇게 붙어있는 것이다. 아쉬운 마음에 발길을 돌리려는데 집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배고픈데 커피로 때우려고? 안되는 요리 말고 재료 되는 거로 시키면 된다는... 오! 역시 이 여자는 나의 구원이다. 현명할지어다!
1층은 비어있다. 단체석이듯. 분위기가 좋다. 옛날 교실 바닥! 초등학교 바닥을 닦느라 소비한 왁스가 몇 통이더라.
주차장도 넓네. 빠르게 땅값을 계산해보고 헉 소리를 내본다.
2층도 비어있다. 브레이크 타임이 그렇게 길었으니 당연하지.
여보, 당신을 위해 오늘 이곳을 통채로 빌렸소.
메뉴는 대충 이탈리아 요리다. 20종이 넘는 파스타가 주종목이고 피자, 리조또, 도리아, 오븐밥(?), 스테이크, 와인 등등... 메뉴판은 생략하고 밥을 시켰다.
"김치 볶음밥 하나, 스테이크 하나, 고르곤졸라포르치니 리조또 하나."
"죄송합니다. 스테이크는 현재 재료가......"
음, 그랬었지. 그렇다면 돈까스! 레스토랑은 역시 돈까스와 김치볶음밥이지. 집사람은 파스타를 주문할 줄 알았더니, 3개면 충분하다며 그냥 넘어갔다.
돈까스 때문인지 먼저 크림스프가 나왔고 후추 듬뿍 쳐서 쓱싹 먹어버렸다. 맛있다. 스프만 먹어봐도 안다. 이집 맛있다! 분명!
빵과 발사믹 오일. 빵도 맛 있다. 직접 굽지는 않을 거 같은데... 설마 직접 굽나? 따뜻한 빵을 오일에... 아니지, 나는 스프 접시를 깨끗이 발라 먹었다.
김치볶음밥. 색깔만 봐도 안다. 이거 맛있다.
그래. 이맛. 이렇게 맛있는 김치볶음밥이 얼마만인가. 뉴델리(서울에 있는) 김치 삘라프 이후 제일 맛있는 김치볶음밥이다.
다음은 돈까스! 이것도 맛있다. 빵가루 튀김 색깔과 소스냄새만 맡아도 알 수 있다.
두들겨 넓게 편 돈까스가 아니다. 일본식 돈까스도 아니다. 이테리식 돈까스인가, 한국식 돈까스인가, 그저 이곳만의 돈까스겠지. 어쨌든 맛있다. 이거 소스가 남다른데...
마지막 메뉴 리조또
이건 잘 모르겠다. 사실 제대로 된 리조또를 먹어보는 것도 처음이고, 고르곤졸라...뭐였더라? 고르곤졸라포르치니 리조또. 대체 정체가 뭔지 모르겠다. 메뉴판에 재료 설명이 있었지만, 눈여겨 보지 않고 이름이 제일 긴 거로 시켰다. 뭔가 있어보여서...... 솔직히 허여멀건한 색깔에 조금 꺼림찍했지만, 맛있다.
부드럽고 진한 향이 김치볶음밥의 풍미를 잡아 먹는다. 같이 먹으니 김치볶음밥 맛을 모르겠다. 김치볶음밥부터 비우고 리조또를 해치우는 쪽으로 정했다. 루꼴라 같이 먹는 것도 좋고, 조금 느끼할 때는 역시 김치~를 아니면 피클 한조각 정도 해주면 딱 좋다. 물론 내 입맛에 그렇고, 집사람은 그런거 없이 그냥 먹는 거 보니 여자들은 엄청 좋아할 듯.
끝으로 후식. 약간 바닐라 향이 나는 옛날 커피. 헤이즐넛은 아니고... 아무렴 어떤가.
또 오기로 했다.
집사람 좋아하는 파스타를 종류별로 다 먹어보기로. 나는 피자를 시키기로. 아이들도 함께 오기로.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행궁로84번길 14
올리브1999
상표권 때문인지 등록된 상호는 '올리브1999'라는 걸 포스팅 하면서 알게 된...
와~~~ 맛나게땅. Bb
와씨 배고파;;
일교차가 큰 날씨에요 감기조심하세요^^
오늘은 바람이 많이 부네요^^
구제가 제대로 된거같다는 느낌.....
오마나~~ 완전 맛있어 보이네요~~
역시 미쿡 음식들 보다는 한국 사람은 한국식 양식이 더 맛있어 보이네요..
사진 잘보고 갑니다^^ 서로 팔로우 해요~^^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먹어보지 않은 음식이 언제나 더 맛있어 보이만, 막상 먹어보면 전에 먹었던 것들이 더 맛 있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그래도 일단 안 먹어본 걸 먹고 싶죠~
와... 진짜 세기말... 제대로 구제해주신 와이프님과 함께 정말 군침 흘릴 비쥬얼의 맛난 음식들을 즐기고 오셨군요... 부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