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가사가 있는 음악은 잘 듣지 않는다. 이유를 안다. 언어로 떠드는 것도, 그 떠듦을 듣는 것도 지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음악이라도 그런 언어적 떠듦 없는 것들을 듣는다. 이런 이야기를 듣던 친구가 내게 그리 말했다. “형님, 이제 곧 자연의 소리로 가시겠어요.” 나는 알고 있었다. 요즘 내가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는 걸.
도시를 가로 질러 집필실로, 강연장으로, 집으로 갈 때면 나는 지친다. 도시의 그 자극스러움에 지친다. 짧은 치마와 아찔한 하이힐로 치장한 여성들에게 나도 모르게 시선이 돌아간 간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부풀어 오르는 자지는 나를 지치게 한다. 온갖 색상으로 진열된 상품으로 나도 모르게 시선이 돌아간다. 그럴 때면 여지없이 부풀어 오르는 자본주의적 자지는 나를 지치게 한다. 그것들이 부풀어 오를수록 나는 뭉개진다.
나는 이런 ‘부풀어 오름’과 ‘언어적 떠듦’이 본질적으로 같다는 것을 안다. 그것들은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 것들이다. 나는 그런 것들에 지쳤다. 양평의 한적한 곳에 친구의 집이 있다. 그곳이 그리도 편할 수가 없었다. 산과 나무와 풀 밖에 없는 그곳이 그리도 편안했다. 어찌 안 그랬을까? 그곳에는 '부풀어 오름'으로부터도, '언어적 떠듦'으로부터도, 그 어떤 인위적 자극스러움으로부터도 벗어난 곳이었으니.
‘양평의 시골집’과 ‘가사 없는 음악’은 내게 ‘자연’이다. '부풀어 오름'과 '언어적 떠듦'을 쫒던 나는 지쳐버렸다. 이제 나는 ‘자연’을 통해, ‘자연’스러운 삶을 살고 싶다. 나를 지치게 하는 그 ‘부풀어 오름’과 ‘언어적 떠듦’으로부터 잠시 거리 두어, 그렇게 자연스럽게 살고 싶다. 나는 이리도 변해버렸구나.
‘자연’스럽게 살고 싶다고 말하며, 하루종일 듣고 떠들었던 나는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자연'스럽게 살고 싶다고 말하며, 하루 종일 땅 한번 밟지 않고, 풀내음 한 번 맡지 않았던 삶을 이어갔던 나는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그 ‘부풀어 오름’과 ‘언어적 떠듦’이 바로 나를 자연으로부터 벗어지게 했음을 나는 왜 보지 못했단 말인가.
양평으로도 떠나지 못하는 나는, 지금 가사 없는 음악을 듣고 있다. 그렇게라도 나는 ‘자연’으로 돌아가 ‘자연’스럽게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