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싱의 오르가즘

in #kr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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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름부터 시작된, 기침과 가래는 여전하다. 컨디션이 안 좋다. 게다가 요즘 날이 추워져서 인지 몸살기마저 안고 산지 한 달이 넘었다. 격하게 몸을 써야 하는 운동을 미뤄두었다. 여전히 컨디션이 안 좋지만 어제는 체육관에 갔다. 하고 싶은 것은 하고 살아야지 싶어서. 컨디션 걱정하다 언제 운동하겠나싶어서. 컨디션이 나빠서 운동을 못하는 건지, 운동을 못해서 컨디션이 나쁜 건지 확인도 해볼 겸.

나는 복싱이 좋다. 둘이 있는 힘껏 치고받는 절정의 긴장감이 만들어내는 희열이 있다. 거의 오르가즘에 버금간다. 둘이서 그렇게 치고받는 상황일 때면 아무 생각이 없어진다. 동물처럼 순간적인 반응으로 치고받을 뿐이다. 그 느낌이 너무 좋다. 아무 생각이 없어지고 동물적으로 반응만 하게 되는 그 순간의 느낌. 그건 문명화된 인간 사회에서 좀처럼 느끼기 어려운 희열이다. 눈에 멍이 들고, 턱이 아프고, 가끔 어지러워도 그 희열을 멈출 수 없다. 그건 오르가즘이니까.

요즘은 그 희열을 맛볼 수 없다. 컨디션이 떨어진 것도 문제지만, 고막이 찢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전처럼 세게 치고받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래도 매일 쉐도우만하고 샌드백만 치고 싶지는 않다. 지겹다. 고막이 찢어졌어도 치고받고 싶다. 간절하면 방법을 찾게 된다. 요즘에는 가볍게 치고받는 스파링을 한다. 어제도 그랬다. 선수부 친구들과 가볍게 치고받는 스파링을 했다. 그런 가벼운 스파링을 하고 있는 요즘, 복싱의 또 다른 오르가즘을 느끼고 있다.

세게 치고받지 않기 때문에 몸에 힘들 덜 들어간다. 그래서 더 가볍게 움직일 수 있다. 그렇게 가볍게 움직이다보면 몸이 리듬을 타기 시작한다. 그렇게 내 몸의 리듬은 상대의 움직임의 리듬과 조화를 만들어낸다. 정확히는 상대의 리듬에 내 리듬이 동기화된다. 그 순간이 되면, 상대의 주먹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할 수 있다. 그렇게 피하다보면, 내가 때릴 수 있는 절묘한 타이밍이 나온다.

그런 움직임이 반복될 때 나는 다시 생각이 없어지고 무아의 상태가 된다. 세게 치고받지 않지만, 내 몸이 리듬을 타고, 내 움직임의 리듬이 상대의 리듬을 빨아들일 때, 나는 없다. 그저 상대의 리듬에 동기화된 나의 리듬에 몸을 맡길 뿐이다. 나는 내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모른다. 그냥 움직인다. 그 순간 말할 수 없는 희열이 찾아온다. 그것이 복싱의 또 다른 오르가즘이다. 이것이 얼마나 큰 희열인지 언어로 정확히 설명하기 힘들어 아쉬울 뿐이다.

어느 순간부터, 일류 복서들의 움직임이 선으로 보인다. 자신만의 독특한 리듬을 타고 있는 복서들의 움직임은 선을 만들어 낸다. 그 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복싱의 진정한 매력은 치고받음에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독특한 리듬이 만들어내는 그 아름다운 선이 복싱의 진정한 매력이지 않을까. 리듬을 탈 때 느껴지는 오르가즘은,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선의 아름다움과 맞닿아 있다. 성적인 오르가즘 역시 결국 아름다움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지 않은가.

리듬을 타며 흠뻑 땀을 흘리고 체육관을 나설 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삶 전체가 만들어내는 리듬은 어떤 리듬일까? 그리고 그 리듬이 만들어내는 선은 어떤 모습일까? 시간이 지나, 나만의 리듬으로 시작된 점과 끝나는 점이 만들어낸 그 선이, 누군가에게 아름다움으로 다가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아름다운 선을 만들어내는 나만의 리듬으로 삶을 살아가고 싶다. 나는, 복싱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