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한다는 것.

in #kr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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앓았다. '앓는' 건 '아픈' 게 아니다. ‘앓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강건한 육체를 갖고 태어난 덕에 잔병이 없이 잘 살아왔다. 가끔 '아픈' 적은 있지만 '앓은' 적은 없었다. 내게 ‘앓는다’는 건 육체적이기만 문제가 아니다. 육체만 비명을 지르는 건 ‘아픈’ 것이다. 육체적 탈진과 정신적 탈진이 함께 왔을 때 나는 앓는다.

육체적 탈진이야 어제 오늘 일이던가. 이 빌어먹을 기침은 몇 달째 나를 떠날 줄을 모른다. 하기야, 이래저래 몸을 그리 소모시켜 대니 그렇지 않을 도리가 있나. 하지만 그건 괜찮다. 죽으면 썩어 없어질 몸 아끼면 뭐하겠나.

앓았던 건, 정신적 문제였다. 주제넘게 사랑하려 했다. 내 깜냥을 넘어 사랑하려 했다. 나를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의 아픔과 상처를 들었을 때 그네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바로 과거 언젠가의 ‘나’들이였던 까닭이다. 그러니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앓고 일어나, 글을 쓰려고 앉았다. 나는 내게 묻는다. 나는 누구를 어디까지 사랑할 수 있을까?

사랑의 반대는 정치다. 칼 슈미트의 말처럼, “정치는 적과 동지의 구분으로 시작된다.” 내 편과 네 편을 나눌 때 정치가 시작된다. 그렇다면, 사랑은 내 편과 네 편으로 나누지 않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안다. 한 사람을 너무 사랑하면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을. 아이가 태어났을 때 아이가 너무 사랑스러워 누구도 사랑할 수 없었던 것처럼.

나는 그래서 앓았던 게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사랑하지 않아야 한다’는 그 역설을 감당할 수 없어서.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하지 않으려는 노력은 고된 일이다. 자기 자식 먹여 살리기 위해 야수처럼 사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그래서다. 사랑하지 않음으로 사랑하려는 것은 얼마나 편안하고 익숙한 일인가. 그 잔혹함을 부성애 혹은 모성애라는 이름으로 아름답게 덧칠하려는 것을 어찌 이해할 수 없겠는가.

몇 달을 끊이지 않고 터져 나오는 기침은 내가 나에게 던지는 질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누구를 어디까지 사랑할 수 있을까?” 기침 뒤에 매번 남겨지는 가래는 그 질문에 답하지 못해 남겨지는 마음의 찌꺼기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