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 전쟁 논리가 널리 퍼진 적이 있다. 386 이제는 586이라 불러야 할 80년대 학번 60년대 생들이 경제 부흥기에 손쉽게 좋은 기업, 좋은 자리에 들어가서는 자신들의 철옹성을 쌓고, 정년은 늘리고 청년세대는 비정규직으로 굴리면서 2030 세대의 사회 진출을 막고 착취하고 있다는 논리 말이다.
그렇지만 특정 세대가 자기들끼리 철저히 연대하여 다음 세대를 착취한다는 논리는 허술하고 검증되지도 않는다. 수천, 수만 명도 아니고, 삶의 스펙트럼이 넓은 한 세대를 어떻게 하나로 묶을 수 있을까. 60년대 생이 모두 대학을 다닌 것도 아니고, 대학을 나온 사람이 모두 좋은 직장, 좋은 자리를 차지한 것도 아니다.
한국에 비정규직이 적극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한 IMF도 외환 정책과 경영 부실에도 원인이 있지만 국제적 환경 탓도 무시할 수 없다. 세계적인 불황이나 수명이 늘어나 고령화 사회가 되는 것을 386 세대를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오히려 386의 실패는 자신들이 내세우는 자부심, 즉, 한국의 민주화를 이끌었고, 세상을 바꿨다는 자부심에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는 실패는 군부독재를 타도하고 정치적 민주화를 이룩한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정치적 민주화 이후, 자기들의 삶에서, 생활 전선에서의 민주화에 실패했다는 말이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큰 병폐라고 생각하는 문화(그것을 문화라고 부를 수 있다면)를 꼽자면 가정에서는 가부장제요, 직장/조직에서는 위계/꼰대/관료주의적 조직 문화다. 두 가지 모두 수직적 위계질서에 기반해서 세대 간 의사소통과 효율적, 합리적 일 처리를 어렵게 만든다. 이는 경제적 수준이나 교육 정도, 좌우 정치적 성향조차 초월한다. 이 두 가지가 뒤섞였을 때 발생하는 게 최근 미투 운동으로 급격하게 폭로되고 있는 성추행, 성폭행 문제다.
386 세대는 ‘절대적 악’으로 치부할 수 있는 군사 독재 정권을 타파하고 나서, 자신의 가정에서, 자신의 직장에서 권력자가 되었다. 아무리 작은 단위라 할지라도 무언가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면 그 사람은 권력자다. 가장이 집안에서 자녀 교육이나 명절 차례상을 지시할 수 있다면 그는 권력자다. 직장에서 과장, 부장, 임원이 일 처리를 지시할 수 있으면 그는 그 범위 안에서 권력자다.
그런데 386 세대는 독재 정권을 타파하고 세상을 바꿨다는 그 자부심을 정작 자신들의 삶의 영역에서는 발휘하지 않았다. 가부장이라는 시대착오적인 허울을 타파하지 못해, 아니 인지조차 하지 못해 21세기인 현재 <며느라기> 같은 작품이 전폭적인 지지를 얻고 있다. 직장에서는 자신의 직위와 직급으로 대접받으려 하고, 아랫직급들의 의견이 아무리 합리적인 지적이라도 자신들이 해오던 대로, 그놈의 관행대로, 행하려고 한다.
시대를 바꿨다고 자부하면서 정작 본인들은 관행대로 살려고 하는 것이 386의 진짜 실패다. 남의 권력에는 정의로운 반기를 들었지만, 자신의 권력에는 모른 척했다. 자신이 차지한 기득권은 기득권이 아니라고 변명한다.
이런 현상을 보면서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조선 시대의 문장가 허균이다. 그는 <홍길동전>을 썼다는 사실로 유명하다. 서얼들의 신분 차별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 작품이라 허균도 서얼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허균은 당당한 사대부 가문의 적자였다.
그는 조선 사회가 인정하는 사대부의 기득권을 얼마든지 누릴 형편도 있었고, 재능도 넘쳤다. 그럼에도 허균은 늘 서얼이라는 이유로, 평민이라는 이유로 재주가 있음에도 관직에도 나설 수 없고, 사회의 그늘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이들과 진실한 친분을 맺었다.
그저 동정이었을까? 당시는 사대부가 신분이 낮은 ‘것’들과 어울리는 것 자체가 예에 어긋나는 행위였다. 주변에서는 허균이 관직에 나설 때마다 그를 ‘괴물’이라며 비난하고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탄핵했다. 허균은 관직을 받고 부임지로 향하는 도중에 탄핵당해 그냥 되돌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주위의 온갖 비난과 피해를 감수하면서도 허균은 서얼들과 친하게 지냈다. 재밌는 건 그런 그 역시도 당대 선배들의 드림인 ‘입신양명’을 포기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욕망과 시대의 아픔 사이에서 갈등했다. 누구나 자신이 가진 것을 내려놓기란 쉽지 않다. 자신이 얼마나 많이 가졌는지를 알아보는 눈조차 희귀하다.
386 세대에서 바로 허균과 같은 성찰을 했다면, 비록 자신의 욕망 때문에 갈등할지라도, 자신의 권력과 자신의 세계를 좀 더 눈을 크게 뜨고 성찰했다면 지금과 같은 세대 전쟁, 미투 운동, 명절마다 치르는 스트레스, 조직 문화에 실망해 성취보다 안정을 택하는 젊은이의 모습 등등은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허균의 삶이 어떠했는지, 그가 왜 <홍길동전>을 썼는지, <홍길동전>은 과연 어떤 작품인지 궁금하시다면 제가 카카오 페이지에서 연재하고 있는 글월 - 100원짜리 인문학을 검색해 보세요 :-)
요즘의 사회상을 적절히 바라본 관점이라 생각이 듭니다.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식의 인식이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에서도 적용되고 있었네요...
얼른 사회가 바뀌고 인식들이 성장해 가길 바랍니다.
공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항상 자기 위치를 뒤돌아 봐야 하는데 참 쉽지가 않지요. 느려도 계속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386세대는 정말 역동적인 삶을 살고 있죠.
조금씩 변화하려 노력중인 것 같아요.
그 역동성이 내부로 향해야 할 때인 것 같은데 변화를 받아드이실지, 차츰 변화해 나가면 좋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글이 괜찮으셨다면 카카오 페이지에서 "글월" 검색하셔서 허균의 삶도 한 번 읽어 보세요. 아주 흥미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