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10월 9일 아웅산 묘소 그리고 강민철
1983년 10월 9일 동남아 순방 중이던 전두환을 겨냥한 폭탄 공격이 일어났다. 버마의 국부 아웅산 (이 사람도 암살됐는데) 묘소 지붕에 설치된 폭탄이 터져 참배 예정이던 한국 고위 관료들과 기자들, 수행원들 17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버마인 4명도 죽었다. 고성능 폭탄을 미리 장착해 두고 원격 조정에 의해 터뜨린 것이었다. 전두환 입장에서 보면 천행이었다. 버마 주재 한국 대사가 전두환처럼 이마가 넓은 사람이 아니었다면, 또 버마 군악대가 연습삼아 악기 소리를 내지 않았다면 전두환이 입장하는 순간 폭탄이 터졌을 것이고 전두환은 살아서 한국 땅을 밟지 못했을 것이다.
급거 귀국한 전두환의 눈빛은 매서웠다. 하기야 누구든 자신의 목숨을 겨냥한 공격 앞에서 침착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며칠 뒤 버마 당국에 의해서 ‘Korean' 용의자가 체포됐고 그 가운데 한 사람인 강민철의 증언으로 공격의 주체가 북한으로 밝혀졌을 때 한반도의 남단은 관제(官製) 반 자발적 반의 반공 열기로 뒤덮였다. 10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비 오는 여의도광장에 모여 북한의 만행을 성토했고 군 지휘관들은 전두환에게 “명령만 내리시면 김일성을 자루에 넣어 오겠다.”며 팔뚝질을 했다. 사실 북한에게 보복 공격을 가한다 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남한의 특수부대가 김정은을 노리고 공격을 감행했다면 북한이 어떻게 나올까를 상상해 보면 되겠다.
물론 미국이 고개를 저어서이겠지만 한국은 보복 공격을 감행하지 않는다. 또 전두환 자신 한반도를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뜨릴 만큼 정신이 없지는 않았다. 그는 “내 명령이 없는 어떠한 행동도 반역으로 간주한다.”고 전방 부대장들을 단속하고 다녔다. 북한은 철저히 이 사실을 부인했다. 당시 라디오를 듣다가 우연찮게 잡힌 북한 방송을 접했는데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우리 공화국의 요원이 어떻게 그 삼엄한 경계를 뚫고 버마의 국립묘지 지붕에 폭탄을 설치할 수 있었겠는가. 이는 철저한 남조선의 날조와 조작이다.”
그러나 문제는 앞서 언급했듯 버마에서 ‘Korean'이 체포된 것이었다. 세 명이 버마 군경의 포위망에 걸렸고 한 명은 교전 중에 사망했고 두 명은 생포됐다. 그 가운데 한 명은 수류탄 폭발로 한 팔을 잃은 상태였다. 한 팔을 잃은 사람은 강민철,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조장 진모였다. 진모는 증언을 거부했지만 강민철은 자신의 소속과 범행 과정을 털어놨고 그로 인해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집행을 유예받는다. (진모는 86년 사형에 처해졌다) 그로부터 이 ’코리언‘은 버마 교도소에서 기나긴 수형 생활을 하게 된다. 아웅산 당시 나이가 스물 여덟살이었고 그가 죽을 때 나이가 쉰 셋이었으니 인생의 반을 감옥살이로 보낸 셈이다.
그의 고향은 강원도 통천이었다고 한다. 금강산 전망대에 가면 멀리 바라보이는 그 고장이다. 전쟁 때 국군이 조금 더 치고 올라갔더라면 그는 조선인민공화국 아닌 대한민국 국적을 달고 태어났을 것이지만 그렇지 못했고 1983년 스물 다섯의 그는 인민무력부 정찰국 대위가 되어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누이동생 하나 있는 단촐한 가정의 아들이었고. 어느 날 그는 임무를 하달받고 버마까지 와서 폭탄을 설치하고 터뜨리고 도망가다가 체포된다.
그와 함께 수감 생활을 했던 버마 정치범 출신 윈틴에 따르면 강민철은 오랜 수감생활 중에도 평상심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며 부당한 일이 있으면 교도관에게 거침없이 대들어 교도관들도 눈치를 보는 존재였으며 버마 말에도 익숙해져 정치범이든 잡범이든 가리지 않고 두루두루 사귀었다고 전한다. 태권도로도 몸을 풀며 운동을 하곤 했다는데 그 모습을 그려 보면 사뭇 짠하다. 버마 감옥의 무기수가 펼치는 태권도 발차기라니.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강민철은 상부의 명령으로 폭파 임무를 받아 수행했을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그는 자신이 임무를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조국 북조선으로부터 외면당해 이국 땅에 팽개쳐 져 고향과 가족에게 돌아가지 못하는 신세를 한탄하곤 했습니다.” 윈틴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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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명령을 따르는 군인이었고 그 명령을 수행했다. 그러나 명령을 내린 이들은 그를 부인했다. 윈틴의 말을 들어보면 그는 북한으로 돌아가는 꿈을 오랫 동안 간직했던 것 같다. “남한이 아닌 북조선 고향에 돌아가 가족을 만나고 거기에서 뼈를 묻고 싶다고 말했었습니다.......강 씨는 왜 자신이 조국에 돌아갈 수 없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면서 분개하고 화를 내곤 했습니다.” 왜 그렇지 않았을까. 깨 있을 때나 잠들었을 때나 그의 눈앞에는 고향의 금강산 일만이천봉 절경이 눈 앞에 펼쳐졌을 것이다.
그토록 오래 기다렸지만 그는 북한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한국 정부 관계자가 그를 처음 면회한 것은 1998년이었고 그 이후 이따금 음식이나 읽을꺼리를 넣어 주며 간헐적으로 면담을 했다. 그때 그는 한국으로 가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참여정부 시절 국회의원 정형근은 국정원장 김만복에게 “북한 눈치를 보기 때문에 못 데려오는 거 아니냐?”고 호통을 치기도 했다. 그러나 역시 윈틴의 말이 더 정확한 것 같다.
“ 남북한이 아닌 제3국으로 가고 싶어한 때도 있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감옥에서 버마 말을 배워 잘 구사했기 때문에 만일 출옥하면 버마 사회에서 취직하거나 일을 할 수 있겠다 싶어, 버마에서 살고 싶은 생각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어디에 갈 것인가에 대한 최종 정착지나 행선지 보다는 무엇보다도 감옥을 일단 벗어나고 싶다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그냥 출소만 한다면 자신은 행복할 것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가 남한에 가고 싶어했는지 북한에 돌아가고 싶어했는지 따지는 건 사실 무의미할 듯 싶다. 그는 버마 교도소 최장기 수용 외국인으로서 그저 ‘바깥’을 그리다가 2008년 기구한 삶을 마감했다. 분단이 빚어낸 또 하나의 비극적 인생이었다.
excellent story
Thanks
폭탄을 설치하기 전, 그게 누구를 죽이게 될지, 몇 명을 죽이게 될 지 잠시라도 생각했다면 참 좋았겠지요...
살인의 도구가 된 이들에게 인간적 감정을 기대하긴 어렵지요.... 안됐지만.
분단의 아픔이 슬프네요.~^^
네 참 서글픕니다.... 저 젊은 나이에.....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