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4월 14일~15일 타이타닉의 바이올린
매우 부실한 신앙을 지닌 ‘날나리’ 기독교인이긴 합니다만 가장 좋아하는 찬송가가 무엇입니까 류의 질문을 받으면 하나 꼽는 노래가 있습니다.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입니다. 이건 개신교 찬송가 제목이고 가톨릭에서도 동일한 가락의 노래가 있습니다. 곡조는 아일랜드 민요라고 합니다. 좀 엉뚱한 얘기지만 해방 이후 미 군정 장관 하지 중장은 한국인들을 두고 ‘동양의 아일랜드인’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집단적으로 움직이고, 술 마시고 파티하고 즐기는 것을 좋아합니다. 또 지적 수준이 높아서 다루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노래는 한국 기독교인들이 즐겨 부르는 찬송가에서 빠지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도 친숙한 이 찬송가는 이제는 전설이 된 거대한 비극의 주제가 돼 있기도 합니다. 바로 1912년 4월 14일 밤 빙산과 충돌하고 다음날인 4월 15일 새벽 차디찬 북대서양 아래로 침몰해 들어갔던 타이타닉 호의 비극 말입니다.
1997년 작 제임스 카메론 감독,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영화 <타이타닉>은 어떻게든 한 번쯤은 보셨을 겁니다. 워낙 유명한 영화니까요. 기울어져가는 배의 갑판 , 비겁한 몸부림과 의연한 용기가 엎치락뒤치락하던 아수라장 위의 갑판 위에서 울려 퍼지던 현악 4중주. 오펜바흐의 <천당과 지옥 서곡> 등을 연주하던 악단이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서로의 살 길을 찾아 헤어지던 순간 수석 연주자가 가볍게 바이올린을 퉁깁니다.
바로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어떤 이의 기억에 의하면 감리교 찬송가 ‘가을’이라고도 합니다만 둘 다 연주했을 수도 있죠.) 이었습니다. 영화 속에서 연주 동료들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이 선율에 문득 멈춰 서고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오지요. 그리고 다시 한 번 죽음을 넘어서는 감동의 현악 4중주가 펼쳐집니다.
그 연주가 흐르는 동안 선장은 선장실에서 최후를 맞고 가난한 이민자 엄마는 침대 위에서 아이들의 마지막 잠을 재우며 노부부는 이미 물이 차오르기 시작한 선실에서 꼭 끌어안고 죽음을 기다리게 되지요. 그 암담할만큼 부드럽던, 슬프지만 아름다웠던 현악의 선율을 기억하시는지요.
이 이야기는 유명한 실화입니다. 타이타닉 생존자들에 따르면 이 악단은 “뱃전이 기울어 중심을 잡을 수 없을 때까지” 연주를 멈추지 않았다고 합니다. 죽음 앞에서 무엇이 위로가 되었겠습니까마는 그래도 그 음악 앞에서 사람들은 마지막 경황을 차렸을지도 모릅니다. 가망 없는 삶에 대한 집착으로 추해지기보다는 죽음 앞에서 당당한 인간의 존엄을 지키며 침착한 죽음을 맞게 되었을 수도 있구요.
이 악단의 수석 연주자는 월리스 하틀리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 악단은 네 명이 아니라 여덟 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모두 구명 보트에 타지 않은 채 타이타닉과 운명을 함께 했습니다. 타이타닉이 가라앉은 뒤 시신 수습을 위해 파견된 배들은 빙산에 걸려 있거나 구명 조끼를 입은 채 바다에 떠 있던 328구의 시신을 발견합니다. 그 가운데 수석 연주자 월리스 하틀리의 시신도 있었지요.
그는 구명 조끼를 입고 있지 않았습니다. 다만 바이올린 가방을 목에 걸고 있었죠. 바로 그 부력 때문에 하틀리의 시신이 물에 떠올랐던 게 아닌가 추정된다니 마지막까지 놓지 않았던 바이올린이 그 캄캄한 바다 속이 아닌 고향 땅에 그를 묻히게 해 준 셈입니다. 공포와 분노의 소용돌이 속에서 의연히 사람들을 위로했던 용감한 음악가에게 내린 하느님의 마지막 선물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약혼녀가 있었습니다. 마리아 로빈슨이라는 여자였지요. 타이타닉 출항 직전 약혼식을 올렸는데 하틀리는 갓 약혼한 여자를 두고 배에 타기를 꺼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세계 최대의 호화여객선 타이타닉이라는 이름은 음악가인 그에게도 큰 유혹이었고 곧 다녀오마 약속을 남긴 뒤 배에 올랐던 겁니다. 약혼녀 마리아 로빈슨이 선물한 바이올린을 메고 말입니다.
바이올린의 명품 상표인 마찌니 라벨이 붙어 있긴 했지만 그건 진품 아닌 복제품이었습니다. 약혼녀 마리아 로빈슨도 부자가 아니었을 테니까 당연한 일이죠. 북대서양 바닷물에서 건져져 돌아온 바이올린 가방에는 월리스 하틀리의 이름의 이니셜 W,H,H가 새겨져 있었고 바이올린의 몸체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For WALLACE, on the occasion of our ENGAGEMENT from MARIA" 월리스에게 우리의 약혼을 기념하며....... 서로의 이름과 ‘약혼’ (ENGAGEMENT)을 달콤한 대문자로 또박또박 써 놓은 한 여자의 흔적. 그리고 마지막까지 그 바이올린으로 불행한 사람들을 위해 연주하다가 몸에서 떼지 않기 위해 목에 동여매고서 검고 차가운 바닷물 속으로 빨려 들어간 한 남자의 유물.
바이올린은 약혼녀 마리아에게로 돌아왔고 그 사실은 그녀의 일기장에 남아 있습니다. “I would be most grateful if you could convey my heartfelt thanks to all who have made possible the return of my late fiance's violin." 즉 ”제 약혼자의 바이올린을 돌려 주는데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마리아는 평생 혼자 살다가 1939년 예순 살을 앞두고 죽습니다. 그 뒤 유품은 자선단체에 넘어갔고 어느 바이올린 연주자에게 흘러들었다가 다시 그 연주자의 제자에게로 이어졌는데 그 제자의 아들이 발견하고 2006년 경매에 내놓으면서 다시금 세상에 그 존재를 드러냈습니다. 이후 7년간의 엄밀한 심사 끝에 이 바이올린은 하틀리가 소유했던 바이올린으로 밝혀집니다. 바이올린 자체도 시기적으로 맞고 함유하고 있는 염분도 다른 타이타닉 유물들과 유사하며, 바이올린이 약혼자에게 돌아갔다는 사실은 이미 마리아의 일기를 통해 입증돼 있었으니까요.
무려 90년만에 다시 세상 밝은 곳으로 나온 하틀리의 바이올린은 15억원 정도에 낙찰됐습니다. 복제품 아닌 진품 마찌니 바이올린보다도 더 비싼 가격이었죠. 하지만 저는 너무 싸다고 생각했습니다. 비록 소금물 먹고 파손돼서 연주할 수도 없는 악기이지만 세상에서 그보다 아름다운 악기가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쯤 천국에 서 행복하게 재회하여 살고 있을 마리아와 하틀리 커플이 자신들의 사랑을 기억해 달라는 마음으로 세상에 떠밀어 보낸 듯한 바이올린 아니겠습니까. 제가 아랍의 부호나 워렌 버핏 같은 부자라면 150억도 아깝지 않을 것 같습니다.
‘침몰하지 않는 배’ 타이타닉 호 안에서 약혼자가 선물한 바이올린을 턱 밑에 대고 가볍게 활을 움직이면서 대서양의 밤하늘을 매만지던 하틀리를 떠올려 봅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차갑게 넘실대는 북대서양 바닷물 위에서 사람들의 아우성을 배경음악으로 연주하던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 그리고 바이올린을 가방에 넣어 자신의 목에 걸면서 마리아 안녕. 하고 중얼거렸을 한 남자도 함께 말입니다.
You have a minor misspelling in the following sentence:
It should be occasion instead of ocassion.Thanks ㅜㅜ
타이타닉이 침몰한 날이 4월14일이죠? 오늘은 공교롭게도 저의 생일이네요 ㅎㅎ 타이타닉에 대한 이야기를 오늘 읽어보니 공감도 가고 그렇네요 거기에 얽힌 사람들간의 사실들을 저렇게 유품으로 볼 수 있으니 뭉클하기도 합니다. 잘보고 가요 ^^
침몰된 날은 15일 새벽입니다... 빙산과 충돌한 건 14일 밤이었구요.. 뭐 중요한 건 아닙니다만 ^^
하필 4월에 침몰했군요. 쩝
그렇습니다.... 4월입니다
영화보다도 더 아름다운 시간을 뛰어넘는 이야기이군요
앞으로 타이타닉을 볼 때면 이 글이 생각날거 같습니다
네 그 장면을 함께 떠올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얘기를 기억하진 못 하겠지만 읽는 순간의 감동만큼은 삶의 기쁨입니다. 언제나 기쁨을 주시는 님께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가능한 많은 얘기 들려드리겠습니다.
90년만에 나온 바이올린...아직까지 본영화중 최고라고 생각되는 타이타닉이 다시한번 생각나면서 소름이돋네요 ㅠㅎㅎ 팔로우하고갑니다 맞팔해주시면 감사해요 자주소통해요^^
감사합니다... 저도 베스트 5 안에 들어가는 영화입니다. 타이타닉... 허허 그것도 벌써 20년 전 영화가 됐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고맙습니다. 근데 4.16 그날이 생각나네요 ㅜㅜ
네.... 내일입니다
타이타닉에 이런 슬픈사연이 있었군요.
재난현장에서 죽음을 정말 겸허히 받아들이는 법을 아는 음악인이였네요.
순간 이런 음악가를 주인공으로 타이타닉 영화를 다시 제작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이 장면에서 큰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나네요..
글 감사드리며 복된 주일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
주말도 끝나가네요 활기찬 다음 주 되시길
너무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타이타닉의 사건이 일어나기전,
소설로 먼저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당시 이런 스토리가 있었는지는 몰랐습니다.
잘 읽고갑니다.
네 감사합니다.. 타이타닉 얘긴 이외에도 참 많습니다. 너무 황망하고 큰 사건이어서 그러가 봅니다.
선상에서 연주하신 분들이 실존했다고는 들었었는데 이런 사연이 있었는지는 또 몰랐네요. 참 아름다운 영화였는데, 다시 봐도 너무 슬플, 어쩌면 더욱 슬플 영화가 되었네요..
저도 힘들 때... 그 장면 다시 돌려보곤 합니다.. 인간의 용기랄가.... 그런 걸 볼 수 있는 장면이어서요
이게 적절한 영상일 것 같군. 타이타닉의 그 장면보단...
타이타닉을 보며 연주 장면을 허구일거라고 생각했는데...
실제 있었던 일이었다니, 그리고 하틀리 커플의 이야기까지..
감동적이면서도 안타깝고 슬픈 이야기입니다.
삶의 마지막...침몰하는 두려운 순간 저였다면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요...
네 실화였씁니다..... 그래서 사람은 마지막을 보라고 한다지요. 저도 그 순간 어떻게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에게 위안을 줘요. 종교의 긍정적인 면.
그렇죠.... 인민의 아편이라고 누가 그랬다지만 아편도 극한 고통에는 유용하죠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 이군요. 영화, 타이타닉에서 가장 감동을 주었던 씬입니다. 죽음 조차도 초월한 사람의 이야기는 늘 감동을 줍니다.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