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스승의 날입니다 안타깝게도 저는 존경하고 찾아뵐만한 스승을 모시지 못했습니다. 충분히 훌륭하신 분들이었겠지만 제가 여러 모로 모자라서 그를 깨우치지 못했을 수도 있고, 찾아뵙고 넙죽 절하고 할 넉살이 적은 탓도 있을 겝니다. 하지만 언젠가 <긴급출동 SOS 24> 하면서 한 제보자 (방송 출연은 못했습니다) 의 이야기를 들으며 머리를 세게 맞는 것 같은 한 '선생님'의 이야기에 감동한 적이 있습니다. 그 얘기를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조금 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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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구한 팔자와 한 많은 사연을 지닌 분들을 일삼아 만나고 다니면서 어지간히 덤덤해졌다는 생각을 했다. 면전에서 눈물을 펑펑 흘리며 아픔을 토로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렇게 크게 흔들리지 않게 됐고, 모든 것을 차치하여 아이템이 된다 안된다를 기준점에 올려 놓는 것이 버릇이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는 어머니를 구해 달라는 마흔의 딸과 함께 충청도로 내려가는 봉고차 안에서 나는 글썽거리는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차단하느라 무진 애를 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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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보자의 이야기)
지금 만나러 가는 엄마는 사실 저 스무 살 때까지 만나지 못했어요. 어렸을 때 아버지가 이유 없이 집을 나가시고 엄마도 결국 저희를 버리셨거든요. 고아 아닌 고아가 됐죠. 초등학교 때부터 남의 집살이를 했어요. 낮에 학교 갔다 와서 밥하고 아기 보고 그랬죠. 기억나는 게 한 번은 아기 분유를 타 먹이고 숟가락을 씻지 않고 분유통 위에 놨어요. 딴 일을 하고 있는데 빈 분유통이 날아오더라고요., 처음에는 숟가락 씻지 않았다고 혼나는 줄 알았지요, 그런데 도둑년이라고 하시더라고요. 분유 훔쳐 먹는다고. 제가 분유를 퍼먹다가 누가 들어오니까 급하게 분유통 위에 올려 놓은 줄로 아셨나 봐요. 어린 마음에 엉겁결에 나온 소리가 “잘못했습니다”였어요. 변명도 못하고 닦달을 당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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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지내다가 고모를 만나게 돼서 아버지가 계신다는 제주도에 가게 됐죠. 몇 년만에 아버지를 만났는데 그게 더 큰 비극이었어요. 아버지가..... 아버지가..... 저를 성추행하는 거예요. 밤마다 같이 자자고 하면서 바지를 벗겨요. “아빠가 하는 건 괜찮아.” 이러면서요. 새아버지 아니었냐구요. 친아버지였어요. 무섭고 창피하고 화나고, 정말 미칠 것만 같았어요. 경찰서에도 가 봤어요. 제가 어려서 그랬는지 거들떠 보지도 않더라구요. 집안 일이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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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여동생도 저보다 좀 늦게 아버지 집에 왔는데 제 동생은 훗날 알고보니 저보다 더 심하게 당했더라구요. 아버지라는 사람한테 말이에요. 지금도 동생 보면 마음이 무너져요. 내가 못 지켜 준 거 같거든요. 내가 아버지한테 칼이라도 들었더라면 동생은 그런 꼴을 당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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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일체의 돈을 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중학생 때는 아버지 친구가 하는 레스토랑에 있는 곁방에서 잠을 자고 청소를 해 주면서 받은 돈으로 먹고 살았지요. 한 번 청소를 할 때마다 500원을 받았던 기억이 나요. 중학교를 간신히 마치고 산업체 부설학교로 갔어요. 공장 다니면서 졸업장만은 받겠다 악착같이 공부를 했어요. 밤새 일하고 책 들여다보는게 너무 힘들어서 졸업장 받은 다음 날 그만둬 버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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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일을 하다가 남편을 만났어요. 말단 공무원이었지만 요즘 세상에 공무원만한 직업이 어디 있나요. 알콩달콩 잘 살 수 있을 줄 알았어요. 사람도 참 순하고 살면서 제게 욕 한 번 한 적이 없거든요. 그런데 왜 이혼했냐구요. 남편이 경마에 미친 거죠. 처음에는 월급을 안 갖다 주더라구요. 무슨 일이냐고 했더니 도시 말을 안해요. 명예퇴직한 것도 몇 달 뒤에야 알았어요. 그 퇴직금까지 몽땅 경마에 끌어넣었더군요. 그리고는 집을 나가서 들어오지를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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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이혼은 안하려고 했어요. 딸 둘한테 엄마 인생을 유전시키고 싶지는 않았으니까요. 한쪽만 정신 차리고 살면 내가 당한 꼴은 안 볼 것이다. 다문 입술에서 피가 나도록 다짐을 했지요. 그런데 빚쟁이들이 집에 들이닥치는 거예요. 당신이 마누라니까 돈을 내놔라. 애들 앞에서 물건 부수고 욕설하고 악다구니를 치는데 못견디겠더라구요. 이혼 소송 서류를 보여 주고 그 사람들을 피할 수 밖에 없었어요. 나중에라도 남편이 돌아오면 재결합할 생각이에요. 애들한테는 건강한 아빠 엄마이고 싶거든요. 딸은 엄마 팔자 닮는다는데 내 딸들이 내 팔자를 닮는 건 참을 수가 없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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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만나러 가는 어머니요? 스물 넘어서 만난 엄마한테 정이 돈독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어머니잖아요. 아버지도 꼴 보고 사는데...... 아버지한테 버림받았던 어머니를 제가 이해 안하면 누가 해요. 아버지 꼴을 보고 사냐구요? 네. 남편한테는 장인이잖아요. 제 속사정을 남편한테 다 얘기할 수 있겠어요. 남편이 가끔 인사 가자고 해서 갔었지요. 지금도 간혹 전화가 와요 돈 달라고. 돈 없다고. 언젠가 고모가 와서 따지대요. 넌 애가 왜 그렇게 애비한테 무심하냐고. 참고 참다가 한 시간 동안 제가 당했던 일들을 토해 냈죠. 고모가 얼굴이 파래져서 가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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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엄마는 혼자 사시면서 장사를 하시다가 지금의 새아버지를 만났어요. 어머니가 생활력이 좋으셔서 식당도 서너 개를 운영하셨대요. 그런데 이 새아버지가 다 깽판을 쳤어요. 술만 안먹으면 샌님도 그런 샌님이 없으신데 술만 먹었다 하면 괴물이 되는 거예요. 온 가게를 들부수고 어머니를 때리고 목을 조르고, 물고문도 해요. 그래도 명절이라고 애들 데리고 찾아가면 애들 용돈도 주고 그러시다가 술 드시면 “니 새끼들 때문에 돈 나갔다”고 엄마를 두들겨 패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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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애를 낳았을 때 너무 힘들어서 엄마한테 산후조리를 좀 도와 달라고 했어요. 며칠 뒤에 엄마가 오셨는데 얼굴이 팬더곰처럼 멍이 퍼렇게 들어 있는 거예요. 새아버지가 가지 말라는 걸 뿌리치고 나서다가 맞으셨다더군요. 그런 식이었어요. 둘째를 낳았을 때 엄마 손이 그립긴 했지만 억지로 참았죠. 많이 울었어요. 왜 나는 이렇게 살아야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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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엄마한테 전화가 와서 맞았다고 울어요. 너무 오래 되셔서 이제는 만성이 된 것도 같지만, 폭력이 계속되니까 그 고통을 숨기실 수가 없는 것 같아요. 요즘은 베체트 병으로 눈까지 거의 머셨어요. 명암만 구분하는 희미한 눈을 하고서 새아버지 시중을 들다가 자칫하면 맞으시는 거예요. 어떻게든 그 구렁텅이에서 꺼내 드려야 될 것 같아요. 제 힘으론 어떻게 안돼요. 그냥 그렇게 살다 죽으라고 내버려 둘 생각도 안한 건 아니지만 어떻게 그래요. 엄만데. 내 몸 더듬던 아버지도 인사드리고 살았는데 어떻게 나몰라라 할 수 있겠어요. 그게 여러분한테 말씀드리는 이유예요. 도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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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 지지리도 없는 여자죠? 부모 복 없는데다 남편 복까지 없고, 내 한 몸 지탱하기도 어려운데 주변엔 도와줘야 될 사람 밖에 없어요. 제 여동생? 어렸을 때 새아버지한테 (동생은 엄마랑 살았거든요) 맞아서 한쪽 귀가 안 들리는 제 여동생...... 부모가 그러니 남편한테 인정받겠어요? 얼마 전에 애를 낳았는데 안닮았다고 남의 새끼 아니냐고 제부가 타박을 했다더군요. 자기 새끼 낳는데 오지도 않고....... 애 낳고 웃지도 못하고 펑펑 울기만 하는 동생 붙잡고 나도 얼마나 서럽게 울었는지 몰라요. 우리는 왜 이럴까 우리는 왜 이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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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래도 PD님 저는 인복이 있는 사람이에요. 무슨 말이냐구요? 호호 눈 둥그래지시네요. 다른 분들도 많이 도와주시지만 저는 한 분 때문에 아직 버티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제주도에서 중학교 다닐 때 선생님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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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토랑 곁방에서 생활하다보니 옷이 제대로 있었겠어요. 신발엔 구멍이 나고 옷에선 늘 냄새가 나고 그랬죠. 배 고픈 건 말할 것도 없구요. 선생님이 그 사정을 아시고 제게 늘 잘 해 주셨지요, 하루는 선생님이 저를 부르시더니 심부름을 시키시더군요. 시장에 가서 어떤 가게들에 뭘 전해 달라세요. 종종걸음으로 시장에 갔죠.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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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간 데는 신발 가게였는데 제가 선생님이 전해 주신 물건을 전해 주자마자 가게 주인이 아 네가 걔구나? 그러더니 신발을 고르라는 거예요. 선생님이 이미 돈을 맡기고 가셨대요. 모자라면 나중에 더 치르고, 남으면 제게 주라고 하셨다는 거예요. 얼떨결에 신발 하나를 신고 왔는데 다음 심부름할 가게 간판을 보니 속옷 가게였어요. 거기서도 사장님이 똑같이 말씀하시더군요. 선생님이 그랬대요. “허허 마음 같아선 같이 와서 사주고 싶은데 다 큰 여자애 속옷을 골라 줄 수도 없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그러니 좀 이쁜 걸로 골라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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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에는 옷 가게였어요. 심부름(?)을 끝내자 저는 신데렐라가 된 것 같았죠. 미울 정도로 고마웠어요. 어떻게 사양하지도 못하게 상황을 꾸며 놓으셨잖아요. 사람이 기쁘고 고마워도 눈물이 솟구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서럽고 슬픈 것에만 눈물이 쓰이는 건 아니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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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산업체 부설학교에 간다고 할 때 선생님은 반대하셨어요. 거기 간 선배들이 탈선을 많이 해서 너를 보내기 그렇다고 말이죠. 하지만 달리 도리도 없었고 결국 제가 가겠다고 결심하셨을 때 손을 잡으시면서 말씀하셨어요. “나는 너를 믿는다. 꼭 졸업장 가지고 와 다오. ” 뭐라 대답을 해야 되는데 무슨 말이 나오지를 않았어요. 뭐라고 해야 되나. 환희였어요. 세상에 나를 이렇게 존중하고, 믿어 주고, 도와 주려는 사람이 있다는 자체가 미치도록 기뻐서 견딜 수가 없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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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야독이라는 말이 있지만 낮에 일하고 밤에 책 편다는 거 참 힘들더군요. 어려서부터 제대로 먹지를 못해서 그런가 참 몸이 약했어요. 일 끝나고 빙 하늘이 돌아서 쓰러진 적도 있었구요. 힘겨운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는데 갑자기 밤에 웬 남자가 찾아왔대요. 놀라서 나가 보니 선생님이셨어요. 서울에서 무슨 회의가 있어서 뭍으로 나오셨다가 ‘뭍에 나온 김에’ 부산에 들르셨다는 거예요. 뭍에 나온 김에..... 라니요. 서울 부산이 어딘데. 제가 잘 살고 있나 궁금하셨던 거지요. 이웃집 마실 나온 것처럼 "서울 갔다가 잠깐 들렀다.“시던 선생님은 금새 밤길 재촉하며 떠나셨어요. 그 뒷모습이 뭐랄까 제게는 큰 산 같았어요. 거인 같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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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장을 탔을 때 바로 제주도로 달려 갔죠. 선생님께 인사드리고 졸업장을 보여 드리니까 선생님이 저를 끌어안으셨어요. 그리고 눈물을 흘리시더군요. 울먹이면서 하는 말씀이 “고맙다. 이렇게 커 줘서. 나는 네가 이렇게 이쁘게 클 줄 알았다.” 하시는데 저 어린애같이 울었어요. 엉엉 울었어요. 선생님 고맙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이렇게 됐습니다 말을 하려고 멋있는 멘트까지 생각하고 갔는데 아무 말도 못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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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사람에게 얼마나 흉기가 될 수 있는가를 아버지로부터 배웠다면 사람이 사람에게 얼마나 큰 산이 될 수 있는가를 선생님이 가르쳐 주셨지요. 선생님 댁에 가니까 사모님이 사법고시 패스한 사람한테도 차려줄 것 같지 않은 진수성찬을 차려 놓고 기다리고 계셨어요. 제 생애 처음이자 최고의 만찬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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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간혹 전화를 드리고 살아요. 하지만 형편이 이렇고 선생님 기대하신 것만큼 잘 살지는 못하고 있어서 찾아 뵙지는 못하고 있어요. 하지만 선생님이 저를 믿어 주신 것만큼은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아무리 아버지 그런 사람이었고 엄마 기댈 사람 아니고 새아버지는 너무하신 분이지만, 남편은 경마 빚 지고 도망가서 소식도 없게 되었지만, 저는 그래도 사지 멀쩡하고 저 보고 자라는 두 딸이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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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이들 잘 길러낼 거예요. 선생님은 피붙이도 아닌 제게 그렇게 대해 주셨는데 내 배 아파 낳은 제 피붙이에게 제게 그 정도 못하면 되겠어요. 하고 싶은 건 많은데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건 참 슬픈 일이에요. 당장 엄마부터 새아버지한테 떼어놓고 싶어요. 병 치료도 해 드려야 하구요. 엄마 당장 그 집에서 나오면 거지되는데 그것도 난감하구요. 좀 도와 주셨으면 좋겠어요. 염치불구하고 말씀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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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저는 항상 바닥에 떨어질 때마다 솟아날 구멍이 있었던 것 같아요. 맞아요 선생님이요. 저는 그 상상을 하면 아무리 슬픈 일이 있어도 킥킥 웃게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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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기기는 산적 두목급으로 생긴 선생님이 돈 들고 여자 속옷 가게, 양품점, 구두 가게 돌아다니면서 이러이러한 애가 올 텐데 알아서 좀 잘 골라 주시라고 사정하고 다니시는 모습 말이에요. 그리고 제가 졸업장을 드렸을 때 그 험상궂은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 뚝뚝 떨어뜨리던 그 모습도 그렇구요. 아무리 팍팍한 상황이어도 한 순간 그걸 제압해 버릴 수 있는 추억이 있다는 거....... 그런 흐뭇한 추억이 머리 속에 뿌리박혀 있다는 거..... 그것만 해도 저는 행복한 사람 아닐까요. 아무리 팔자가 기구해도 말이에요. 초년 중년 다 뭐같았으니 말년이라도 좋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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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얘기를 하면서 그녀는 일곱 번도 더 굵은 눈물을 보였다. 슬픈 얘기를 하며 통절하게 울었고 기쁜 추억에 들떠서 울었다. 그 눈물 앞에서 내가 든 생각은 한 가지 질문이었다. "사람에게 사람이란 무엇인가."
왜 사람은 사람끼리 살아가게 만들어졌을까요 이렇게 슬픈 일 기쁜 일 다 겪게 할 것이었으면 차라리 표범처럼 혼자 살아가는 생물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왜 이렇게 기쁘고 슬픈 일 모두 겪게 해서 이렇게나 힘들게 만들고.
신을 믿지 않지만 있다면 우리를 세상에 던질 때 세상의 슬픈 일 기쁜 일 다 겪고 오라고, 다 같이 살고 상처도 사랑도 다 줄 수 있게 만들었던 걸까요.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왜 세상이 이런 것인지.
저두요.... 하지만 그 가운데 누구에겐가 좋은 인연으로, 큰 버팀목으로 남을 수도 있다는 것도 ㅇ희망의 일종이겠죠
잘 밤에 눈물이.... 에휴.... 이분 행복해지셨겠죠?
가끔 생각이 납니다.... 행복해지셨겠지... 남편 돌아오고 두 딸과 지금쯤 행복하게 사시겠지.. 아마 아이들도 고등학생이나 대학에 갔을 거 같은데 하면서 그려 봅니다
단 한명이라도 누군가에게 사연의 선생님과 같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 또한 같은 희망입니다...... 참 어려운 일이겠지만요.
간만에 눈물이 글썽이네요..
저도 저 선생님만큼은 아니지만 참으로 힘들때
많은 도움을 주신 은사님이 계신데
오늘따라 무척이나 보고 싶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
늦게 전에 찾아뵈시면 아마 일상에 길이 남을 기억이 되실 겁니다.... 꼭 찾아뵙고 인사 나누세요.
네 감사합니다!
오늘도 헤버구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