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5월 5일 보비 샌즈의 죽음
아일랜드와 영국의 역사는 한국과 일본의 역사와 곧잘 비교되지. 서울대 서양사학과 박지향 교수가 이렇게 말한 걸 들은 적이 있네. 아일랜드인과 한국인을 비교하면서. “자기 민족이야말로 가장 순수하고 뛰어나다고 믿는 맹목적 애국심, 자신들의 역사가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고 비극적이라고 생각하는 한(恨)의 정서, 강대국 곁에서 겪은 수난의 역사 등 닮은 구석이 많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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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인들은 아일랜드인들을 ‘하얀 검둥이’라고 불렀다고 해. 그러니 아일랜드인들을 어떻게 취급했는지 알겠지. 13세기에 아일랜드를 점령한 잉글랜드인들은 아일랜드 본래의 말을 쓰는 족족 죽여 버렸대. 영어를 말하되 영어를 읽고 쓸 줄 알면 그것도 반역 취급을 받았고 말이나 가축의 소유도 제한됐다더군.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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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반 1차 대전 중 아일랜드인들이 일으킨 부활절 봉기 이후 지난한 투쟁 끝에 아일랜드는 ‘에이레’로 독립하지만 식민 시대의 유산, 즉 신교도들이 대거 입도하여 살던 북아일랜드의 경우 영국령으로 남았고 이는 오랫 동안 영국의 우환이 돼. 하고많은 충돌과 사건 가운데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1972년 1월 30일의 피의 일요일 사건이겠지. 시위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시위를 벌이던 가톨릭 교도들을 영국군이 습격하여 열 네명을 사살해 버린 사건이야. 이 사건은 가톨릭 교도들을 격분시켰고 분노는 복수를 불러 총격과 폭탄이 오가는 폭풍의 세월이 아일랜드 섬의 동북단 북아일랜드에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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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은 한 청년의 인생을 바꾼다. 가톨릭 신도긴 하지만 딱히 열렬하지도 않아서 신교도들이 주최하는 운동 경기에 선수로 출전하여 상금도 타먹던 날나리 청년은 이 사건을 보면서 IRA (아일랜드 공화국군, 즉 저항 세력)에 가담하여 영국군에 저항하는 폭력 투쟁의 일원이 되지. 그의 이름은 보비 샌즈라고 했다. 아무리 늙은 사자라고는 하지만 사자임에는 분명한 영국에 맞서서 아일랜드의 인의 투쟁이란 전면전이 아닌 게릴라전, 정면 승부가 아니라 뒤통수 치고 도망가기일 수 밖에 없었지. 영국의 입장에서 이들은 전쟁의 상대가 아닌 테러범일 뿐이었고.
샌즈는 권총 소지 혐의로 체포돼 3년형을 받은 후 1976년 출소해. 약 6개월 동안 그는 여자를 만나고 아들도 낳아. 하지만 곧 테러 행위에 연루돼 체포돼 14년 형을 선고받지. 이후 그가 스물 일곱으로 죽을 때까지 그의 인생 1/3은 감옥에서 보낸 셈이 돼. 1979년 수상이 된 마가릿 대처는 샌즈를 비롯한 아일랜드 투사들을 정치범으로 대우하지 않고 테러범으로 다루겠다고 선언했고 샌즈는 이에 맞서게 돼. 그는 화장지에 시를 적어 내보내면서 자신의 의지를 알리게 되는데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싯귀가 이것이지.
“한 마리 종달새를 가둘 수는 있어도 그 노래를 가둘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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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즈는 죄수복을 입지 않겠다고 버텼고 옷을 벗어던지고 담요 한 장을 두르고 생활했어. 그 다음으로 그가 택한 건 ‘불결 투쟁’. 이발도 세수도 하지 않고 심지어 음식을 썩히고 똥을 싸서 감방 벽에 바르고 오줌을 복도에 부어 버려. 어지간히 독재에 항거한 사람들이 많은 우리 나라에서도 보기 힘든 양식의 싸움이었지. 하지만 영국 당국도 그에 상응하게 지독해서 무시로 샌즈는 늑신하게 두들겨 맞곤 했지. 감방 안에서는 구더기가 생기고 파리가 되고 또 샌즈의 상처 속에 알을 깠다. 쾌활한 20대 청년이었던 샌즈의 육체는 금방 시들었고 샌즈는 그 몸으로 할 수 있는 마지막 투쟁 방식을 전개하지. 바로 단식 투쟁이었어.
스티브 매퀸 감독 (한참 전에 돌아간 배우 아님)의 2008년 영화 <헝거>의 주인공이 바로 보비 샌즈였지. 주연 마이클 패스빈더는 살인적인 다이어트로 생명의 위협을 얻을 정도로 열연하여 바비 샌즈의 육체를 생생하게 그려내. 그의 단식이 시작되면서 로마 교황부터 미국 정부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영국 정부에게 사람부터 살려야 하지 않겠느냐고 호소하지만 철의 여인 대처는 귓구멍부터 철벽이었지. “범죄는 범죄일 뿐 정치일 수 없다.”는 것이 대처의 입장이었지. “정치범으로 인정할 수 없는 이상 그의 선택을 방해할 수도 없다.”는 것이었어. 사실상 아사를 방관한 셈이야. 시끄러운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고 봐서인지 강제급식조차 시행하지 않았으니까.
영화 <헝거>의 한 장면
<헝거> 영화에서 기억나는 장면 중 하나는 역시 샌즈를 만나러 온 신부와 샌즈의 기나긴 대화야. 얼핏 지루하기도 하지만 상당한 긴장감이 서려 있고 영화의 고갱이가 골고루 들어 있는 대화였지. 난 거기서 샌즈가 전개하는 결연한 의지나 표현보다는 다른 데에서 울림 있는 느낌을 받았어. 단식을 시작하겠노라고 선언하는 샌즈에게 신부가 묻는다. “가족들은 알고 있나?” 샌즈는 알고 있다고 대답하는데 신부가 다시 묻지. “가족들은 어떻게 생각할 거 같나?” 여기서 샌즈가 무슨 말을 또 하는데 신부가 추궁하듯 또 물어. “자네 아들은?” 그때 패스빈더가 담배를 피우며 짓던 표정이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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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생명을 주었지만 제대로 안아 보지도 못한 아들에게서 아버지 스스로 아버지를 앗아가는 상황에 처한 한 스물 일곱의 남자. 그러나 그 미안한 사랑조차 끊어버릴 결심을 한 남자의 인간적인 침묵과 뿜어내던 담배 연기. 불굴의 투사 보비 샌즈가 아니라 무슨 정치 이념이 아니라 어물쩡 들어간 감옥에서 친구들이 고문 당하며 내지르는 비명 속에 분노했던 한 조립공의 면모가 그 짧은 침묵 속에 배어나왔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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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즈는 신부의 만류를 뒤로 한 후 죽음을 향한 단식을 시작해. 71킬로그램의 평범한 청년이었던 그는 39킬로그램의 아흔 노인의 모습이 된다. 단식 기간 중에 지역구 의원의 급작스런 사망으로 실시된 보궐선거에 출마, ‘보비 샌즈 의원’이 됐지만 그나 대처나 뜻을 굽히지 않았어. 마침내 66일만인 1981년 5월 5일에 그는 로마 교황의 특사가 선물한 금 십자가를 쥐고 어머니의 기도를 받으며 사망한다. 그의 어머니는 이렇게 얘기했지. “보비를 낳은지 1주일도 안된 어느 날, 난롯가에서 북아일랜드의 유혈 사태 뉴스를 들으면서 이 아이만은 그 끝없는 사이에 가까이 가지 않게 하리라 맹세했었습니다. 그러나 보비는 그렇게 되고 말았지요.”
너무나 많은 아이들이 소중하게 태어나고 자라나지만 때로는 퍽도 허무하게, 얼척없이 슬프게 부모들이 그렇게도 피하기를 기도하고 면하기를 바라던 길에 접어들고 고난을 겪고 희생당하는 일이 역사 속에선 너무나 허다하다. 비정상적인 탐욕 때문일 수도 있고 말도 안되는 오기 때문일 수도 있고 해묵은 원한 때문일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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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즈에 이어 10여명의 아일래드 정치범들이 단식 끝에 세상을 떠나. 하다못해 강제급식이라도, 영양제 주사라도 놔야 되지 않았을까 싶지만 보비 샌즈와 아일랜드인들도, 그 가족들도, 영국 당국도 모두 거부했고 20세기라는 문명 시대 사람들이 시리즈로 생으로 굶어죽는 사태에 직면해야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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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보비 샌즈의 얼굴이 떠오르네. “자네 아들은?” 신부가 물을 때의 그 오묘한 얼굴. 종달새처럼 자유롭고 싶었던 그의 날개를 잠시나마 침묵시켰던 건 아들에 대한 연민이었겠지? 그게 사람이니까. 그도 그의 어머니만큼이나 아들을 사랑했을 거야. 그리고 아들은 자신같이 살지 않길 기도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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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헝거>의 한 장면
사람은 다 다르다. 하지만 같은 게 있다면 그가 연쇄살인범이든 천사같은 기부자이든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니고 있으며 최소한 그에 상응하는 권리는 지니는 것일 거야. 누구든 목숨을 걸고 ( 시늉으로라도 ) 뭔가를 얘기할 때 그 얘기에 반대할 수는 있겠으나 조롱을 하면 곤란하겠지. 그런 의미에서 단식하는 김성태 의원에게 피자 배달을 한 분께는 심심한 유감의 뜻을 표한다. 그러면 안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세월호 유족 단식 때 폭식하는 일베에 비교하면 무척 기분 나쁠 수도 있겠지만 따지고보면 다르지 않아. 김성태 의원이나 세월호 유족이나 배고픔을 이해하고 그 고통을 아는 인간이거든. 그 인간이 어떤 인간이냐는 다음 문제고.
아일랜드의 역사와 헝거 이야기가 가슴을 울리네요.
'자네 아들은?' 질문을 들었을 때의 아버지 마음이란...
저런 마녀같은 대처를 '철의 여인'이라고 칭송했던 인간들은 여전히 호의호식 하고 있는게 또 아픈 역사겠죠.
저도 어떤 인간이냐를 떠나 단식 중에 음식을 보내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은 않지만 뼈아픈 저항 수단을 정의롭지 않은 목적으로 오염시키는 것이 더 큰 잘못이고, 세월호 유족 단식 투쟁 때 저 인간(?) 족속들이 보냈던 조소를 잠시라도 후회하는 계기가 되길 바라지 않았을까 합니다.
네.... 그래도 기본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역사는 그 최소한의 기본을 지키지 못한 데서 꼬이기 시작했다고 생각해서요
너무 잘 읽었습니다. 작지만 풀보팅 드립니다. 헝거 꼭 봐야 겠네요.
귓구멍부터 철 이었던 대처...죽자 노동자들이 기쁨의 축제를 열었지요.
감사합니다....... 그때 구호가 떠오르네요... 켄 로치였죠 아마 "그녀의 장례식을 민영화하자."
꾸욱 보팅하고가요
"=네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