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선의 총리대신이오

in #kr6 years ago

1896년 2월 11일 “나는 조선의 총리대신이오.”

두 대의 가마가 은밀하게 경복궁을 빠져나왔다. 궁궐을 호위 (또는 감시)하고 있던 이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가마에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국왕의 총애를 받는 것으로 익히 알려진 뚱뚱한 엄 상궁이 그 시종과 더불어 가마 두 대를 타고 연속부절로 드나들었던 것에 익숙해진 탓이다. 거기에 신경 쓰기엔 궁궐 밖 세상이 너무 시끄러웠다.

한 달 전 선포된 단발령은 조선 팔도를 들썩이고 있었다, 단발령을 주도한 일본과 친일 내각에 분노가 쏠렸고, 또 몇 달 전 그들이 밉든 곱든 이 나라 왕비를 살해했다는 사실까지 되새겨지면서, 각지에서는 의병이 일어났고, 지방 진위대 병력으로 진압이 안 되자 수도 경비를 맡은 친위대까지 지방에 내려보내는 판이었다.

그런데 1896년 2월 11일 경복궁을 빠져나온 가마에는 기절초풍할 사람 두 명이 들어 있었다. 그 둘은 고종과 왕세자였다. 어머니이자 아내인 민비를 비명에 잃은 을미사변 이래 또 다른 암살의 공포는 아버지와 아들을 끈질기게 괴롭혔고, 날로 거침없어져만 가는 일본의 압력도 배겨내기 어려웠다. 이때 왕비 민씨 사후 수세에 몰려 있던 친러파 이범진 이완용 등과 임금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고종의 여성 취향은 좀 독특했던 것 같다.) 엄 상궁이 결탁하여 임금의 경복궁 탈출 작전을 감행한 것이다.

엄 상궁은 대원군과 일본이 임금과 세자를 폐하려 한다고 임금 부자를 세뇌했는데 일설에 의하면 을미사변의 불쾌한 기억을 씻기 위해 새 중전을 뽑고자 하는 친일내각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고도 한다. 어쨌건 경복궁을 탈출한 왕과 왕세자는 이미 공사관 경비 명목으로 국내에 들어온 120명의 러시아 수병이 지키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향한다. 이른바 아관파천이다.

이를 “일본의 압박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고육지책”으로서 평가하는 의견도 있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구멍 뚫린 장독에 또 다른 구멍 뚫는다고 간장 새는 것이 멈춰지던가. 이이제이는 힘 있는 자가 쓰는 것이지, 고래 싸움 와중에 끼어든 새우가 쓸 방법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떠나서 창피한 일이었다.

한 나라의 국왕이 목숨이 어떻게 될까 두려워서 다른 나라 공사관에 몸을 피하는 판에 그 나라가 어찌 독립국으로 인정받으며, 어찌 그를 왕이라 부를 수 있었겠는가. 그런 왕은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하자마자 무서운 명령을 내린다. 어제까지 자신의 내각이었던 김홍집 내각의 대소신료들을 을미사변의 범죄인들로 규정하며, 무조건 죽이라는 것이었다.

소식을 들은 내각의 군부대신 조희연이 군대를 동원하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허사였다. 되레 그는 자신을 체포하려고 돌격해 오는 순검들을 피해 달아났고 일본군 수비대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군부대신이 이 지경이니 다른 대신들의 처지는 말할 것이 없었다. 그 가운데 수괴라 할 총리대신 김홍집은 “전하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셨다.”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자신의 최후를 직감하였을 것이다.

그가 내각의 수반을 맡은 것은 이번이 4번째였다. 을미사변의 내막을 은폐, 조작하려 들었던 것도 사실이고, 박영효 (후일 최고의 친일파가 되는)에 의해 “일본 공사에 굴종하는 줏대없는 소인배”라고 욕을 먹을 정도였던 그는 일본의 뜻대로 이뤄진 개혁을 실시했고, 일본 공사관원들을 정치에 끌어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19세기 말 그 거친 제국주의 시대의 ‘은자의 왕국’의 관료로서 그만한 경륜을 가진 이도 드물었다.

일찍이 청나라 외교관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소개한 인물이었고, 외국과의 외교 관계와 사건사고의 수습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비오는 날의 나막신”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웠던 이였다. 그의 친일 정책에 이를 갈아 마땅한 매천 황현조차 그가 죄를 짓긴 했지만 “나랏일에 마음을 다했고 재간과 지략은 속류배가 따를 바가 못되었다.”고 할 정도였으니. 하지만 이제 그는 ‘왜대신’(倭大臣)으로 죽어야 했다.

총리대신 김홍집은 의연했다. “먼저 전하를 뵙고 말씀을 드린 후 어심을 돌리지 못하면 일사보국(一死報國)하는 수 밖에 없다,”면서 길을 나서는 총리대신을 일본 측이 가로막고 피신을 권하자, 그는 우리 역사를 통틀어 보기 힘든 감동적인 호령을 한다.

“나는 조선의 총리대신이다. 조선인에게 죽는 것은 떳떳한 하늘의 천명이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구출된다는 것은 짐승과도 같도다.”

그리고 그는 그를 죽이라는 어명에 살기를 띤 백성들 앞으로 나아간다. 백성들 가운데 상당수는 고종 임금이 그 뒤로도 즐겨 어용 용역으로 써먹는 보부상들이었다. “어명이다. 김홍집을 죽여라.”


덕수궁 앞에 집결한 보부상들

군중들은 총리대신을 난자하는 것도 모자라 시신의 다리에 새끼줄을 비끄러매고 종로 바닥을 쓸고 다니다가 대역부도 죄인을 써 붙인 뒤 다시 몽둥이로 때리고 발로 짓이기고 돌로 찍어 형상을 알아볼 수 없게 만들었다. 아내를 비명에 잃은 남편의 복수로서는 그럴 듯 했을지 모르나, 그 남편이 국왕이었던 것은 그에게나 김홍집에게나 그리고 김홍집을 죽인 백성들에게나 이로운 일이 못되었다. 왕은 무슨 일을 들이밀어도 척척 해 내는 ‘비오는 날의 나막신’을 다시 신어보지 못했고, 백성들은 그렇게 죽음 앞에서 책임감을 발휘하는 조선의 총리대신을 그 후로 만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