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토시 나카모토는 탈중앙화를 통해 자유롭고 안전하고 평등한 화폐를 만들 수 있다며 비트코인의 이념적 토대를 설명하였습니다. 저는 그 내용을 보고 이렇게 직감했죠.
"이 사람 일본 사람 아니넼"
화폐가 되었건 군사력이 되었건 권력이 되었건, 어떠한 힘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은 국가의 통제에 있는 것보다 민간의 손에 다뤄지는 것이 더 안전하고 효율적이라고 바라보는 시각은 서구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이데올로기입니다. 역사적, 문화적, 정치적 배경에 의해 국가별로 차이를 보이는 이데올로기는, 당연히 그 이데올로기의 구성원들이 만드는 모든 문화 유산 속에 그 편린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비트코인에서도 이데올로기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것처럼 만화, 영화, 게임 등 매스미디어 서브컬쳐에서도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현대의 시민들에게는 다른 어떤 매체보다도 서브컬쳐를 통해 해외의 이데올로기를 접하고 동화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을 것입니다. 저는 몇 차례에 걸쳐 현대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의 일부를 접할 수 있는 서브컬쳐 작품들을 소개해볼까 합니다. 그 첫 번째로 배트맨 시리즈의 걸작 그래픽 노블, Batman: The Dark Knight Returns 를 다뤄볼 겁니다.
이 작품에서 제가 주제를 담아내는 가장 중요한 대사로 뽑는 건 2013년 OVA 버전에서 슈퍼맨과의 대결 직전에 배트맨이 말한 대사입니다.
Batman: You say you answer to some sort of authority. They only want me dead because I'm an embarrassment. Because I do what they can't. What kind of authority is that?
배트맨: 너(슈퍼맨)은 어떤 권위에 따를 뿐이라고 말하지. 그들(미국 정부)가 원하는 건 장애물인 나의 죽음 뿐이야. 왜냐하면 나는 그들이 못하는 걸 하거든. 도대체 그따위가 무슨 권위지?
1939년 배트맨이 처음 등장했을 때에는, 그는 그저 아동을 위한 만화책 캐릭터였을 뿐이었습니다. 그가 고담시에서 경찰을 도와 범죄와 싸우는 것은 그냥 흥미로운 소재 거리였을 뿐, 거기에 별 깊은 사회적 담론은 담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 캐릭터가 왜 그렇게 범죄와의 싸움에 집착하는가, 그를 설명하는 개인적인 이유 - 부모님의 사망이라는 트라우마 - 만으로 충분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미국 코믹스의 주요 수요층이 저연령대에 집중되었던 실버 에이지(1950년대 즈음부터 1970년대까지)까지 이어졌습니다. 코믹스 작가는 배트맨 캐릭터가 갖는 개인 심리 상태만 깊게 연구해 들어갔습니다.
배트맨에 사회적 담론이 처음 들어간 작품이 1986년 프랭크 밀러의 다크나이트 리턴즈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이 작품에서 드디어 배트맨의 행위에 원론적인 질문을 제기합니다. "경찰이 존재하는 현대 사회에, 초법적 행위를 저지르는 배트맨의 자경행위는 엄연히 불법인 것이 아니냐"라는 거죠. 근대 국가에서 물리력을 포함한 힘의 행사는 국가에 의해 엄격하게 통제됩니다. 사회계약론적 주장으로 이를 설명하면, 공공의 선을 위하여 개인들은 자신들 본래의 힘(원초적인 물리력)을 국가에 위탁하고 국가 권위와 법에 의한 통치를 받아들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따라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법에 의거하지 않은 물리력은 불법이고 비도덕적인 것이 됩니다. 왜 비도덕적이냐, 그것은 시민 모두의 합의를 배신하고 뛰쳐나가는 계약 위반자이기 때문이죠. 폭력배들, 과잉진압을 하는 경찰들이 비도덕적인 것은 시민들 모두가 합의한 법의 권위를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우리는 질서 속의 삶을 도덕적이라고 배웁니다. 이렇게 법으로 대표되는 국가 권위는 도덕적 우위까지 갖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전통적으로 미국인은 국가 권위를 개인과 대립하고 위협하는 존재로 봅니다. 이것은 미국의 역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국가 역사의 첫 시작을 영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대립으로 시작했고, 황무지를 개척하면서 미국인에게 자리 잡은 이상향은 평화로운 소규모 마을 공동체였기 때문입니다. 자기 마을 일은 자기가 다 처리하는 이 집단에게, 큰 연방 정부는 쓸데없는 간섭꾼일 뿐입니다. 미국 헌법은 첫 시작부터 연방 정부가 새로운 영국이 되지 않기 위해 견제 방법을 나열하는 데에서 출발합니다. 이에 따라 비록 국민의 투표에 의해 선발된 정부라 하더라도, 최소한의 개입으로 국가의 이해관계를 조율해야 하는 수많은 족쇄를 착용하게 됩니다. 그것이 오늘날까지도 존재하는 미국 정부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전통은 전통일 뿐, 2차세계대전 이후 더욱 복잡해지는 사회는 결국 미국 정부의 개입 역량의 폭을 크게 키우게 되었죠. 미국의 전통적 가치관은 그 상태에 크게 반발하였습니다. 1980년대 미국에 시장에의 최소간섭을 주창하는 신자유주의가 득세한 것은 이러한 전통적 배경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신자유주의의 전도사 중 하나였던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은 코믹스 다크나이트 리턴즈에서는 강력한 정부를 상징하는 캐릭터로 등장합니다. 다크나이트 리턴즈 작중의 미국 대통령 얼굴이 레이건을 닮았거든요. ^^;;;
경제적으로 신자유주의를 표방한 미국과 영국의 정권은 사회도덕적으로는 전통적, 봉건적, 권위적 가치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브컬쳐계에서는 이 시기의 정부를 오히려 전체주의 정부의 전형적 모습으로 묘사합니다. Neo-Liberal이라는 단어가 무색하게도.
다크나이트 리턴즈 작중에 미국은 모종의 공산국가와 전쟁 중입니다. 온 국민이 합의한 국가 권위가, 오히려 국민 행복을 가장 해치는 의사결정을 하기도 하죠. 전쟁은 그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이 전쟁으로 소련은 미국에 핵미사일을 발사하고, 미국의 결전병기 슈퍼맨(진짜로 전장에서 대활약 중이었음!!)이 핵미사일을 받아내서 성층권 높이에서 폭발시킵니다. 이로 인해 미국은 직접적 핵 피해는 안입었지만 EMP로 인해 미국 전역이 정전상태가 되고, 덕분에 치안유지력이 떨어져 전국 각지에 폭도들의 물자 약탈 등이 벌어집니다. 그러나 오직 고담 시는 배트맨이 직접 치안유지에 나선 덕분에 사태가 진정됩니다. 배트맨과 그의 친구 고든 전 경찰청장은 전통적인 미국의 가치를 역설합니다. 누군가의 지시(=국가의 권위)가 아니라 개인 스스로의 선함과 올바름으로 무질서와 싸우라는 것입니다. 어려운 이를 돕고 악한 이와 싸우는 것, 그것은 국가의 권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개인 스스로가 나서서 행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배트맨이 뮤턴트라는 폭력 집단을 갱생시켜 고담시의 치안 유지 활동에 나서는 모습
이렇게 배트맨이 개인의 힘을 내세워 질서를 잡아 나가자, 고담의 경찰력과 소방서 등 행정력은 선거로 선출된 시장의 지시가 아니라 배트맨의 집단에 합류하여 고담의 평화를 지킵니다. 미국 정부는 그러한 고담의 상황이 미국 정부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라고 보고, 슈퍼맨을 파견해 배트맨을 제거하려고 합니다. 바로 이 장면이 코믹스 역사에 전설이 된 슈퍼맨과 배트맨의 다크나이트 리턴즈 버전 대결 씬입니다. 결과는요?
줘 팸
배트맨의 승리로 끝납니다. 배트맨은 제가 첫 머리에 써 뒀듯 "국가의 권위가 나의 올바름에 앞설 수 없다"라고 일갈하고 국가 권위의 상징인 슈퍼맨을 개인의 힘으로 쓰러뜨린 것입니다.
코믹스와 같은 대중문화는 미국 국민, 특히 10~20대가 어떤 식으로 사고하는지, 그 시대의 문화를 반영합니다. 그러나 다크나이트 리턴즈에서 배트맨은 단지 그러한 단편적 모습이 아닙니다. 배트맨은 미국의 전통적 가치관 그 자체를 웅변하였습니다. 국가는 개인의 순선함을 표출하는 데 그저 도와주는 역할이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국가 권위는 때로는 개인을 핍박하는 괴물(슈퍼맨)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할 때에 개인은 모든 수단(배트맨의 무기와 협력자)를 동원해 괴물과 맞서 싸워야 합니다. 국가 권위가 개인에 우선할 수는 없으니까요. 이렇게 다크나이트 리턴즈에서는 미국의 뿌리 깊은 자유의지주의 이데올로기가 현대에 어떻게 계승되었는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계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그래픽 노블에서의 배트맨과 슈퍼맨의 결투를 바탕으로, 2016년에 나온 영화 배트맨V슈퍼맨은...
워너 브로스&DC 습헐넘들 ㅠ_ㅠ
이거 보고도 저스티스 리그 영화는 정신차리고 만들 거라고 기대했던 내가 바보였다 ㅠ_ㅠ
누가 DC 좀 어떻게 해주세요.
워너 사장 암살해서라도 이 비극을 끝내야 합니다.
20년 더 기다리죠, 뭐. ㅠㅠ
하아... 이번 DC 유니버스가 남긴 건 마고로비 뿐이군요.
마고 로비 씨는 울프오브월스트릿과 빅쇼트가 더...^^;; 전 수스쿼는 커리어 오점이라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ㅠㅠ
본인에겐 오점이었을지 몰라도 영화에서는 구원이었습니다.
자살닦이에서 마고로비 빼면 아무것도 없어요.
울오월 인정합니다.
슈퍼맨이 미사일을 당연하다는듯 몸으로 막아내는 장면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국가를 위해 희생하고 약해졌다는 사실 또한 배트맨의 계산 내였죠. 이처럼 전통적인 선악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게 이 작품을 더욱 위대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전통적 선악 가치관에서 벗어나 DC의 새로운 전통, 뱃신 신앙을 창조한 작품이기도 하죠. ^^;;
왠지 토크빌이 머리 속에서 빙빙 도는 글이네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토크빌 같은 철학자 선생님의 통찰엔 발끝도 못미치죠. ^^;;
과찬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