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rwerq] 글쓰는 자의 폐색, writer's block

in #kr7 years ago (edited)


매우 두서없는 글이 될 예정이다.
왜냐하면 이번 글은 여러 시간과 공간에서 틈틈히, 그리고 꾸준히 작성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대체로 글을 한번에 작성하는 것을 선호하는데, 여러번에 나누어 작성하다보면 그 때마다 드는 상념들의 불연속적인 부분을 어떻게 이어붙일지 고민이 들 때가 있다. 오늘은 그냥 놓아두기로 한다.


이른바 작가의 폐색이라는 거창한 이름이 붙여진 이 상태는, 글쓰기에 있어서 새로운 것을 창작할 수 없거나 창작의 능력이 저하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사실 이와 관련하여 하나 재미있는 1장 짜리 기념비적인(?) 논문이 있는데, 글쓰는자의 폐색을 자가 치료하기 위한 시도의 실패에 관한 논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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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이 논문은 Journal of applied behavior analysis 라는 저널에도 실린 논문이다. 알만한 사람은 아실 논문이라고 생각한다. 출간된 가장 짦은 논문이기도 하고. 살펴보면 리뷰어의 코멘트가 상당히 재미있는데, 레몬 주스를 흘려보거나 X-ray를 투과시켜 봤지만, 아무런 흠을 찾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 리비전도 없이 승인을 받다니...) 논문 본문에 꿈뻑이고 있는 여백은 결국 글쓰는자의 고뇌를 반영하는 것일테다.


모든 일상이 자극과 창작적인 소재들로 가득한 것은 아니어서, 전형적인 소재에 전형적인 기록을 남길 때가 있다. 모든 일상은 비범해야하는가? 라고 생각해본다면 그건 아니면서도, 그것이 의미없는 단어들의 나열이 되지 않기 위해, 일반적인 무언가를 도출해내야할 때가 있다. 의미를 쥐어짜면 무언가 의미는 나온다. 하지만 그러한 작업들이 스스로 만족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의미를 부여하기 어려운 일상도 존재한다. 이걸 인정하기 어려우면, 글 쓰는 것 자체가 하나의 고역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이건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물론 지금 당장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다고 하여, 나중에도 의미를 부여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다. 돌이켜보면, 그 때 그랬기 때문에 지금 이렇다는 통찰을 얻을 때가 있다.

무(無)에서 무언가를 생산하는 것이 그리 쉬운가. 나에게 글쓰기란 내가 겪은 일상을 압축적으로 조리하여 다시 요리로 내놓는 듯한 과정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일상이 주 재료인 것이다. 사실 마음을 약간 내려놓으면, 글을 기계적으로 생산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고 본다. 같은 소재나 주제에 대한 (전형적인) 무수한 변주들이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무차별적으로 생산된 글들이 기억에 오래 남을 글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기록으로서의 가치는 존중하지만, 그러한 기록들이 중복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상황의 변화나 시선의 성장을 반영할 수 있다면, 이는 스스로 가지는 역사의 기록이 되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소재가 없으면 없는대로 남겨두어도 괜찮다. 우리는 일상을 영위하는 것이지, 우리가 일상을 생산하는 것은 아니므로.


이건 여담인데, 상당히 짦은 초록(abstract)을 가진 논문을 찾는다면 아래 논문을 보라.
Can apparent superluminal neutrino speeds be explained as a quantum weak measurement?

초록(abstract): Probably not.

아주 명확해서 마음에 든다. 패기 넘치지 아니한가.
초록이라고 해서 항상 3-5 개 정도의 문단들로 구성하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굳이 적지 않아도 되는 것을 적을 이유도 없을 것이다.


나는 사실, 스팀잇에서 대체로 강조되는 '꾸준함'의 가치를 믿지 않는다. 꾸준해야 더 좋을수도 있겠지만, 꾸준함이 필요조건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주 가끔씩, 꾸준함이 뭔가 꾸역구역 생산해내야만 하는 일종의 강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꾸준하게 '무얼 하는지'가 오히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것이 글쓰기라면, 종종 곤란할 때가 있다. 사실 하루의 일상이 항상 하나의 글을 이룰 수 있을 정도로 평탄한 것은 아니다. 어떤 날에는 하루에 두 세 개 정도의 글을 적게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어떤 날은 하나의 글을 채우기도 급급할 정도의 단조로운 반복이 지나가곤 한다.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페이지들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해본다. 하루에 무조건 한페이지가 담길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어떤 날은 한문장으로 요악되는 날이, 또 다른 어떤 날은 두서없이 적어내리는 날이 있는 법이다. 우리는 꾸준히 일상을 살고 있지, 일상을 생산해내고 있지는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꾸준함' 이라는 것은 꾸준히 존재한다는 것이지 항상 꾸준히 적는다는 뜻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꾸준히 적음으로써 꾸준히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도 할 것이다. 허나, 꾸준히 존재하는 것은 꾸준히 적는 것, 이 한가지로만 달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꾸준히 존재하는 것은 꾸준히 적는 것보다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조금은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적히지 않아도 되는 문장들이 오히려 삶과 일상을 잠식하지 않도록.


우리는 언제 어디선가 연유(緣由) 없이 나타났다가, 언제 어디론가 연유 없이 사라질 것. 가끔 새벽에 시계를 바라보며 아직 잠이 들지 않은 상태에서 내일을 맞이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한편으론 잠들지 않고 사는 삶을 바라볼 때가 있다. 내가 잠이 드는 사이에도 세계 어딘가에서는 눈을 뜨고 일상을 지내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기절한 듯 몇 시간을 내내 누워 있으며 놓쳐버린 순간들이 아쉬워서. 하지만 불면의 삶은 가능하지 않으며, 폐색과 같은 시간이 존재해야 나머지의 일상을 또렷하게 바라보고 나아가고, 비록 한 문장일지라도 조금이나마 끄적거릴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언제나 일상의 밀도, 밀도의 출렁거림이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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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히지 않아도 되는 문장들이 오히려 삶과 일상을 잠식하지 않도록.

마음에 콕 박히는 문장이네요. 술 먹은 다음날 아침 비슷한 생각을 합니다. 하지 않았어야 할 말들의 대잔치..

하지 않았어야 할 말들의 대잔치

저도 술을 먹을 때에는 조심합니다. 가급적 듣고 있는 입장을 취하곤 해요.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절히 취하게 되면 말이 늘어나면서 뭔가 말도 안되는 일상을 쭉쭉 늘리는 효과가 있는 것 같습니다 (...) 사실 일상이 아무말로만 구성되어도 즐거울 것 같기는 합니다. 물론 그게 계속되면 낭패라지요.

70년대 논문 보니까...지금도 논문 출력하면 저 폰트랑 별로 다를 바 없는 저널도 많긴 한데 뭔가 다르네요. 고작 70년대인데. 아래 이과 선생의 초록은 제 스타일이군요.

저는 그당시 혹은 그 이전의 한땀한땀 타이프를 쳐가며 제출한 논문들을 좋아합니다. 약간은 고루한 느낌도 들지만, 현실적인 제약을 어떻게 하면 극복할 수 있을까, 그리고 앞으로 이러한 것들이 쓰이겠지? 하면서 설계도나 청사진을적은 듯한 느낌을 받곤 합니다.

그리고 언젠가 초록에 'Yes' 같은 한 단어가 등장하는 논문이 나오기를 기대해봅니다 :)

공감이 가는 얘기도, 나름 고민하던 얘기도 많습니다. 매일 꾸준히! 라는 구호는 진취적으로 보이지만, 글쓰기에 있어서 '글의 질'을 보장해주진 못하지요. 묵히면 좀 더 괜찮은 글이 될 것도, '매일'에 사로 잡히면 익지 않은 사과를 베어 문 것처럼 설익은 글을 생산하는 일이 되기도 하지요. 물론 개인차가 있겠지만 말입니다.^^

매일 촘촘하고 밀도 높은 일상을 살기란 어려운 법이라는 생각이 들고, 한 두 문장 정도로 축약되는 하루를 보내기도 합니다. (물론 문장이 가지고 있는 밀도는 달라지더라도요.) 저 스스로는 일상에 기반한 글을 추구하다보니, 하루 단위로 글을 자른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꾸준함에 단위 시간이 녹아드니 뭔가 묘한 강박이 느껴진다고 할까요. 물론 매일 꾸준히 좋은 글을 올려주시는 분들도 계시기에, 가끔은 각자의 호흡의 차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곤 합니다.

닿아서 다행입니다. :)

와 곁에 두고 오래오래, 아주 오래 읽고 싶은 글입니다. 제 일상의 밀도가 너무 낮네요.

글에 비해 과찬을 해주신 것 같습니다. 머리를 긁적이며 댓글을 답니다. :)

저는 사실 일상의 밀도보다 일상의 여백을 좀 더 좋아하는 편입니다. 그만큼 생각과 감정의 공간 안에
자유로운 느낌이 들어서 좋아요. 그러니 일상의 밀도가 낮은 것은, 달리 보면 일상의 충분한 여백이 존재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여백의 공간 안에서 오롯이 무언가 쓰고 그리고 부르고 들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좋아합니다.

역시 훌륭한 글입니다

댓글 하나 읽고 qrwerq님의 재능을 바로 알아본 제가 자랑스럽습니다 ㅋㅋ

과찬이십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admljy19 님께서는 글과 글 속의 세계에 대한 뚜렷한 시선을 가지셨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잘쓰는가 못쓰는가는 별론으로 하고요.) 여튼 감사합니다ㅎㅎ

그러니 조금은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적히지 않아도 되는 문장들이 오히려 삶과 일상을 잠식하지 않도록.

가슴에 확 닿습니다!

닿게 되어서 정말 좋습니다. 문장에 따라 우리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이 자유로운 문장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

이런 담백한 문체, 아침의 커피 한 잔처럼 읽어내려 갔어요. 빨래 기다리며 바람이 부는 창가에 앉아서 읽었는데, 마음에도 시원한 바람이 부는 글입니다! :-)

소재가 없으면 없는대로 남겨두어도 괜찮다. 우리는 일상을 영위하는 것이지, 우리가 일상을 생산하는 것은 아니므로.

그러니 조금은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적히지 않아도 되는 문장들이 오히려 삶과 일상을 잠시하지 않도록.

오늘 빨래를 널고 나면 오랜만에 산책을 나가야겠어요..! :-)

일상에서 가장 성스러운 작업 중 하나를 하고 계시군요. 일상을 일상이 될 수 있도록 지탱하는 작업만큼 소중한 건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이러한 작업을 잘하지 못하고 신경을 잘 쓰지 못하는 것이 함정이네요.) 바람이 부는 창가와 기다림과 산책의 조합이라니, 이보다 더 일상 같은 일상은 없을 것 같습니다. 오늘의 일상에 순풍이 불기를 기대해봅니다. :)

잘읽었습니다. 보팅하고 갑니다.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닿아서 다행입니다.

모든 일상은 비범해야하는가? 라고 생각해본다면 그건 아니면서도, 그것이 의미없는 단어들의 나열이 되지 않기 위해, 일반적인 무언가를 도출해내야할 때가 있다. 의미를 쥐어짜면 무언가 의미는 나온다. 하지만 그러한 작업들이 스스로 만족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의미를 부여하기 어려운 일상도 존재한다. 이걸 인정하기 어려우면, 글 쓰는 것 자체가 하나의 고역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새롭고 흥미로운 글은 비범한 일상에서 나오는 것일까? 내 일상은 왜 이토록 평범할까..' 이런 고민을 하며 보편적 이야기를 끄적였다 지우기를 반복하고 있었어요. 의미를 부여하기 어려운 일상을 인정하기 어려우면, 글 쓰는 것 자체가 하나의 고역이 된다는 말에 깊이 공감해요.

가장 차별화 된 글은 경험을 통해 내가 느낀 그대로의 감정을 정제하여 쓰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객관적인 사실과 현상은 동일하지만, 그 현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감상은 70억 인구가 있다면 70억개의 감상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가장 나다운 관점은 무엇인지 계속해서 찾아나가는 중이에요. 꽤나 어렵고 고통스럽지만. 오늘도 좋은 글 감사합니다. ^^

가장 차별화 된 글은 경험을 통해 내가 느낀 그대로의 감정을 정제하여 쓰는 것

저도 이 방향에 동의합니다. 특히나 경험을 기반한 글들은 각자의 프레임과 시선에 따라서 한번 걸러져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다양한 갈래의 글이 나올 수 있으므로, 일상과 경험에 한정해봅니다.) 가끔 여러 글을 읽다보면, 세계의 축약본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모든 정보를 모든 시간을 모든 공간을 모든 삶을 그대로 살아낼수가 없기에,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접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제'라는 단어가 핵심인 것 같습니다. 좋은 시선 감사드립니다. :)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하여 스팀잇 1일 1포스팅에 대한 강박관념을 풀어줬습니다

또한 일상의 폐색 즉 사람으로서의 폐색에 맘껏 빠져듭니다 자칫 우울과 겹쳐 보일 수 있으나 전혀 다른 감정이지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날이 흐려지네요
봄이 만든 그늘의 곁에서 폐색을 즐겨 봅니다

폐색이 어쩌면 여백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언제나 삶을 빡빡한 밀도로만 살수는 없는 것이겠지요. 스스로를 놓아둔다고 할까요.

좋게 보아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폐색을 통해 숨 쉴 공간이 만들어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글을 위한 글이 되는 순간 글이란 것은 즐거움이 아닌 부담이 되는 것 같아요. 전 사실 매일 하나씩 글을 올리는게 부담되진 않은데, 아마도 제 하루에 빈 공간이 많아서 그런게 아닌가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쓸데없는 생각을 많이하는 탓인데, 그 대신 일의 진도가 제 때 나가지 못한다는 불상사가 수반되긴 하지만요. 스스로 자처하는 야근이랄까요;;ㅎㅎ

글을 위한 글이 되는 순간이 아마도, 글쓰기가 즐거움을 위한 글쓰기가 아니라 해야할 일이 되어버린 글쓰기로 변모하는 순간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빈 공간이 많다는 것은, 여러 즐거움과 여유가 녹아들 여지가 많다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왠지 부럽습니다. :)

저는 쓸데없고 잉여로운 생각의 가치를 믿습니다. 결국 삶을 풍성하게 하는 것은 그러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저도 야근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