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 굴종하고 패배감과 부끄러움을 느껴버린 주인공의 이야기를 듣자니 <피아니스트>의 스필만이 노역장에서 쓰러진 장면이 떠오르네요. 같은 이치로 저는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이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헤밍웨이가 어부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노인과 바다'를 쓰는 것이 낫고, 스티브 잡스가 컴퓨터 수리공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사업을 하는 것이 낫겠지요. 아리스토텔레스도 부유했지만 역시 그는 집안의 재력을 이용해 철학을 하는 게 무엇보다 옳았을 겁니다.
그래서 때로 부유한 이들이 자신에게 쏟아진 물질적 풍요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낄 수도 있지만, 그 부끄러움 만큼의 값진 일에 쓴다면 그건 오히려 바람직한 일이 될 것입니다. 말씀해주신 것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풍요를 무감각하게 받아들이고 허비하는, 그런 행동들에 대해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들이 마땅히 부끄러워해야할 것입니다.
복수에 관해서는 한국 영화인 <악마를 보았다>가 떠오르는군요. 주인공이 끝내 '악마'를 처단하지만 마지막 씬에서 보여줬던 울음처럼 그런 질 낮은 인간에 대해 복수했을 때, 그는 어떤 만족감도 느낄 수 없었을 겁니다. 그건 마치 개가 문다고 해서 개를 똑같이 물어버린것과 같으니까요. 그러니 '화'에 대해서는, 그것이 '화'를 내어 충분히 알아들을만한 상대인가가 중요한 것 같네요. 나의 영적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상대에게 화를 낸다는 것은 늪을 호수로 만들겠다고 내 호수에 있는 물을 길어나르는 것과 같은 피곤함이지요. 피곤하기만 하면 다행이지만 그러한 일이 반복되면 내 호수의 물이 말라버립니다. 다만 그러한 것을 자각할 수 있으려면 먼저 자신이 맑은 호수를 가지고 있어야 겠지요!
You are viewing a single comment's thread from:
경민님의 댓글을 읽고나니 저만의 해석이라고 생각했던 게 좀더 근거있는 논리처럼 느껴져서 기분이 좋아집니다. ㅎㅎ 분명 주인공인 수잔은 타고난 부를 통해 좋은 예술작품을 감별하는 능력을 자연스레 기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능력을 사용해서 많은 대중들에게 좋은 작품을 소개할 수 있었어요. 경민님이 예로 들어주신 헤밍웨이를 비롯해 스티브잡스, 아리스토텔레스 만큼은 아니지만, 분명 사회 전체로 보면 수잔도 그 능력의 최대치를 발휘할 수 있는 상황을 선택한걸로 보입니다.
저는 무섭거나 잔인한 영화를 못봐서 "악마를 보았다" 역시 보지못했지만, 말씀하신 것처럼 누군가에 대해 복수를 결심하기 전에 그 상대방이 내 소중한 시간과 체력, 감정의 격동을 감당할만한 상대인가를 생각해야겠어요. 우리 속담에 'X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냐'라는 말이 달리 있는건 아니겠지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