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추反芻 (22) - 꺼지지 않는 불꽃
저녁 무렵, 태식과 문희는 근처 향토식당에서 산채비빔밥으로 식사를 한 후 상가들이 즐비하게 들어 선 곳을 산책 하였다.
백열등이 새알처럼 매달린 상가 앞엔 불빛에 유난히 멋들어지게 보이는 토산품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대나무 껍질로 만든 모자와 광주리, 갖가지 나무로 깎아 만든 인형들 위엔 반질하게 옻칠이 되어 있어 더욱 고풍스러워 보였고 토산품이라고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어린이용 장난감과 갖가지 색깔의 돌들이 상점마다 진열되어 있었다.
태식은 한 상점에서 전통혼례복을 입고 나란히 서 있는 인형을 만지고 있었다.
“오빠! 예쁘죠? 그쵸?”
갑자기 등 뒤에서 문희가 다가서더니 태식이 보고 있던 인형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태식은 순간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오빠라니?”
“하하, 그냥 태식씨, 태식씨 하면 왠지 딱딱하게 들리잖아요. 그래서 그냥 오빠라고 부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왜, 결혼해서도 오빠라고 부르면 ‘여보’하는 것 보다 덜 징그럽잖아요.”
문희는 자신의 얼굴 옆에 인형을 대고 태식에게 장난스럽게 말했다.
“안 돼! 오빠라고 부르지 마!”
“예? 갑자기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요?”
태식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문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런 태식을 바라보았다.
“미안… 나도 모르게 그만.”
한 번도 문희에게 크게 소리를 친 적이 없는 태식은 문희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것을 보자 시선을 어디에 둘지를 몰랐다.
“오빠라고 부르는 게 싫어요?”
“아냐, 문희가 부르고 싶으면 그렇게 해…”
태식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만 가자! 오빠!”
“응, 그래”
태식과 문희는 산으로 올라가는 길옆에 자리 잡고 있는 호텔로 발길을 돌렸다.
‘204호’입니다.
카운터에는 신사복을 말끔히 차려입은 태식이 나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가 안내를 하고 있었다.
안내 데스크 뒤의 시계는 벌써 밤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호텔 복도에는 붉은 양탄자가 깔려 있었고 복도 중간 중간엔 푸른색 조명이 비추고 있었다. 복도 끝에서 다시 왼쪽으로 돌아가는 코너에는 조그마한 카운터가 마련되어 있었고 뒤로는 아라비아풍의 커다란 장식장이 놓여 있었는데 그곳 장식장 안에는 각 종 양주들이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태식은 방문마다에 달린 번호를 일일이 확인하며 걸었다.
204호, 문 앞에 서서 태식이 손잡이를 잡고 아래쪽으로 슬그머니 내리자 문은 부드럽게 열리고 이내 어둠속에서 방안이 천천히 드러났다.
태식이 열쇠가 달린 카드를 보안장치에 꽂자 조명이 들어오며 온 방이 환해졌다.
“와-”
문희는 마치 꿈속에 온 것처럼 황홀한 표정으로 태식의 뒤에서 탄성을 질렀다.
방안은 자주색의 벽지로 도배가 되어 있었고 화장대와 붙박이장은 다크브라운 계통의 무늬목으로 되어 있었다. 침대는 둥근 모양을 한 매트리스에 머리맡은 금빛으로 도색을 해 놓았는데 그것은 흡사 동화책속에서나 봄직한 우아한 문양으로 조각이 되어 있었다.
“우리 오늘밤 여기서 자는 거예요?”
“으응.”
문희는 침대로 뛰어 들어 벌렁 드러누웠다.
“꼭, 신혼여행 온 기분이네.”
태식은 말없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방안을 조용히 둘러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들고 나갔을 방안엔 흔적도 없이 말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초록색 나뭇잎이 빼곡하게 수놓아진 커튼 사이 커다란 유리창으로 호텔 아래 상가들의 불빛이 환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앉아 있는 태식의 등 뒤에서 허리 위를 무언가 감싸는 느낌이 들더니 이내 문희의 얼굴이 태식의 등으로 기대어 왔다.
“사랑해…”
태식은 자신의 가슴으로 모아진 문희의 손을 꼭 잡았다. 두근거림, 그리고 뜨겁게 솟구치는 마음 한 켠엔 두려움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문희야.”
“응, 말해.”
그녀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고 밤이슬처럼 맑았다.
“할 말이 있어…”
“무슨 말?”
“있잖아…”
“아냐!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마! 난 그냥 이대로 태식씨와 있는 게 더 좋아.”
태식은 환한 불빛이 싫었다. 이대로 문희의 얼굴을 볼 자신이 도저히 없었다. 태식은 문희의 손을 풀고 천정 등의 스위치를 찾아 눌렀다.
방안은 너무나 조용했다. 마치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일시에 증발해 버리고 방안에 오직 문희와 자신만이 남은 것처럼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유리창 너머로 상가의 백열등 불빛만이 희미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침대 위로 걸터앉은 태식의 등 뒤로 다시 문희의 얼굴이 기대어 오더니 점점 태식의 얼굴로 무언가 올라오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문희의 숨소리였다. 안개처럼 촉촉이 젖은 그녀의 숨소리가 귓불을 거치며 태식의 뺨으로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태식은 돌아 앉아 문희를 힘껏 껴안았고 품안엔 오직 그녀의 거친 호흡이 분화구처럼 거친 열기를 내 뿜고 있었다.
“안 돼! 이래선 안 돼!”
태식은 다시 문희를 밀어 내려 했다. 그러나 밀어내려 할수록 문희는 더욱 태식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냥, 아무 말 하지 마! 그냥 아무 말 하지 말라구.”
문희는 흐느끼고 있는 듯 했다. 그랬다 그녀는 분명 태식의 품에서 흐느끼고 있었다. 태식은 조용하고 조심스럽게 자신의 가슴에 기대어 있는 문희의 뺨을 만져 보았다. 그녀의 뺨은 젖어 있었다.
태식은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단지, 자신의 가슴에 파묻혀 울고 있는 문희의 머리를 쓰다듬어 줄 뿐이었다.
“알고 있었어?”
태식은 속삭이듯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어떻게…”
태식이 다시 말을 하려 하자 그녀의 손이 갑자기 올라와 태식의 입을 막았다.
“그냥, 우리는 모르고 있는 거야. 그냥, 우린 모르고 있는 거 라구.”
“문희야!”
태식이 문희를 부르자 갑자기 그녀는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그것은 한꺼번에 쏟아지는 용암처럼 뜨겁고 걷잡을 수 없는 것이었다. 태식의 가슴이 흥건히 젖어 오기 시작했고 그 뜨거운 열기는 태식의 가슴속으로 깊이 파고들어 또 다른 소용돌이를 만들고 있었다.
태식의 눈이 뜨거워지며 눈물이 솟구쳤다.
눈물은 다시 문희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태식의 눈물이 떨어 질 때마다 문희는 엉엉 소리 내어 울부짖었다.
태식은 손으로 문희의 얼굴을 들어 내려 보았다. 문희의 얼굴은 유리창으로 희미하게 들어 온 불빛에 비오는 밤 먹구름에 가려졌다 잠시 비친 달빛 같았다. 태식은 그녀의 젖은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까마득히 밀려드는 파도처럼 울컥거리던 입술이 잠잠해지며 수평선 너머 붉은 석양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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