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추反芻 (19) - 갈등
“문희야! 우리 이사 가자!”
이틀을 앓아누웠던 문희의 어머니는 퇴근하는 문희를 보자마자 이사 가자는 말부터 하였다.
“엄마 무슨 말이에요? 태식씨는 아무 말이 없었는데.”
“문희야! 그냥 이사 가자. 응? 엄마의 마지막 소원이라고 생각하고…”
“엄마! 아무리 그래도 이유가 있어야 할 것 아녜요?”
문희의 어머니는 문희에게 무작정 애원하듯 매달렸다.
“엄마! 혹시, 무슨 일 있었어요?”
문희의 어머니는 그저 울기만 했다. 며칠 전부터 갑작스럽게 누운 어머니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문희는 이사 가자며 울며 사정하는 어머니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문희는 답답했다. 아무래도 상황이 심상치 않은 것 같았다. 문희는 수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태식의 집 전화번호를 눌렀다.
잠시 후, 전화를 받은 사람은 태식의 어머니였다.
“어머니? 저 문희예요.”
수화기 속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저, 태식씨 집에 있어요?”
“태식이 집에 없다.”
수화기 속에서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어머니! 어머니?”
수화기에 대고 문희는 태식의 어머니를 불렀지만 이미 전화는 끊긴 후였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누구세요?”
“응, 나야.”
마침 태식이 현관문 앞에 와 있었다.
“잠깐만 기다려요.”
문희는 옷을 다시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문을 열었다.
태식이 집으로 들어오려 하자 문희는 가로막고 섰다.
“아냐! 그냥 나가서 이야기해요. 엄마가 좀 편찮으세요.”
“그래? 그러지 뭐.”
태식과 문희는 나란히 계단을 내려와 근처 공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태식씨? 집에 무슨 일 있어요?”
“아니? 내가 문희를 더 사랑하고 있다는 것 밖엔 아무런 변화가 없는데.”
태식은 애써 문희에게 웃어 보였다.
“치, 정말이야?”
태식이 웃자 문희도 그제야 안심이 되는 듯 웃었다.
“그런데, 실은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니까 엄마가 다짜고짜 이사를 가자고 하시는 거야?”
“뭐? 이사?”
“네, 혹시 태식씨 뭐 우리 엄마에게 들은 것 없어요?”
태식은 불현듯 지난 일요일 아침에 보이지 않았던 어머니가 생각났다. 분명히 태식은 어머니가 문희 어머니를 만났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요일 아침 문희에게 어머니가 어디 나가시더냐고 묻고 싶었지만 태식은 물어 보지 않는 것이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참, 문희씨에게 말하지 않으신 것을 나에게 말씀 하시겠어?”
“그것도 그러네?”
“문희야 너 토요일에 월차 낼 수 있어?”
“네, 이번 달엔 한 번도 쓰지 않아서 가능해요. 왜요?”
“응, 그냥 1박 2일로 여행이나 다녀올까 하고.”
“여행? 갑자기 무슨…”
문희는 의아해 했다. 지금껏 만난 이후로 한 번도 멀리 여행을 간 적이 없었던 태식이 여행을 가자고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뭐, 그냥. 결혼 전에 그래도 우리 추억이나 만들자는 취지지 뭐. 사실 그동안 여러 가지 일로 가고 싶어도 못 갔잖아.”
태식은 웃으며 문희에게 말했다.
“하긴 그랬죠. 그래요! 우리 그렇게 해요. 그런데 태식씨 어머니도 그렇고 우리 어머니도 그렇고 왠지 좀 이상한 것 같아요.”
“신경 쓰지 마. 결혼 앞두고 문희 어머니나 우리 어머니나 여러 가지로 스트레스 받아서 그러신 거야. 신경 쓰실 일이 어디 한 두 가지겠어!”
“어! 이제 보니 엄마 밥도 안차려주고 그냥 나왔네.”
“그래! 어서 들어가!”
태식은 문희가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서야 자신의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태식의 마음이 무거웠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어머니!”
태식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어머니를 찾았다.
아직 태근이 형은 들어오지 않았고 태식의 아버지만 거실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계셨다.
“왜? 엄마 안방에 있는데.”
태식은 방문을 열고 장롱 쪽으로 돌아누워 있는 어머니의 등 뒤에 다가가 앉았다.
“어머니! 혹시 문희 어머니 만나셨어요?”
“……”
“어머니!”
태식은 말이 없는 어머니의 어깨를 붙잡으며 큰소리로 다시 불렀다.
“그래! 만났다.”
태식의 어머니는 현기증이 이는 듯 힘겹게 일어나 앉고는 태식을 보며 말했다.
“내가 이 결혼 안 된다고 했다.”
“아니, 어머니 왜 그러세요? 도대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왜 그러시냔 말이에요?”
“너 엄마한테 거짓말을 했더구나. 문희 오빠에 대해서… 오빠가 뇌성마비 장애인이었다면서?”
태식의 어머니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태식에게 말했다.
“그래요.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한 건 사실이에요. 그렇지만 이미 문석이 형은 죽었고 그게 지금 이 결혼과 무슨 상관이에요?”
태식의 어머니 눈에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사실 태식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어머니에게 문석이 형에 대하여 숨긴 건 사실이지만 이미 문석이 사망한 이후 그것을 들추어내는 것도 그렇고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이유로 결혼까지 반대하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왜, 상관이 없냐? 너 결혼해서 뇌성마비 아이를 낳게 되면 어떡할래?”
“네? 어머니 그건 유전이 아니라는 것쯤은 어머니도 잘 알고 계시는 거잖아요?”
“그래도 찝찝해서 싫다. 그런 집안하고는 결혼 안 된다.”
태식은 어머니의 말을 받아 들이 수 없었다. 그것은 태식의 마음에도 어머니에게 분명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요! 이제야 알겠어요! 어머니는 지금 어머니의 과거 때문에 그러시는 거예요.”
갑작스러운 태식의 말에 태식의 어머니는 눈을 크게 뜨며 태식을 바라보았다. 이미 태식의 목소리는 높아지고 있었고 놀란 태식의 아버지가 거실에서 안방으로 들어오고 계셨다.
“왜요? 왜 말 못하세요. 어머니의 숨기고 싶은 과거 때문 아닌가요?”
“너 이놈!”
태식이 목소리를 높여 어머니를 몰아붙이자 등 뒤에서 보고 있던 아버지가 태식에게 소리쳤다.
“너 어머니한테 그게 무슨 말 버릇이냐?”
“말씀해 보세요! 왜 어머니의 과거 때문에 제가 결혼을 못해야 하는 거죠?”
“이 놈이, 보자보자 하니까.”
태식의 아버지는 태식의 어깨를 사정없이 잡아챘다. 그러나 여전히 어머니는 태식만을 바라 볼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아버지는 가만 계세요. 어머닌 지금 어머니의 과거가 들어 날까 무서워서 지금 이러시는 거예요. 그게 아닌가요? 아니면 아니라고 말씀해 보세요!”
태식은 일어서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차례로 돌아보며 소리쳤다.
“이놈이 그래도…”
태식의 얼굴에 아버지의 손이 날라들었다.
방안엔 잠시 정적이 흘렀다.
“나나 네 엄마나 널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네 엄마가 스스로 말할 때까지 참고 기다려 줄 수는 없었냐? 이 나쁜 놈아!”
어머니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고 태식은 뺨을 만지며 자신의 방문을 사정없이 닫으며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