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 포드가 영화감독을 욕심 내기 이전,
디자이너였던 시절부터 그의 퇴폐미 섞인 세련미를 좋아했다.
물론 톰 포드가 구찌 디자이너였을 때는...
그의 의상이 너무 어렸던 내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야했지만,
자신만의 레이블을 갖게되면서 좀더 정제된, 섹시함 한 방울 떨어뜨린 세련미가 좋았다.
그런 그가 감독한 첫 번째 영화 '싱글맨'.
영화 자체의 완성도를 떠나 영상미가 어마어마했다.
더군다나 등장인물들의 패션, 헤어스타일 모두 완벽했다.
두번째 작품인 '녹터널 애니멀스'가 개봉한다는 소식을 듣고 당장 달려가고 싶었으나..
2016년도에 내가 뭐가 바빴는지 어영부영하다가 못 보고 지나갔다.
얼마전 IPTV 를 무심히 돌리다가 '녹터널 애니멀스'가 눈에 띄었다.
자세를 고쳐앉고 봤다.
역시 톰 포드가 감독한 영화다웠다.
강렬하고 절제된 섹시함, 그리고 세련미로 잘 포장된 영화였다.
영화의 내용 자체도 매혹적이었지만, 영상미를 보는 맛도 있었다.
디자이너 출신이라 그런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하는 지 알고 있었다.
베니스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녹터널 애니멀스'.
보고나면 수상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주의 :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줄거리
주인공인 수잔 (에이미 애덤스) 은 부잣집에서 태어난 성공한 예술가이다. 대학교 졸업 후 가난한 소설가인 에드워드 (제이크 질렌할) 과의 결혼생활을 청산한 후, 멋진 사업가 남편과 재혼해서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다. 하지만 수잔은 겉으로는 화려하게 꾸미고 모든 걸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행복하지 않다. 멋진 사업가이자 다정했던 현재 남편은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났고, 그의 사업은 파산 직전이며, 수잔은 지독한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전 남편인 에드워드가 쓴 소설 'Nocturnal Animals'에 흠뻑 빠져든다.
소설은 자동차를 타고 가족여행을 떠난 토니 (이름은 토니이지만, 얼굴은 수잔의 전 남편인 제이크 질렌할의 얼굴) 의 가족이 인적이 드문 텍사스의 외딴 도로에서 불량배들과 만나면서 시작된다. 불량배들은 토니의 아내와 딸을 납치하고 어디론가 사라졌고, 토니는 기적적으로 도망친다. 이튿날 경찰에 사고 접수한 후 토니의 아내와 딸은 죽은 채로 발견된다. 이후 토니는 어디론가 사라진 불량배들을 잡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수잔 (에이미 애덤스) 의 슬픈 눈
영화를 보는 내내 수잔 역의 에이미 애덤스의 슬픈 눈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분명 수잔은 모든 걸 가진 여자다. 겉으로는. 유복한 집에서 빵빵한 지원을 받고 공부하고, 예술가로서도 성공했다. 너무나 잘생기고 멋진 남편(아미 해머)을 만나 모두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다. 하지만 수잔의 눈은 항상 슬프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화려하게 꾸미고 눈화장도 짙게 했지만, 그 눈빛은 항상 쓸쓸함을 띈다.
왜일까.
너무나 당연하다. 자신이 그토록 경멸하던 자신의 엄마와 똑같은 모습이 된 자기 자신에 대한 염증일 것이다. 세속적 성공만이 삶의 모든 가치가 된 자기 자신. 나는 엄마와 다를거라 믿었지만 결국 똑같은 모습을 '선택'한 스스로가 싫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수잔을 우리가 비난할 수 있을까?
앞서 줄거리에서 말했듯이 수잔은 일평생을 '부자'로 살아왔다. 너무나 당연하게 주어진 삶이었다. 하지만 수잔은 그러한 삶에서 벗어나 주도적인 삶을 살고자 노력했다.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 사랑하는 에드워드와의 결혼이었다. 하지만 수잔이 처음으로 맞닥뜨린 현실은 너무나 차가웠다. 사랑으로 극복할 수 없는 게 현실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수잔이 그러한 현실을 헤쳐나가기엔 너무 연약했다. 결국 수잔은 현실에 굴복하고 에드워드와 이혼한 후, 자신의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만약 수잔이 그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은 안하무인의 부잣집 딸이었으면, 그녀의 눈은 그런 슬픔을 띄지 않았을 것이다. 오만함과 자신의 삶에 대한 만족감이 들어있었겠지. 하지만 수잔은 현실에 굴복한 자기 자신의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윤동주 시인은 '서시'에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라고 말한다. 다른 독립운동가처럼 밖으로 나가 싸우지 못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했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윤동주 시인이 그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시를 쓰며 일제에 맞서 싸운 사실을. 부끄러움을 아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이 더 부끄러운 것이다.
수잔도 비슷하다. 자신의 태어난 배경이나 어머니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수잔은 태생적으로 현실에 맞서 싸울 힘이 없는 사람일 수 있다. 하지만 수잔은 현실에 맞서봤고, 장렬히 패배했지만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수잔의 슬픈 눈이 마냥 패배자의 눈처럼 느껴지지 않았나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철저히 버렸던 수잔이 안타깝게 느껴졌나보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인 내가 수잔의 슬픔에 공감하나보다.
에드워드 (제이크 질렌할) 는 진정한 복수를 한 걸까?
결과적으로 이 영화는 복수극이다. 수잔에게 철저히 버려졌던 에드워드가 소설을 통해 수잔에게 복수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관객은 통쾌함을 느끼지 못한다. 소설 속의 토니도 복수에 성공하지만 결국 그 자신도 한쪽 눈을 잃은 채 사막에서 죽어간다.
나는 아직까지 그 무언가에 극도의 분노와 복수심을 느껴본 적이 없다. 때문에 에드워드의 19년동안 지속된 복수심에 공감하지 못하는 것일수도 있다. 그렇지만 누군가를 향한 극도의 복수심은 상대방이 아니라 결국 나를 갉아먹는다고 생각한다.
에드워드는 이를 갈며 자신의 인생을 투영시켜 19년만에 소설을 완성하지만, 결국 그 자신은 소설 속 토니처럼 모든 걸 잃은 상태가 아닐까.
미움과 분노, 복수심은 하나의 세트와도 같다. 미움이 쌓이다가 분노, 복수심으로 나아간다. 나 또한 사회에 나와 내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화나는 일이 종종 생긴다. 그러한 일들의 빈도수가 많아지다보니 자그마한 일에도 화를 내게 된다.
화내는 것도 습관이라던데.
내 화를 어떻게 다스리고 어떻게 평온을 유지할까에 대해 고민해봐야겠다.
오래전에 열심히 번역했던 기억이 있는 영화네요. ^^;
앗, 이 영화 번역하셨어요?! 우와 이렇게 번역가님을 뵙게 되네요 ㅎㅎ
네... 일하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많이 했던 영화네요. ^^
마지막 말씀이 눈에 확 들어오네요
평온을 유지하고 싶네요 진짜 ㅠㅠ
전 출장왔다가 주말에 급 옆동네인 로마와서 문화생활 했더니, 지금 마음이 너무 평온해요 ㅎㅎㅎ 결국은 여행이 답인건가요 ...? ㅋㅋㅋ
와~로마에서 문화생활이라니
이거야 말로 제가 꿈꾸는 삶이에요!
적당히 일을 하고 적당히 여행 다니고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너무 많이 일하고 조금 여행다녀서 제 삶의 밸런스는 많이 깨져있지만... 그래도 가끔씩 머리를 식혀주는 게 확실히 도움이 되요 ㅎㅎ 그렇지만 정말 이번주 너무 힘든 한 주였어요 ㅠㅠ
잘 봤습니다. 화의 독은 한방울일 때가 가장 섹시한 듯 합니다.
오, 그렇네요 정말! 화 한 방울이면 무언가를 열심히 할 동기 원천이 되니까 :)
스포 있다고 하셔서 그 이후는 읽지 않았어요. 톰 포드가 또 영화를 찍었는지 몰랐네요. 영화 보고, 쓰신 글도 읽어 볼게요. 후아... 기대됩니다.
확실히 톰포드의 손을 거치면 모든게 화보가 됩니다. ㅎㅎ
디자이너를 하셨던 분이 영화감독을
하게 되다니...
욕심쟁이라는 단어가 절로 떠오르네요 ㅋ
와....
겉으로 화려해보이는 삶 이면에
숨겨진 내력이 참;;;
깊이 스며드는 말이네요..
그리고
복수는 결국 자신을 갉아먹을 뿐이기에
역으로 복수라는 원동력으로 성공한
와신상담의 사례는;;;
잘 보고 가요
톰포드 이분 이력이 정말 재밌는게, 어릴땐 영화배우를 꿈꿨는데 성공못할거 같으니까 디자이너로 방향을 바꿔서 대스타가 된 케이스예요. 그렇게 디자이너로 성공하고나니 어릴때 꿈인 영화쪽으로 눈을 돌린거죠. 그래서 영화까지 만들게 되었대요 ㅎㅎ 결국 어릴때 꿈을 이루게 된 톰포드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부럽습니다 :)
제가 아직까지 누군가에 대한 복수를 원한적이 없고 복수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때문에, 그 영화를 보고 이렇게 해석한 걸수도 있어요. 누군가는 완벽하고 멋진 복수였다고도 해석할수도 있을거란 생각도 듭니다.
덕분에 디자이너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었어요 :) 쓰면 살짝 고양이 느낌이 나는 톰포드 썬글라스를 샀는데 ㅋㅋ 쓸 때마다 생각날듯요. 영화도 챙겨볼께요. 감사합니다!!!
저도 캣츠아이 스타일의 선글라스 좋아해요! 뭔가 나도 세련된 도시녀 흉내 낼 수 있을것만 같아서요! 현실은 도시에 사는 쭈그리지만...ㅎㅎ
현실에 굴종하고 패배감과 부끄러움을 느껴버린 주인공의 이야기를 듣자니 <피아니스트>의 스필만이 노역장에서 쓰러진 장면이 떠오르네요. 같은 이치로 저는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이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헤밍웨이가 어부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노인과 바다'를 쓰는 것이 낫고, 스티브 잡스가 컴퓨터 수리공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사업을 하는 것이 낫겠지요. 아리스토텔레스도 부유했지만 역시 그는 집안의 재력을 이용해 철학을 하는 게 무엇보다 옳았을 겁니다.
그래서 때로 부유한 이들이 자신에게 쏟아진 물질적 풍요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낄 수도 있지만, 그 부끄러움 만큼의 값진 일에 쓴다면 그건 오히려 바람직한 일이 될 것입니다. 말씀해주신 것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풍요를 무감각하게 받아들이고 허비하는, 그런 행동들에 대해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들이 마땅히 부끄러워해야할 것입니다.
복수에 관해서는 한국 영화인 <악마를 보았다>가 떠오르는군요. 주인공이 끝내 '악마'를 처단하지만 마지막 씬에서 보여줬던 울음처럼 그런 질 낮은 인간에 대해 복수했을 때, 그는 어떤 만족감도 느낄 수 없었을 겁니다. 그건 마치 개가 문다고 해서 개를 똑같이 물어버린것과 같으니까요. 그러니 '화'에 대해서는, 그것이 '화'를 내어 충분히 알아들을만한 상대인가가 중요한 것 같네요. 나의 영적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상대에게 화를 낸다는 것은 늪을 호수로 만들겠다고 내 호수에 있는 물을 길어나르는 것과 같은 피곤함이지요. 피곤하기만 하면 다행이지만 그러한 일이 반복되면 내 호수의 물이 말라버립니다. 다만 그러한 것을 자각할 수 있으려면 먼저 자신이 맑은 호수를 가지고 있어야 겠지요!
경민님의 댓글을 읽고나니 저만의 해석이라고 생각했던 게 좀더 근거있는 논리처럼 느껴져서 기분이 좋아집니다. ㅎㅎ 분명 주인공인 수잔은 타고난 부를 통해 좋은 예술작품을 감별하는 능력을 자연스레 기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능력을 사용해서 많은 대중들에게 좋은 작품을 소개할 수 있었어요. 경민님이 예로 들어주신 헤밍웨이를 비롯해 스티브잡스, 아리스토텔레스 만큼은 아니지만, 분명 사회 전체로 보면 수잔도 그 능력의 최대치를 발휘할 수 있는 상황을 선택한걸로 보입니다.
저는 무섭거나 잔인한 영화를 못봐서 "악마를 보았다" 역시 보지못했지만, 말씀하신 것처럼 누군가에 대해 복수를 결심하기 전에 그 상대방이 내 소중한 시간과 체력, 감정의 격동을 감당할만한 상대인가를 생각해야겠어요. 우리 속담에 'X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냐'라는 말이 달리 있는건 아니겠지요. ㅎㅎ
분노를 연료로 19년을 달려 소설을 써냈고 모든걸 쏟아부었다면 굉장히 허무해질 것 같아요. 에드워드가 비워낸(혹은 잃어버린?) 마음을 좋은 것들로 채우면 좋겠네요. 수잔의 상황을 그 누구보다도 이해할 수 있었을 그가 어떤 복수를 했고 어떤 결말이었을까요 궁금해지네요 :)
아 셀레스텔님 블로그를 얼마만에 놀러온지 모르겠네요 ㅠㅠ
가까이 있는데 갈 수 없는 느낌이랄까.. 뭔가 제가 너무 지쳐 있었던거 같아요. 이제 좀 기운을 내야죠 ^^
톰 포드 영화는 아직 본 적이 없지만, 에이미 아담스 좋아하는 배우에요. 맨오브스틸에서 레이스로인역을 맡을때 보면서 그야말로 참 "아담"하면서 눈빛이 주는 매력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팀버튼 감독의 "빅 아이즈"에서도 예술가로서 나왔을때 참 잘어울리더라고요.
"녹턴 애니멀즈"에서도 예술가로 출연했다고하니, 어떤 연기를 했는지 궁금해 집니다. 그리고 슬픔이 담긴 눈이라고 하시니 짐작이 가요. 빅아이즈에서도 약간은 불운의 예술가로 그려졌었거든요 ^^(보셨을지도 모르지만..;;)
상대에 대한 복수심, 미움, 분노.. 정말 하나의 세트 같죠.
사실 어떻게 보면 별 일도 아닌데 저도 이번 일을 겪으면서 분노가 치밀고 막 복수하고 싶고 ㅠㅠ ㅎㅎㅎ 지금 생각해 보니 왜 그렇게까지 화가 났을까 싶은데, 당시에는 정말 화가 머리끝까지 났었어요. 그들의 무책임한 행동에 ㅠㅠ
셀레님은 힘든 출장이 많은 직장을 갖고 계시기 때문에 보람있는 일도 많으시겠지만, 여러모로 화나는 일도 많으실것 같아요. 저는 화를내고 나니 참 진이 다 빠지더라고요. 부디 건강도 화도 잘 다스리시면서 일하시길 기도할께요 ㅠㅠ 힘내세요!!!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