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한 세기 전의 서울은>

in #kr7 years ago

1929년 9월 초가을에 나는 옛 동대문부인병원(현 이대부속병원) 산실에서 태어났다. 어스름 새벽의 고요를 깨고 힘차게 울어대서 어머님은 분명 남아일 것이라고 생각하셨단다. 아버님은 신문사 일로 바쁘다고 사흘 후에 병원에 들르셨다고 한다. 나는 자라면서 늘 섭섭한 마음이 있었던지 그것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어리광을 부렸다. 위로 오빠가 있었건만 워낙 남아선호가 심했던 시절이라 내가 사내아이이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 해 집안 내에서 네 명의 여아가 내리 태어났으니 시골에 계신 할아버님도 ‘쯧쯧’ 혀를 차시며 마땅치 않아 하셨단다.

서울 한복판인 ‘종로구 서린동 173번지’가 나의 본적지이다.
지금의 동아일보사 신문박물관 뒤 골목에 우리 집이 있고 담을 휘어 돌아가면 골목 안의 막다른 집에 아버님과 동아일보에 같이 출근하시던 ‘명정 40년’을 쓰신 영문학자 변영로님이 살고 계셨다.

‘농민은 농사를 지어야지.’ 하시는 할아버님의 완고한 반대에 부딪혀 아버님은 충청도 산골에서 소학교 졸업반 일본인 담임선생님의 소개장만 달랑 들고 몰래 고향을 뜨실 수밖에 없었다. 12세 어린 소년은 이른 봄 괴나리봇짐을 허리에 차고 아흔아홉 고개를 걸어서 청운의 꿈을 안고 천안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에 도착했다. 그 때 처음으로 낯선 서울의 제일고보에서 수학한 것이 일생에서 제일 힘든 때였다고 회고하셨다. 일본 유학을 하고 돌아와 기자 생활을 하던 중 어머니의 담임선생님의 중매로 결혼하셨다. 어머님은 파고다공원 길 건너편에 이진사 댁 따님으로 99칸의 안채 내실에서 태어나 몸종을 거느리며 곱게 자라 사범 부속소학교를 거쳐 여학교를 졸업한 신여성이었다.

1900년 한국 땅을 처음 찾은 미 해군 해리 웹스터 중령은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한국어판에 빛바랜 흑백사진인 100년 전 순박한 서울의 모습을 올렸는데 “이 풍요의 땅에서 주민들은 가난에 쪼들리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순박하며 매력적인 사람들이다. 한국인은 평균적인 몽골인보다 크고 힘도 세며 더 잘 생겼다. 한국의 처녀들도 중국이나 일본 처녀들보다 예쁘다. 이들의 이목구비는 서양인 미인의 표준에 가깝다.”라고 썼다.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라는 후쿠사와 요키치는 정한론을 부르짖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집집마다 글을 읽고 있는 조선을 배우자고 주장했다. 근대 서양인들은 일본은 ‘무사의 나라’, 조선은 ‘학자의 나라’로 즉 ‘일본은 칼의 나라’, ‘조선은 붓의 나라’로 표현하였다.

어린 시절에 본 일제시대 정치 일번지인 광화문통은 한적한 시골 마을같이 겉으론 평온했다. 골목을 돌아나오면 왼쪽은 지금의 청계천 광장이고 다리 밑으로는 틈틈이 제멋대로 박힌 크고 작은 돌을 끼고 개천물이 여울져 휘어가는 물줄기 따라 졸졸 흐르고 있었다. 햇빛이 쨍하고 따가운 여름 날에는 삼삼오오 빨래하는 아낙네들이 방망이 소리 요란하게 장단 맞추고 있었다.

그 당시 서울의 인구는 20만, 그 중 80%가 문맹이었다.

나는 아침마다 중문에 던져진 신문을 들고 사랑방의 아버님의 따끈한 이부자리에 들어가 신문 펼치신 곁에서 어깨 너머로 취학 전에 한글을 깨우쳤다. 우리 집에서 오른 쪽으로 돌아나가면 넓은 풀밭을 지나 아버님이 다니시는 동아일보사가 있었고 나는 심심하면 그 곳에 놀러갔다. 곧바로 3층에 올라가면 전화교환실이 있고 넓은 회의실을 지나면 초대 여기자이신 최은희님, 후에 초대 여성 국회의원 박순천님, 추계 학원 이사장이 되신 황신덕님, 6.25 때 납치되어 돌아오지 못하신 박승호님을 만날 수 있었는데 나를 몹시도 귀여워해 주시며 “저 눈매 좀 봐, 박선생님 딸 아니랄까봐.”하며 놀리셨다. 지금도 어머님 그리듯 생각나는 분들이다.

또 길 건너 작은 한옥에 사시던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의 시인 노천명님이 생각난다. 지금 생각하니 파리한 얼굴로 나를 맞아주시던 그 분은 자리 보전하고 일어나지도 못하시며 ‘왔냐’고 작은 소리로 기운 없이 말하였다. 나는 그 때 생전 처음으로 시인을 만났다. 주위에 그렇게 아픈 사람을 못 봐서 어린 마음에 시인은 생각을 많이 해서 몸이 아픈가 보다 생각했었다.

1936년 일장기 말살사건이 일어나 민족지인 동아일보를 정간시킴으로써 그런대로 평온했던 우리 집안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 이듬해 우리는 신문로1가 덕수초등학교 아래 한옥으로 이사했다. 이제는 아버지가 요주의 인물이 되어 골목 건너 ‘서울 여관’에 형사가 상주하며 우리 집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문소리에도 우리 집을 향한 창문을 살짝 열고 염탐하면 나는 확 돌아보고 한참을 지지 않고 노려보며 눈싸움울 했다. 이를 보시던 어머님이 “그 사람도 한국 사람이니 그러지 말라” 하셨다. 그 형사는 아버님을 “선생님, 선생님”하고 불렀다.

일제가 우리에게 저지른 가장 못된 짓 중의 하나는 1940년의 창씨개명이다. 전통지명도 자신들의 입맛대로 고치고 대대로 물려받은 이름 대신 일본식 이름을 지어 쓰라고 강요한 것이다. 아버님과 등산 다니던 백운봉, 인수봉, 노적봉을 일컬은 삼각산을 한강 남쪽에 남한산이 있다는 이유로 북한산으로 고쳤다. 일제의 강요에도 우리 집에서 이것은 통하지 않았다. 아버님의 말씀인즉 ‘박기숙’만큼 예쁜 이름이 어디 있는가 하시면서 껄껄 웃으셨고 끝까지 버티셨다. 갖은 핍박을 받으며 끝까지 불응한 사람이 5% 정도였다고 들었다.

지난 휴일 둘째 사위가 광화문에 드라이브 나가자고 전화가 왔다. 장모가 어릴 때 자란 곳이라고 마음을 써준 것이다. 청계천은 몇 년 전 개통하던 날 다녀왔었다. 그 때에는 인파에 밀려 바깥 풍경이 보이지 않자 아예 차 천장을 열어 동승하셨던 사부인과 카퍼레이드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었다. 이제 그 분은 저 세상으로 가셨으니 하늘나라에서 오늘의 나를 보고 계실까. 벌써 세월은 삼 년이 흘렀다. 아마 사위도 돌아가신 어머님 생각이 나서 장모를 불러낸 건지도 모르겠다.

청계천 광장에 나와 동아일보사를 보니 그 옛날 이 근방에서 제일 높은 5층 건물이 지금 빌딩 사이에서 작아져 버려 마음이 아려왔다.

반 세기 전보다 네 갑절이나 넓어진 서울 전역을 1900년에 설치한 전차가 다녔다. 서울의 명물 전차 길을 사통팔방 ‘땡땡’ 소리를 울리며 지나가던 정겨운 소리, 그 추억의 멜로디가 환청처럼 귀에 울린다. 그리고 고층빌딩 사이 종로통을 바라보면서 어머님과 지금의 종로타워 자리에 있던 화신백화점 나들이가 기다려져 떼를 쓰던 어린 시절이 불현듯 떠오른다.

나는 광화문 광장의 이순신 장군, 세종대왕, 육조거리 너머 광화문, 그 너머 경복궁과 삼각산 허리에 걸린 푸른 하늘의 흰 구름을 하염없이 쫓고 있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교보빌딩 이마에 걸린 정현종님의 글을 읽으며 우리 모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시대를 넘나들며 우르르 몰려왔다가 우르르 몰려가 버리는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오늘도 광화문은 시끌거린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영원히 펄펄 살아 움직일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