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l essay-케빈으로부터 1] 설렘의 실체

in #kr6 years ago

설 렘 의 실 체

   S o u l   e s s a y   F r o m   K e v i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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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넘어갈 때,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넘어갈 때, 고등학교에서 대학교로 넘어갈 때, 이전의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사회로 넘어갈 때, 나의 감정 공장에선 설렘과 두려움이라는, 호환되지 않을 것 같은 두 제품을 마구 찍어내곤 했다.

 비율이 다를 뿐이지, 새로운 세계에 발들일 때는 이 두 가지 감정이 공존하게 마련이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 한 가지 깨달은 것은, 그 두 감정 모두 과잉 생산이었다는 점이다. 첫 날을 지내보면 알게 된다. 내 설렘이 얼마나 막연한 것이었던지. 내 두려움이 얼마나 근거 없는 것이었던지.

 첫 날을 보내고 나서 입에서 나오는 것은 이런 말들이다.
“뭐, 생각보다 나쁘진 않았어.”
“뭐, 그저 그랬어.”
“음. 무난한 하루였어.”

 우리에게 <케빈은 열두 살>로 알려진 드라마 'The wonder years'의 가장 첫 편엔 주인공 케빈 아놀드의 중학교 생활의 첫 날 이야기가 나온다. 아기자기한 유년 생활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세계에 발들인 케빈의 생활은 기대와 설렘 만큼 화려하고 멋질까.

 안경잡이 동네 친구일 뿐이었던 위니 쿠퍼가 안경을 벗고 청순함을 뽐내며 스쿨버스 정류장으로 걸어올 때, 케빈은 자신이 이전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로 한 발 내딛었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설렘을 준 위니에게 천천히 다가가려고 한 마음은, 심술궂은 친형 웨인이 학교 식당에서 공개적으로 그들을 엮고 놀리는 바람에 산산이 조각난다. 그 수치심을 감추기 위해 선생님에게 반항했다가 부모님이 학교로 소환되기에 이른다.

 새로운 세계의 입성을 환영하듯 악세사리처럼 할당된 개인 사물함을 처음 열어보곤 설렜던 기분은, 불과 1미터 거리에 학교에서 예쁘기로 소문난 여자 선배의 사물함이 있다는 걸 알고 최대치로 올라간다. 하지만, 자신과 그 여자 선배의 사물함 사이에 거짓말처럼 불량하기 이를 데 없는 수염 난 선배의 사물함이 있었다. 설렘이 산산이 부서진 건 말할 것도 없다. 설상가상으로 그 수염 난 선배는 케빈의 사물함을 강탈하고 그곳에 청소년 비행의 상징과도 같은 물건들을 넣어둔다. 이 사실이 밖으로 새어 나가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협박은 덤이다.

 케빈이 새로운 세계에서 보낸 첫 날은, 감정 공장에서 생산된 설렘은 과잉이었을 뿐 아니라, 그나마 납품한 것도 불량으로 밝혀지게 되는 하루였다. 케빈에게 중학교 첫 날은 좋지 않은 의미에서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우리가 새로운 세계에 발들일 때 느끼는 설렘의 실체는 무엇일까. 설렘의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사람’이다. 그것은 내 존재를 나눌 누군가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관계에 대한 기대감이다. 그것은 우정에 관한 것일 수도, 사랑에 관한 것일 수도 있다.

 내가 중학생이 된 첫 날을 떠올려본다. 내게도 그 날은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내가 배정받은 중학교는 우리 집에서도,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에서도 가장 먼 곳이었다. 우리 학교 친구들 대부분이 가는 가까운 중학교에 자리가 없어서, 운 나쁘게 걸린 몇몇 만이 배정받는 학교였다. 우리 집에서 중학교를 가려면 버스를 갈아타야 했다. 그 중학교는 큰 회사의 공장이 있는 곳에 위치해서, 아침 등굣길은 버스에서부터 전쟁이었다. 작업복을 입은 아저씨들로 가득한 버스에서 비 오는 날 연못의 잉어처럼 숨을 쉬기 위해 입을 위로 뻐끔거려야 했다. 내리기 위해서는 온 힘을 다해 거대한 바위 사이를 비집고 나가야 했다. 그나마 첫 번째 버스에 타면 행운이었다. 버스가 도착하면 먹이를 향해 달려드는 잉어 떼처럼 작업복을 입은 아저씨들이 몰려들었다. 버스가 정류장에 들어오며 서서히 속도를 줄일 때 버스가 설 곳의 위치를 제대로 예측해야 탑승에 성공할 수 있었다. 자주 오는 버스도 아닌데 놓치면 등교 시간이 간당간당했고, 한 번 더 놓치면 확실히 지각이었다.

 중학교라는 새로운 세계의 관문은 아침부터 비좁았다. 그 좁은 문을 통과하는 동안 불과 며칠 전까지 느끼던 설렘은 늦봄의 눈처럼 녹아 온데간데없었다. ‘사람’을 만나기 전에 ‘버스’부터 상대해야 했으니까.

 처음 삼일동안 연속으로 지각한 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만원 버스타기의 노련함을 갖추기까지는 꽤 시간이 흐른 뒤였기 때문이다. 40대 후반의 남자 담임 선생님은 참 좋은 분이셨다. 하지만, 삼일 연속으로 지각한 학생을 그냥 보아줄 순 없었다. 삼일 째 되는 날 아침, 뺨을 맞았다. 세 번 지각이어선지, 정확히 3대였다. 내 설렘의 흐릿한 대상이었던 선생님과 반 친구들 앞에서 울려 퍼진 뺨맞는 소리가, 새 세계에 발들인 날 위한 팡파르였던 것이다.

 케빈 아놀드가 새로운 세계에 입성한 첫 날 실망의 정점은, 위니 쿠퍼의 오빠가 베트남 전쟁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이었다. 19세인 위니 쿠퍼의 오빠는 케빈이 동경하던 인물이었다. 쫀쫀한 구석은 찾아볼 수 없고 쿨하기 이를 데 없는, 남자 중의 남자였다. 그 소식을 접하고 케빈은 그저 걷는다. 걷다가 도착한 곳은 어릴 적 가곤하던 작은 숲이었다. 그곳엔 상심한 위니 쿠퍼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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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빈에게 새 세계는 실망만을 안겨준 건 아니었다. 실망의 정점에서 케빈은 위니를 위로하고 생애 첫 키스를 한다. 비현실적인 전개이지만, 모든 설렘의 좌절을 상쇄하고도 남을 ‘하루의 끝’이었다. 설렘의 시작과 끝은 모두 ‘사람’과 ‘관계’로부터 비롯된다.

 케빈이 보냈던 그 하루의 전개는 현실에선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삶에서 그 하루의 이야기는 하나의 은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한, 우리의 설렘은 끊임없이 생산, 좌절, 확인을 반복하게 될 거라는 것 말이다.

 성장한다는 건 어쩌면 설렘의 실체가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이 아닐까. 사탕과 장난감, 놀이 공원에서의 하루, 만화 영화가 설렘의 실체였던 시기를 지나 우리는 비로소 새로운 ‘사람’과 ‘관계’에 설레게 된다. 모두 다 그렇게 어른이 된다.

그건 우리 둘 모두에게 첫 키스였다.
우린 후에 그 일에 대해 전혀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난 그 일이 있었던 그 날을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어쨌든 위니도 그럴 거란 걸 안다.
어떤 떠벌이가 교외의 흥미 없음을 얘기하거나
TV세대의 의식 없음을 주절거리 때마다
TV 현관에 주차되어 있는 다지 차나
테이블에 놓인 흰 빵을 보며 땅거미가 지는 순간을 맞을 때,
TV 빛이 하나씩 점멸할 때쯤이면,
동일한 수상기 각각 그 안에서
그곳엔 각자의 이야기를 지닌 사람들이 있었음을 기억한다.
고통으로 연계되고 사랑을 위해 투쟁하는 가족들이 있었다.
웃음을 선사하며 우릴 눈물짓게 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슬픔과 기쁨을 공유하는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



P.S.

 ‘From Kevin(케빈으로부터)’ 라는 제목으로 에세이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어릴 적 방영했던 미드 <케빈은 열두 살>(The wonder years)에 대한 에세이입니다. 흥미로운 에세이가 되길 바랍니다.
 최근 스팀잇 글쓰기가 좀 뜸했습니다. 글쓰기를 쉰 건 아닙니다. 오프라인에서 꾸준히 글을 썼습니다. 스팀잇에 글을 꾸준히 올릴 때보다 더 많은 시간, 더 규칙적으로 썼습니다. 그러면서도 스팀잇에서의 글쓰기는 달콤한 꿀단지처럼, 때론 묵은 숙제처럼 여전히 그 자리에서 저를 향해 손짓합니다. 에세이 시리즈로 그 갈증을 풀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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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이 시리즈를 애독하게 될 것 같은 느낌입니다!!
지각했다고 뺨따구는 넘 속상하네요ㅠㅠ

맞아도 싼,,ㅋ 그덕에 기억에 남는 날이 되었으니 말이죠. 애독 환영합니다ㅎ

좋은 글 감사합니다. 다음 에세이 기다리고있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반갑습니다^^

시리즈로 돌아오셨군요.
격하게 환영합니다.^^

저도 중학생이 되면서 버스로 통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리바리 중학생 때는 꽤나 성실했었는데, 고등학생이 되고부터는 학교 교장선생님도 알아주는 지각생이었답니다.ㅜㅜ
만원버스가 싫어서였던 거 같지 않습니다만...ㅋ

하. 학교 교장선생님도 아실 정도면 그 업계에서 나름 인지도를 쌓으신 거군요ㅋㅋ 만원버스때문이 아니라면 등굣길에서 명상이나 사색을 하느라,, ㅎ
지금 스티밋에선 성실한 중학생 모드로 돌아가셨군요.
환영 감사합니다. ^^

모든 기억이 그렇듯 어릴 때의 처음도 강렬하게 남는 것 같습니다.
잡화점 휴가기간이라 생각했습니다ㅎㅎㅎ이번 에세이도 기대하겠습니다.

잡화점 내부 공사기간,,ㅎㅎ 강렬한 처음들이 더 생각나네요. 언제나 기대는 감사와 환영을!!^^

간만에 오셨네요! 얼마전 TV 주제곡을 다룬 포스팅에서 이 드라마 주제곡을 언급한 적이 있는데, 제 경우는 유튜브와 넷플릭스에서 봐서 나름 친숙합니다. 아마 재방도 많이 했던 것 같고...이걸로 아예 시리즈를 쓰신다니 굉장한 애정이 느껴지네요!

네 어렸을 적부터 아주 애정하던 드라마입니다. 커서도 쭉 봤지요.^^ 어린이가 등장하지만 어른에게도 공감을 주는 이야기지요.
도입부에 흘러나오는 주제곡을 다루셨군요! 귀에 맴도는 것 같습니다ㅎ

soosoo님이 kyslmate님을 멘션하셨습니당.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연결되용~ ^^
soosoo님의 [Link & List] 유급 평론가들의 도서리뷰 #0047 / 180802 (323권)

... himapan 2 kyslmate/td> 4 kyunga 6 ...

(jjangjjangman 태그 사용시 댓글을 남깁니다.)
[제 0회 짱짱맨배 42일장]5주차 보상글추천, 1,2,3,4주차 보상지급을 발표합니다.(계속 리스팅 할 예정)
https://steemit.com/kr/@virus707/0-42-5-1-2-3-4

5주차에 도전하세요

그리고 즐거운 스티밋하세요!

감사합니다. ㅎ

헉 정말 좋아했던 드라마에요..(드라마라고 하는게 맞겠죠?ㅎㅎ)
12,13살까지 봤던 거 같은데..ㅎㅎ
그냥 깔깔대며 웃기만 했던 거 같은데...나름 의미가 다 있었네요.ㅎ
저도 중학교가 아주 멀었습니다.ㅋ 버스타고 1시간 20분이 걸렸죠.ㅎ
고생하셨어요..ㅎㅎㅎ 기대하겠습니다~~

네 어릴 땐 그 눈높이로, 커서는 어른의 시점에서 다 재미와 의미를 얻을 수 있었던 드라마였지요.ㅎ 와 1시간 20분이면 정말 먼 거리네요. 전 버스 놓치지 않으면 40~50분 정도면 갈 수 있었는데요. 불굴의 의지로 중학교를 마치셨겠네요.ㅋ
기대 감사합니다.^^

살면서 매번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할 때마다 항상 설렘과 두려움을 느끼면서 또 실망하고 그럭저럭 적응했던 것 같아요. 감정과잉이라는 걸 알지만, 또 저절로 드는 마음들을 어찌하지 못하고.. 하나의 영화 안에서 매번 다른 걸 발견하는 묶음의 에세이라니, 넘 좋네요. :)

늘 막상 맞닥뜨리면 별 거 없는 새 세계였죠. ㅎㅎ 어쩌면 새 날에 경험할 실체보다 그 전의 설렘 자체를 즐기는 것일수도 있겠지요.
좋아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으쌰하면서 써보겠어요.^^

우아.....기대되요!

감사합니다ㅎㅎ

아련한 기억속의 케빈^^ 잊고 지냈는데 편하고 따뜻한 글로 전해지니 호기심 많던 사춘기 시절의 느낌이 되살아나는듯 합니다. 항상 찰진 글 읽게 해주심에 고맙습니다

케빈을 기억하고 계시는군요ㅎ KBS에서 방영된 걸 본 세대시겠죠?ㅋ 계속 느낌을 되살려보도록 애쓰겠습니다ㅎㅎ

제가 중학생땐 학교가 버스 타기에도 애매한 거리라 30분 정도 걸어다녔던 기억이 나네요 ^^
에세이 시리즈 기대됩니다 :)

30분을 걸어서~~ 몇리를 걸어 등교했다는 그 세대, 는 아니실텐데요ㅋㅋ

케빈은 열세살 어릴 때 재밌게 봤었는데..
근데 중학생한테 뺨 때리기는.. ㅠ.ㅠ

그 시절엔 뺨 맞는 건 예사였죠.ㅎㅎ
역시 케빈 세대시군요ㅋ

저도 잼나게 보던 미드네요~
다음 에세이도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네 그 시절 분이시군요ㅎ 열심히 써볼 생각입니다^^

어릴때 정말 재미나게 봤었는데
이건 재방을 안해주더라구요
아 다시 보고싶네용

네 재미있게 보았었죠. 유튜브에 찾으시면 보실 수 있을 거예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