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에 대한 글쓰기] 소설은 얼마나 실용적일까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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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읽기를 좋아하거나, 더 나아가 소설이나 상상력의 산물인 픽션 쓰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이런 질문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을 것입니다. (이 얘기를 하게 된 이상 생각해본 적 없어도 할 수 없습니다. 지금 호기심을 가져보시는 건 어떨지.)

 “소설이라는 건 단지 흥밋거리에 불과하지 않은가. 소설이나 동화가 실용적인 많은 책들에 비해서 우리의 실제적인 삶에 더 줄 수 있는 건 무엇인가.”


 저는 이십대 시절에, 실제로 누군가에게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소설이 실용적인가?”

 그 물음은, 소설이 지금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당장 우리가 집어 들어 먹을 수 있는 빵이나 탈 수 있는 차보다 더 가치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소설이나 이야기를 그저 좋아하기만 하고 즐겁게 읽기만 했던 저는, 당황하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엔, 소설이 빵과 차보다 나은 점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대답하진 못하고 집에 가서 열심히 고민한 게, '그래, 소설은 실용적이지 않지. 하지만 다른 가치가 있어! 우리의 정서를 풍요롭게 해주잖아? 정신을 살찌우는 것이고.' 하고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결론을 내렸던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의 제 결론은 틀렸습니다.

 어릴 적 그가 다시 물어온다면, 소설은 그 어떤 것보다 '실용적'이라고 대답해줄 것입니다. '실용적'이라는 말을 다른 뜻으로 정의하는 꼼수는 부리지 않을 것입니다. 제 대답은 ‘실제로 쓰거나 쓰임’이라는 ‘실용’, 그 사전적 의미 그대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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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입니다.'


 “소설책을 냄비 받침으로 쓰거나 두꺼운 것은 목침으로 쓸 수도 있다는 뜻이야.” 와 같이 허무 개그로 마무리하지 않고도 소설의 실용성은 단언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을 채워 온 상상력의 결과물들



 소설이 실용적인 첫 번째 근거를 들어볼까요? 지금 우리가 누리는 많은 과학과 일상에서 쓰는 기술들은, 애초에 소설에서 비롯된 것이 많습니다.

 처음 소설에서 등장한 '인공 장기'는 그 당시 사람들 중 몇몇은 과도한 상상력이라며 비웃었겠지만, 지금 현실이 되었습니다. 아폴로 달 착륙 몇 해 전에 나온 레이 브래드버리의 <시작의 끝>이라는 단편에는 달 착륙을 위해 셔틀에 탑승하는 사람의 묘사가 나옵니다. 우주를 여행할 수 있다는 명제도 SF소설에서 비롯되었고, 우주여행을 위해 수많은 과학적 연구와 발명이 쏟아졌는데 '네비게이션'은 대표적인 우주 연구의 성과 중 하나입니다. '로봇 공학'이라는 말은 지금 널리 통용되지만, 아이작 아시모프가 널리 퍼뜨린 말입니다. 아시모프가 아니었다면, 현대 자동차 공장에서 줄지어 자동차를 조립하는 로봇들은 그 자리에 없을 거라는 얘기도 있습니다. '안드로이드'라는 말도 필립 딕의 소설에서 언급되었습니다.

 과학과 기술은 소설의 상상력에 기대어 발달해왔습니다. 물론 과학과 문학은 상상력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했습니다. 소설에서 처음 등장한 과학적 상상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 직접 활용되고 있습니다. 아주, '실용적'으로 말입니다.

 소설의 실용성이 과학 분야에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린 헌트는 <인권의 발명>이라는 책에서, 현대적인 '인권' 개념의 탄생은 소설의 시작과 맞물려 있다는 요지의 주장을 합니다. 인권 개념이 탄생한 18세기엔, 권리의 평등이 자명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권 개념의 정립은 사람들의 '공감'이라는 감각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죠. 그 공감의 감각은 현대적 개념의 '소설'이 탄생하면서 사람들에게 뿌리내렸다는 말입니다. <인권의 발명> 책의 첫 챕터의 소제목은 이것입니다. '소설을 읽고 평등을 상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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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독서는 새로운 개인적 경험(공감)을 창출했고 그것은 다시 새로운 사회적-정치적 관념(인권)을 낳았다.”
-린 헌트, <인권의 발명>


 우리가 누려온 '인권'. 나와 다른 인간들과의 공존을 위해 커다란 축으로 기능하는 그 인권의 개념만큼 실용적인 것이 또 있을까요.

 소설은 인권뿐만 아니고, 역사의 선봉에 서서 수많은 사회적 통념을 깨부수어 왔습니다. 그런 점에서 소설은 지극히 '이데올로기'적인 면도 갖고 있지만, 그것이 품은 새로운 주제가 사회를 흔들고 변혁의 밑거름이 될 때는 지극히 '실용적'인 것이 되어 온 것입니다.

 소설이 인간의 ‘공감능력’을 발현시키는데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건, 18세기만의 일은 아닙니다. 지금도 픽션은 그 일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역사 속에서, 우리의 삶 속에서 소설은 다분히 '실용적'입니다. 그 실용성은 자기계발서나 직접적인 기술을 전하는 책보다 더 오래, 더 큰 파급력으로, 때로는 그것이 소설에서 비롯되었는지 모르게 은밀히 발현되어 온 것입니다.

 여기까지입니다. 끝끝내 냄비 받침 얘기를 꺼내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면 선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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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새로운 시각에서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게 해주는 역할도 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중학생 시절에 읽었던 베르나르베르베르의 개미나 대학시절 읽어본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같은 책들이 주는 감동이나 충격은 상당했던 기억이 납니다~ 소설은 실용적이다에 동의!!! ㅋ 가즈앗!!!

새로운 시각을 주는 것. 더 말할 것도 없죠! ㅎㅎ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과 충격을 주어 새로운 시각을 갖고 새로운 일을 하도록 만들기도 하네요. 인간의 행동을 바꾼다는 점에서도 실용적이라 할 수 있네요. ^^

단순히 판타지소설이나 무협지를 많이 읽는것만으로도 언어영역 향상에 도움이 되는 것을 제 청춘 시절의 경험을 통해 증명할 수 있습니다. 한 때, 고등학생 시절 통틀어 판타지소설만 1천권 이상 읽어본 입장에서 그리고 비슷한 경험을 했던 주변의 또래친구들이 대체로 그랬었거든요.

소설의 실용성을 몸소 체험하셨군요! ㅎㅎ 언어영역 향상이라니! 학생에게 이것만큼 실용적인 면이 어디 있겠습니까. 판타지 소설만 1천권~~ 대단하시네요. 그 1천권이 분명 큰 재산으로 남아 있을 것 같습니다. ^^

수없이 많은 다양한 인물들을 만나고 경험하고 동화되어 보는 것 만으로도 인생의 많은 것을 경험할 스 있다고 생각해요^^

여러 인생을 경험할 수 있는 것! 이것 역시 소설이 무척 실용적이라는 근거가 되겠네요! ㅎㅎ

어떤 관점을 가지느냐에 따라서 소설은 실용적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소설이 실용적이냐고 묻는 질문이 좀 이상한 것 같습니다. 소설의 아이덴티티는 실용 보다는 확장에 가까운 것 같아요.

네 실용성이라는 것은 소설의 1차적 본질과 지향은 아니죠.ㅎ 소설의 본질이 확장성이나 상상력의 발현이라 하더라도, '실용성'을 갖지 못한 것은 아니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거죠. 예를 들어, 전교 1등을 하는 학생이 공부를 잘 한다고, 운동을 못하는 건 아니라는 뜻이죠. 운동도 잘하는 근거를 말한 정도라 여기시면 됩니다.^^

예. 그건 그렇습니다. 상상력을 잘 활용하는 사람에게나 실용적인 것이죠. 사실 그렇게 따지면 실용적으로 쓰는 사람은 10%도 안 될듯.

이 글에선 실용적으로 쓰는 대상을, '인류'로 두고 있습니다. 개인으로 좁혀지면 실용적으로 느끼는 지점은 다 다를 거라 생각합니다.^^

스케일 크네요. 멋집니다. ㅎㅎㅎ

ㅋㅋㅋ

소설이 인간의 상상력을 글로 표현하는 도구의 일종이라 인류에게 창의력이나 간접경험, 체험등으로 도움을 주는 '실용적'인 측면은 크다고 생각합니다.ㅎㅎ 디자인이나 아트도 마찬가지겠죠?^^

창의력, 간접경험.. 그 어느 것이나 '실용'으로 연결되겠네요. 정말 실용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예술도, 누군가의 창의력을 자극한다면 그이에겐 실용적일테구요.^^

저 같은 경우는 왜 실용적이어야 하는가를 되물을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은 실용적이어야 하는 이유를 알고 있을테고, 뭐가 실용적인 것인지 알고 있을테니, 그렇다면 인간의 삶의 의미를 알고 있을테고, 그렇다면 알베르 카뮈가 부러워할 대철학자이기 때문에 한 수 가르침 받고 싶습니다.

왜 실용적이어야 하는가.ㅎㅎ 그것이 본질적인 물음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미스터 선샤인에서, 변요한이 하던 말이 생각납니다.
"난 이 세상의 무용한 것들을 좋아하오." 실용적인 것만이 가치 있는 건 아니죠.^^

음... 제가 예전에 썼던 글이 있는데요, 소설은 실용적입니다. 그 이유는 시대가 변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인공지능 시대에 오면서 인간은 창의적인 일 외엔 어떠한 노동도 하지 않게 됩니다. 그렇다면 창의적인 인간은 어떻게 만들어질까요. 그것은 상상력입니다. 상상하는 능력. 뇌를 상상하는 뇌, 창의적인 뇌로 만들어주는 가장 탁월한 도구는 책입니다. 책 중에서도 소설이죠. 생각하는 습관을 만들고 생각하는 훈련을 하게 하고 생각하는 뇌로 만들어주어 결국 창의적인 뇌가 됩니다. 이는 제가 1000권 정도 책을 읽으며 깨닫고 체험한 것입니다. 가령, '탁자 위에 꽃병이 놓여 있었다.'라는 문장이 있다면 아마 지금 탁자와 꽃병을 상상하셨을 겁니다. 상상하신 탁자는 동그란 탁자일 수도 있고 네모난 탁자일 수도 있고 2인용 탁자일 수도 있고 4인용 탁자일 수도 있습니다. 탁자엔 예쁜 천이 깔려 있을 수도 있고 나무로 만든 탁자일 수도 있으며 철제 탁자일 수도 있습니다. 꽃병은 네모난 꽃병일 수도 있고 동그란 꽃병일 수도 있으며 주둥이가 좁은 꽃병일 수도 있고 주둥이가 넓은 꽃병일 수도 있습니다. 꽃병엔 노란 꽃이 담겨 있을 수도 있고 빨간 꽃이 한 송이 또는 두세 송이가 담겨 있을 수도 있지요. 이것이 바로 상상입니다. 단순한 한 문장이지만 그 한 문장은 사람을 상상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영화는 다르죠. 영화는 그냥 동그란 탁자에 주둥이가 좁은 동그란 꽃병에 장미 한 송이만 담아놓으면 끝입니다. 상상할 필요가 없지요. 소설을 꾸준히 읽으면 상상하는 능력이 키워지고 발전됩니다. 그 능력은 창의적인 인간이 되게 해주고 결국 창의적인 인재, 인공지능 시대에 맞는 실용적인 인간이 되게 해줍니다. 이것이 바로 소설의 실용성이라고 생각합니다. ^^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

인간은 창의적인 일 외엔 어떠한 노동도 하지 않게 됩니다. 그렇다면 창의적인 인간은 어떻게 만들어질까요. 그것은 상상력입니다. 상상하는 능력. 뇌를 상상하는 뇌, 창의적인 뇌로 만들어주는 가장 탁월한 도구는 책입니다. 책 중에서도 소설이죠

소설의 효용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주는 말씀이네요. ^^ 미래 사회에, 우리가 현재 실용적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일들이나 기술들이 AI나 로봇의 몫으로 넘어가고, 결국 우리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들- 상상하는 일-에 집중하게 될 거라는 말씀이죠.

그런 측면에서 차후, 상상력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실용적인 일이 될 것이고. 그 상상력을 자라게 하는 것이 책과 소설이니, 소설은 미래로 갈 수록 더욱 실용적인 가치가 커지게 될 거라는 말.
네, 앞으로의 세계는 지금보다 훨씬 인간의 상상과 마음이 할 수 있는 일이 중요해질 거라는 시각에 동의합니다.

미래까지 가지 않더라도, 인공지능 시대가 아니라도 이미 소설은 실용성을 확보했지요. 나아님 말씀 들으니, 그 실용성이 미래엔 더욱 확대될 거라는 기대감이 듭니다.ㅎㅎ
정성스럽고 좋은 의견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

현대 사회는 과도하게 실용성을 추구한다는 생각도 듭니다. 좀 덜 실용적이라도 괜찮은데 말입니다..

맞아요. 실용적이지 않아도 가치 있는 게 얼마든지 많은데 말이죠. 실용성을 최우선의 가치로 두는 것은 얼마나 메마른 일일까요.ㅎ

t3ran13님이 kyslmate님을 멘션하셨습니당.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연결되용~ ^^
t3ran13님의 [The Alternative Steem TOPs, 10.10.2018 GMT] Top Of The Pop

...>79.017 [글쓰기에 대한 글쓰기] 소설은 얼마나 실용적일까
kyslmate &...

굿잡.ㅎ

이글을 서로 누가 잘 났네 싸우고 있을 문과생과 이과생들이 봐야 할 것 같아요. ㅎㅎㅎ

싸우고 있던 문과생과 이과생이 화해한다는 그런 글 말입니꺄~ㅎㅎㅎ

소설은 다른 삶의 모습을 시뮬레이션으로 보여주잖아요.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경험한 듯이. 충분히 실용적이죠. :)

가상 현실의 원조라고 할 수 있겠네요. 여러 실용성은 거기에서 가지쳐서 나온다고 해도 무방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