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비, 계속 올까요(3rd)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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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북카페에서 여자와 마주 앉은 건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한창 이곳에 드나들 때 두 번 이 커플석에 앉은 적이 있다. 내가 마주 보고 앉았던 상대는 소개 받은 여자들이었다. 취업 준비를 하던 기간에도 먼저 취업에 성공한 동기들에게 간간이 연락이 와서는 여자를 소개시켜 주겠다고 했다. 내 하루가 자유와 찌듦의 묘한 부조화로 가득 채워질 때였으므로 난 마다하지 않고 기분 전환을 위해 여자들을 소개 받았다.

 대부분의 여자들을 맛집이나 분위기 좋은 음식점에서 만났다. 그런 곳에서 만나는 여자들은 다들 비슷비슷했다. 나 역시 모든 여자들에게 비슷비슷하게 굴었던 것 같다. 음식이 나오기 전엔 음식 맛에 대한 기대나 블로그 추천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늘어놓고, 음식을 먹을 때는 그 음식의 본고장에 대한 이야기를 하거나 해외에 여행을 다녀온 이야기를 했다. 음식을 다 먹고 나서는 이 음식점과 비슷하지만 다른 매력을 가진 유사 음식점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맛 칼럼니스트도 아닌데, 만나서부터 식당을 나서는 순간까지 음식 이야기만 90%이상 했다.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 나의 대화 특성도 한 몫 했겠지만, 서로에 대한 진지한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 정확한 진단일 것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가 닿으려는 노력 없이 둘 사이에 음식에 대한 이야기만 잔뜩 끼워 넣곤 했다. 우리의 존재는 겉도는 얘기들이 토핑된 샌드위치 같았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소개받았던 두 사람 중 첫 번째 여자를 만나기 위해 장소를 정하는데, 이 북카페가 생각났던 것이다. 평범한 오므라이스만 파는 곳. 서가와 독서가와 작업가들의 곁에서 밥을 먹을 수 있는 곳 말이다. 식사시간은 점심, 저녁 각 1시간씩 정해져 있었다. 그 시간엔 암묵적으로 대화나 소음 발생이 허용되었다. 음식과 맛으로 둘러싸인 곳보다, 서로의 본질에 조금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평범한 오므라이스를 칭찬할 수는 없을 것이고, 그렇다고 아는 사람만 아는 이곳은 유명한 추천사도 기대할 수 없다. 이곳에서 만난 남녀는 서로에게 집중하든지, 책에 집중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둘 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누군가는 내 생각이 이기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순전히 자기만 생각한 선택이라고. 뭐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여자들을 만나 본 결과, 이곳에 잘 녹아드는 여자는 나와 잘 맞는 사람일 거라는 이상한 확신 하나는 가질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마지막으로 이곳에서 소개팅을 했던 두 여자는 나와 맞지 않았다. 두 여자는 서로 입을 맞추고 나오기라도 한 듯, 오므라이스에 대한 악평부터 이야기했다. 놀랍도록 신기했다. 평범한 오므라이스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것이 없을 거라 자신했는데, 내 착각이었다. 그들은 오므라이스를 발가벗겨 비난하는데 놀라운 명석함을 보여주었다. 밥 알갱이의 상태 같은 내적인 부분부터, 가성비가 떨어지는 가격에 대한 분석까지 오므라이스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북카페의 오므라이스, A부터 Z까지!」 같은 제목으로 책 한 권을 쓸 수 있을 정도였다. 그녀들의 해박함에 놀라고 음식에 대한 방대한 지식과 비판 정신에 질려버렸다. 그 두 번의 만남도 실패로 끝났다. 나와 여자들 사이엔 평범한 오므라이스가 방대한 이야기를 뽐내며 자리 잡았던 것이다. 우린 서로의 본질은커녕, 다른 맛집에서 늘상 하던 여행 이야기도 하지 못하고 헤어졌다.

 마지막으로 소개 받았던 여자는 자리를 옮겨 차를 마시길 바라는 눈치여서, 가느다란 희망을 가지고 찻집으로 장소를 이동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로스팅과 커피콩에 대한 이야기를 1시간 동안이나 진지하게 하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헤어질 때 여자의 얼굴은 아름다움과 자기 만족감으로 빛이 났다. 그녀는 그 날 밤 집으로 돌아가서 아마도 자신의 기호를 가장 잘 이해하는 남자를 만나는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SNS에 올렸을 것이다. 물론 화자는 1인칭이 아닌 3인칭이었을 테고.

 그녀를 이곳으로 부른 것은, 내가 막 이곳에서 예전의 행복감을 느끼기 시작했던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내 느낌이 믿을 만한지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내 하루를 어제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 만들어준 그녀에 대한 느낌이 내 상상으로 만든 허상인지, 아니면 진정 마음의 손을 꺼내들어 악수할 수 있는 대상인지를 알아보고 싶은 위험한 도박. ‘도박’이라고 말한 것은, 그녀가 내 상상과 근접한 여자라도, 평범한 오므라이스를 내놓는 남자의 센스에 실망하여 내 손을 거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식기 전에 드세요. 케첩은 원하시는 만큼 뿌려 드시고요.” 아르바이트생이 오므라이스를 내왔다. 아르바이트생이 떠나자마자 그녀가 꺼낸 이야기는 내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사람은 믿는 만큼 생각하기 마련이라는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녀는 숟가락을 집어 들면서도 오므라이스 얘긴 하지 않았다. “오늘 만난 클라이언트가 한 얘기예요. 저의 브리핑을 듣고 나서 그 회사의 상무라는 여자가 제게 그런 얘길 했어요. 사람은 믿는 만큼 생각하기 마련인데, 당신네 회사는 우리 회사에 대한 믿음이 그 정도 밖에 안 되냐. 솔직히 전 그 말도 정확히 잘 모르겠고, 우리 회사의 광고에 어떤 믿음이 부족한 건지도 이해가 안 갔어요.”

 “저도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군요.” 난 오므라이스를 한 숟갈 뜨면서 대답했다.
 “아, 죄송해요. 이런 자리에서 별로 안 좋은 얘기를 했네요. 근데 솔직히 지금 제 머릿속에는 아까 상황만 맴돌고 있어요. 이럴 거면, 다음에 뵙자고 했어야 하는데. 실례가 아닌지 모르겠어요.”
 “전 괜찮아요. 사실 상무가 했다는 얘길 들으니 무척 흥미로워지던 참이에요.”
 “아,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안심이 돼요. 제가 좀 소심해서 무슨 얘길 해놓고도 눈치를 보거든요.”
 “오호, 저와 비슷한 면이 있네요. ‘소심’과 ‘눈치’라면 저도 어디 가서 빠지지 않죠.”
 “아, 죄송한데 이건 꼭 들어주셔야 해요. 아까 그 상무 얘기요. 자꾸 머릿속에 맴돌아서 끄집어내야 할 거 같아요. 괜찮을까요?”
 “아이고,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평범한 오므라이스 얘기만 아니라면 어떤 얘기든 괜찮습니다.”

 그녀는 내 시험을 가뿐히 통과했다. 그녀는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는 이야기를 숨겨두고, 다른 얘기를 하지 못했다. 우리가 만난 과정이 묘하긴 했지만, 어쨌건 첫 만남이었다. 의례적인 얘기가 오갈 법 하고, 자신의 감정을 적당히 숨겨가며 내게 미소 띤 모습만 보여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선택은 달랐다. 우리 사이엔 다른 어떤 것도 끼어들지 않았다. 그녀와 나 사이엔, ‘그녀와 나’ 뿐이었다. 그녀는 오늘 겪은 일에 대해 그녀가 느낀 감정을 고스란히 내게 털어놓았다. 이런 감정을 느끼는 자신이 이상한지를 중간 중간 물어가면서. 난 하마터면, 그녀에게 큰 실례를 할 뻔 했다.

 “맞아요. 당신은 이상해요. 최악의 오므라이스를 앞에 두고 오므라이스 얘기를 하지 않다니요. 아침에 만난 나에게도 당신을 그대로 보여주는 게 이상해서 견딜 수가 없군요.” 그녀가 자신이 이상한지를 물을 때마다, 이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가까스로 다시 삼켰다.

 “그 상무는 결국 우리 과장님을 향해 물 컵을 던졌어요. 저와 과장님은 어찌할 바를 몰랐어요. 전 눈물이 나려는 걸 겨우 참았지요. 과장님도 무척 당황하셨을 텐데, 과장님은 그 상황에서도 아주 침착하게 행동하셨어요. 저를 먼저 그 자리에서 내 보내셨지요. 브리핑을 마치고 어정쩡하게 서 있는 제게 과장님 차에 가서 ‘그 서류’를 갖고 오라고 말씀하셨어요. ‘그 서류’가 무엇인지 저도 몰랐지만 과장님이 저를 그곳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의도라는 건 알아차릴 수 있었지요. 전 조용히 나와서 과장님 차에 앉아서 조금 울었어요. 한 십분 정도 지나자 과장님이 나오셨어요. 과장님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고, 저만큼이나 충격에 쌓였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하지만, 과장님은 제게 말했어요. 미현씨가 걱정할 건 없어요. 미현씨 브리핑은 좋았어요. 이 문제는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요. 미현씨는 오늘 브리핑하느라 수고했으니, 바로 퇴근하고 좀 쉬도록 해요.”
 “과장님이 훌륭하시네요.”
 난 그 대답을 하면서도 그녀에 대해 생각했다. 자신의 슬픔과 연약함을 이토록 담담하게 드러낼 수 있는 여자라니. 그것도 처음 만난 남자 앞에서.
 “아, 제가 얘기를 너무 많이 했네요. 근데 여긴 좀 독특하네요. 자주 오시는 곳인가 봐요?”

 그녀는 내가 이곳에 대해 떠들어댈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화제를 전환해주었다. 난 예전부터 이곳에 왔었다는 얘기를 했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쓴 소설 이야기도 했다. 그녀가 소설의 내용에 대해서 무척 궁금해 했기 때문에, 기억나는 대로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소설 이야기도 했다. 이로써, 그녀는 그 소설의 네 번째 독자가 된 셈이다. 내가 앞에선 밝히지 않았지만, 내 소설의 첫 번째 독자는 항상 나 자신이므로, 그 소설을 읽은 다른 사람은 정확히 말하자면 3명이다.

 우린 식사 시간으로 정해진 1시간을 훌쩍 넘기고, 오므라이스가 우리 테이블에서 치워진 이후에도 계속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문득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그녀에게 밖으로 나가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그녀가 말했다.

 “오늘 제 얘기를 너무 많이 들어주셨네요. 이 밥값은 제가 낼게요.”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오늘 아침에 제가 미현씨에게 책임질 일을 했다는 거 잊으셨어요?”
 사자가 장식된 문을 열고 나오면서, 미현은 내 등 뒤에 대고 이야기했다.
 “어쩜 좋아. 아까 울고 나서 화장도 못 고쳤는데!”
 난 사람에게 ‘투명한’ 이라는 형용사를 붙일 수 있다면, 그 형용사는 그녀의 차지일 거라고 생각했다.
 “화장 하신 거 아니에요? 전 전혀 모르겠는데…”

 우린 비가 그치고 햇살이 비치는 거리로 나왔다.


To be continue. 4편(last)에 계속.


P.S.

 3편으로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조금 길어집니다. 다음 편으로 마무리 지으려고 합니다.
전 우리 둘째 돌상 차리러 갑니다. 화창한 토요일,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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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고 갑니다.
팔로우도 했습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저도 팔로우합니다. 자주 뵈어요.^^

여주는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성격을 가진듯 하군요 ..남주의 마음속에 불이 붙는 것이 보입니다. 눈에서 꿀이 떨어지는 모습도 ..

남주인공의 마음이 보이나요.ㅎ 잘 어울리는 것 같지요~^^

시리즈였군요! 쏠메님 돌상 차리러 가신 사이 첫 편부터 읽으러 가야겠어요. 쏠메 쥬니어 2 처음 맞는 생일을 축하한다고 꼭 전해주셔요 :)

스프링필드님~~ 드뎌 명성도 60이 되셨네요!^^ 축하드려요ㅎ 우리 둘째는 축하 받고 사진 많이 찍히고 곤히 자고 있답니다.

상큼한 그녀 흥미롭네요

ㅎ 상큼함이 느껴진다니 다행이네요^^

둘째 돌잔치는 잘 하셨나요? ㅎㅎ 화장 한거 아니었나요? 저는 전혀 몰랐어요. 남자들의ㅜ멘트란 ㅎㅎ 4편 기다릴께요. 재미있네요^^

가족끼리 모여서 돌상 차려놓고 포토타임 갖는 걸로 간단히 끝냈지요.ㅎㅎ 저 멘트 너무 저렴한가요? ㅋㅋㅋ 재밌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엊그제 아이 재우다 잠들어서 새벽에 깨서 마지막편 써내려갔네요. 이제 한 문단 남겨두고 있습니다. ㅎ

“화장 하신 거 아니에요? 전 전혀 모르겠는데…”

이분도 선수군요 ㅋㅋㅋㅋ 아! 달달한 예고 좋아요!

이거 선수급 멘트인가요?ㅎㅎ 그렇다면 전 국가대표? ㅋㅋ
끝까지 달달할지 지켜봅시다.^^

두 사람의 앞날에도 햇살이 비치는 듯하네요! 미현씨는 주인공의 시험도 통과했구요 ㅎㅎ

주인공이 미현씨의 시험에 낙방할지도 모르지요.ㅋㅋ 인생은 알 수 없는 거니까요.ㅎ

늦게와서...한번에 마지막까지 볼수있네요^^헤헷~

소설은 한 번에 보는 게 제대로죠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