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만장한 대한민국 헌법 개정의 역사 간략하게 훑어보기 (1)

in #kr7 years ago



  안녕하세요, 지난 글에서는 대한민국 헌법의 아이디어를 제공한 두 인물, 조소앙과 유진오에 관해 이야기해보았습니다. 오늘은 이미 예고한대로 제헌 헌법 이후, 아홉 차례에 걸친 헌법 개정을 통해서 현행 헌법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간략하게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글이 좀 길어져서 세 차례 정도 나눠서 올려볼까 합니당.

 헌법 개정의 역사와 관련된 글들은 기본적으로 제가 2년 전에 냈던 졸저 [날치기 국회사]의 내용을 극도로 축소한 것입니다. 글을 읽으시면서 더 자세한 내용, 재미있는 일화들이 궁금하신 분들은 [날치기 국회사]를 찾아 읽어보시길 권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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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단 제헌헌법의 제정 과정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비화부터 시작해볼까요?

 제헌 헌법 초안을 기초한 유진오의 경우 사실 내각제를 강하게 주장한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당연히 헌법 초안 역시 본래는 내각제에 기반해서 쓰여졌다고 하는데요, 잘 알려졌듯이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인사들이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제헌국회 참여를 보이콧하면서 당시 거의 유일한 정부 지도자 후보였던 이승만은 "내각제 헌법이 통과된다면 자신은 공직에 취임하지 않고 민간에 남겠다"고 선언하며 강력하게 대통령 중심제를 채택할 것을 주장했다고 합니다. 이승만의 이러한 협박에, 당시 제헌국회를 주도하던 한민당은 국무총리와 일부 내각 인사를 한민당 사람들로 채워줄 것을 조건으로 대통령중심제를 승인했구요.

 이렇게, 이승만 개인의 요구로 대통령중심제가 채택되었다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듯히 헌법 제정 과정은 공식적인 토론보다는 비공식적인 타협이나 압력, 협박에 의해 굴러가는 일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특히 당시 상당 수를 차지했던 무소속 소장파 의원들의 경우 이승만과 한민당이 주도하는 헌법 제정 과정에서 밀려나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고 하구요. 이러한 무소속 의원들의 불만이 얼마나 강했는지, 따로 입후보 절차 없이 진행되었던 제헌국회의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은 이승만, 부통령은 이시영이 당선될 것이 뻔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국회를 보이콧했던 김구가  대통령 선거에서 6%를, 부통령 선거에서 33%를 득표했습니다. 김구가 후보로 나서지도 않았는데 이정도 표를 얻었다는건, 역으로 이승만과 한민당 중심의 제헌국회에 대한 반란표가 적지 않았다는 의미죠.

 유진오의 회고록을 보면, 제헌 헌법이 통과되는 역사적인 순간에 대한 재미있는 비화가 적혀 있습니다. 그대로 인용해보자면... 


 "의장(이승만)이 '가케 여기면(찬성한다면) 기립하시오'라 선언했을 때 국회의원들은 모두 우르르 일어섰다. 그 순간이다. 나는 의원석 중간쯤에 자리 잡은 한 의원이 기립하지 않고 자리에 앉은 채 고개를 똑바로 들고 앞쪽을 응시하고 있는 광경을 내 눈으로 보았다. 이문원 의원이었다. 그런데 그 광경을 의장은 보았는지 못 보았는지 '한 분도 빠짐이 없으니까 전체가 통과된 것입니다'하고 방망이를 딱딱 두드렸다."


...그러니까 제헌 헌법이 통과될 때, 실제로는 의원 한 사람이 찬성하지 않는다는 의사 표시로 기립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이 그냥 만장일치 통과! 를 외쳤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일어서지 않았던 의원은 무소속 의원으로, 헌법 제정 과정에 이승만을 비롯한 일부의 의사가 너무 강하게 반영되었다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헌법 제정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도 했던 이문원입니다. 이문원은 훗날 이승만 정권의 '국회 프락치 사건'에 연루, 구속되기도 하는, 이승만과 악연이 있는 인물입니다.

 한 나라의 기초를 세우는 헌법 제정 과정에서부터, 뭔가 심상치 않습니다. 이승만의 독주가 무시무시한데요, 이러한 독주는 결국 이후 첫 개헌인 '발췌개헌'과 두번째 개헌인 '사사오입 개헌'으로 이어집니다. 

 

 한국 헌정사 상 최초의 개헌인 '발췌개헌'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에 거행되었습니다. 당시 전쟁 통에 국회가 임시수도인 부산에 있었는데요, 이승만 정권은 공비 토벌을 명목으로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부산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합니다. 당시 국회에서 야당을 중심으로 이승만을 견제하기 위한 내각제 개헌안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처럼 반 이승만 여론이 점차 세력을 확대하자 이승만은 지금까지처럼 국회에서 간접 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하면 자신에게 불리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죠. 이승만은 경찰을 동원하여 의원들을 체포해서 강제로 임시국회 의사당에 호송하는 한편, 일단 의원들을 국회에 집어넣은 다음 군대를 동원해서 국회의원들이 빠져나올 수 없게 틀어 막았습니다. 억지로 의원들을 끌어 앉혀놓고, 국회가 준비한 내각제 개헌안에서 일부를, 자신이 준비한 직선제 개헌안에서 일부를 짜깁기해서 개헌안을 내밀었습니다. 이렇게 여기서 일부, 저기서 일부를 '발췌'해서 짜깁기 했다고 해서 바로 '발췌 개헌'이라는 별명이 붙은거죠. 

 총칼로 가둬놓고 개헌을 하라는데 별 수 없지요. 결국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한 개헌안이 통과되는데요, 당시 전쟁 분위기 속에서 행정부를 장악했던 이승만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 여론이 강했기 때문에 직선제 하에서 이승만의 당선은 따놓은 당상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1952년 8월, 직선제로 치뤄진 2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은 다시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결국 자기가 다시 대통령 하려고 개헌을 했던 것인데...

 


전주 이씨 였던 이승만은 미국에서도 '프린스 리'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했다고 하죠. 정말 스스로를 킹갓더제너럴엠퍼러로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짤에서 뭔가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면 기분 탓입니다(...)



 1954년,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에 한한 중임 제한 철폐', '국민투표제 신설', '경제 조항의 자유주의 경제화' 등을 골자로 한 개헌안을 다시 내놓습니다. 한마디로, 자신은 한번 더 대통령 해먹고 싶고, 자꾸 국회가 딴지 거니까 국민들을 동원해서 국민투표로 국회를 압박하고, 제헌 헌법이 너무 진보적이니까 바꾸겠다 뭐 이런 얘기죠. 

 이승만과 여당인 자유당은 이 개헌안을 통과시키기 위해서 치밀한 작전을 펼치는데, 이미 자유당 의원만으로도 개헌 정족수를 넘기고 있었습니다만 자유당 내 반란표를 솎아내기 위해서 기발한 아이디어를 동원합니다. 바로 '암호 투표'를 지시한 것인데요-_-;;

 당시 국회 투표 용지에는 한자로 可(가), 否(부)가 인쇄되어 있었습니다. 개헌안에 찬성하면 否에 X 표를 치고, 개헌안에 반대하면 可에 X 표시를 해서 투표하는 방식입니다. 오늘날에는 찬성하는 쪽에 O표를 치는게 일반적인데, 그때는 좀 달랐나봐요. 투표는 비밀투표로 이뤄졌습니다만, 자유당은 의원들 지역구별로 만년필 잉크 색을 다르게 지정한다거나, X 표시의 방법을 하나 하나 지정하는 방식으로 사실 상 기명 투표에 가깝도록 소속 의원들에게 지시를 내립니다. 개표를 감시하는 자유당 감표위원이 표를 하나하나 다 체크하게 되어있으니, 개헌안에 대해 반란표를 던질 생각을 하지 말라는 엄포를 놓은 셈이죠. 

 그런데, 이 암호 투표 계획이 사전에 누설됩니다! 표결 직전, 무소속 의원이 이 계획을 까발리면서 자유당이 망신을 당하는데요, 비밀투표를 보장하지 않는 개헌안 투표를 보이콧하겠다는 야당 의원들을 달래느라고 향후 개표함을 봉인하기로 하면서 이변이 시작됩니다.

 당시 국회의 재적 의원은 203명. 이중 개헌 정족수인 2/3는 136명이었습니다. 그런데 개표를 해보니, 개헌 찬성표는 135표에 불과했습니다. 단 한 표 차이로 개헌안이 부결된 것이죠. 국회엔 난리가 났고, 야당 의원들은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그날 밤, 국회의장이었던 이기붕과 부의장인 최순주가 경무대(당시의 청와대)에서 이승만을 만나 개헌이 부결되었다고 보고합니다. 그런데 묵묵히 듣고 있던 이승만이 135표면 부결이 아니라 통과된거 아니냐고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203명의 2/3이면 135.333 아니냐, 그럼 135명이면 된거 아니냐는 희대의 논리를 펼친 것입니다.

 이승만이 이렇게 말하자, 자유당 의원들도 따라야죠 뭐 별 수 있습니까. 사사오입(반올림)을 하면 135.333은 135다. 그러니까 개헌안은 통과된거다 뭐 이런 주장을 합니다. 국회부의장인 최순주는 개정안 부결은 취소다, 개헌안은 통과되었다라며 의사봉을 두드리구요. 야당 의원들이 들고 일어나자,  국회 참관 중이던 정치 깡패들이 등장합니다. 이때 정치 깡패들을 이끌던 사람이 바로 [야인시대]로 잘 알려진 정치깡패 이정재입니다. 야당 의원들은 반대 투쟁에 나서지만... 어쨌든 개헌안은 통과되었죠.

 이렇게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서 제한 없이 연임이  가능해진 이승만은 3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대통령에 당선됩니다만... 그 뒤 4대 대통령 선거일이었던 1960년 3월 15일, 이승만의 측근인 이기붕의 부통령 당선을 위해서 노골적인 부정선거를 자행하다가 국민들의 성난 민심에 직면하게 됩니다. 바로 4.19 혁명이 일어난 것이죠. 제멋대로 권력을 휘두르던 이승만을 언제까지 국민들이 지지해주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4.19 혁명 이후, 이승만이 대통령에서 하야 하자 대통령 권한대행이었던 허정을 중심으로 과도정부가 구성됩니다. 대통령 중심제 아래 12년 동안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른 이승만을 겪었던 국회에서는 의원 내각제로 헌법을 개정하기로 합니다.  의원 내각제의 도입 뿐 아니라, 이승만 독재 하에서 많은 침해를 겪었던 기본권과 자유권을 보장했다는 점에서 특징적인 헌법이었습니다. 헌정사 최초로 합법적인 헌법 개정은 4호 헌법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던 셈이죠.

하지만 좀 흑역사가 있다면... 3차 개헌 이후 들어선 장면 정권 아래서 여당인 민주당이 신파와 구파로 나뉘어서 갈등을 빚자, 이승만 구악 척결(오늘 날로 따지자면 적폐 청산이겠죠?)을 강하게 주장하던 대학생들이 국회의사당을 점거하고 민주당을 비판하면서, 3.15 부정선거와 관련한 반민주행위자와 부정축재자의 처벌을 외칩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헌법적 근거가 없었기 때문에 장면 정권은 부랴부랴 개헌한지 불과 넉달 만에  4차 개헌에 나서서 헌법 부칙에 3.15 부정선거와 관련한 특별법 제정에 관한 내용을 추가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형법 불소급의 원칙을 훼손한 개헌이었다는 비판이 적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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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해서 찾아봤더니 날치기 국회사 전자책 도 있군요 ㅎㅎ

만장일치가 아닌데 만장일치라고 눙치고 지나가는 일이 저때도 있었군요.. 저때부터라고 하기에는 그 전에도 있었을 것 같고..
@홍보해 포인트가 있던가.. 없었던 것으로....

만장일치가 아닌데 만장일치라고 눙치고 지나갔으니 절차의 위법성을 지적해볼 수 있을지도? ㅎㅎ 아주 허술했죠. 일단 8월 15일에 맞춰서 정부 수립을 해야한다는 압박도 강해서 어지간한 건 토론 그만 하고 넘어가는 모양새도 보여줬던 것 같습니다.

역시 무리한 데드라인은 만악의 근본이군요..

X라고 마크하는 건 미국식 같아요. ㅎㅎ

아 미국이 그런 방식으로 표기하는군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