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만장한 대한민국 헌법 개정의 역사 간략하게 훑어보기 (3) - 오늘 날의 헌법이 만들어진 과정

in #kr7 years ago

사실 이전 글들의 내용은 고교 시절 근현대사를 배우신 분들이나, 한국 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정치극화 들을 즐겨 보신 분들이라면 어느 정도 알고 계셨던 내용이라 생각합니다. 발췌 개헌이나 사사오입 개헌, 삼선 개헌, 유신 헌법... 다 유명한 사건들이니까요.

이번에 이야기할 내용은 교과서에 잘 나오지 않는, 혹 나오더라도 상대적으로 최근의 사건이라 수능에 내기에 좀 애매한... 바로 87년 헌법, 현행 헌법의 제정 과정에 대한 비판적 분석입니다. 아, 생각해보니 좀 나이가 있으신 분들이라면 오히려 리얼 타임으로 당시의 사건들을 접해서 더 잘 알고 계실지도 모르겠군요. 아무튼, 가봅니다. 참고로 이 글의 많은 부분은 역사비평 2017년 5월호, 강원택 교수님의 [87년 헌법의 개헌 과정과 시대적 함의]라는 논문을 참고하였습니다.

최근 개봉한 영화 [1987]에서도 잘 나와있듯, 1987년 6월 항쟁은 전두환 정권을 위기에 몰아넣습니다. 호헌 철폐 독재 타도... 당시의 구호죠. 독재 타도야 뭐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구호인데, 그럼 호헌 철폐는 뭐냐? 라고 생각할 (저와 같은) 젊은이들이 있을 줄로 생각합니다.

영화 [1987]에서 보면, 식당에서 밥먹고 있던 하정우(최 검사 역)가 TV를 보다가 짜증을 냅니다. 역시 연세대 동아리 방에서 강동원(이한열 역)과 학생들이 이 뉴스를 듣고 더 열심히 투쟁을 결의하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바로 4.13 호헌 조치가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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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987]에 대해서도 예전에 이미 을 올린 바 있습니당.




1986년, 야당이었던 신민당은 '개헌을 위한 천만인 서명운동'을 벌입니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광범위한 서명 운동을 벌이는데요, 군부 독재에 질려 있던 시민들이 이에 가세하면서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커져 갑니다.

이처럼 개헌에 대한 국민적 열망이 커지자, 국회에서 헌법개정특별위원회가 구성되어 개헌을 논의하기 시작합니다. 다만, 신민당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주장했던 것과 달리 여당인 민정당은 내각제 개헌을 주장합니다. 전두환과 민정당은 내각제 개헌안을 제시하되, 야당이 이를 거부하면 기본 헌법으로 대통령을 선출하고 88올림픽을 치르겠다는 계획이었습니다.

전두환과 민정당이 내각제를 주장했던 것은, 국민들의 여론이 좋지 않으니 일단 개헌을 하되, 당시 선거법 상 제1당이 선거에서 유리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설령 내각제를 채택하더라도 민정당이 계속 집권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국회에서 합의점이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전두환은 1987년 4월 13일 특별 담화문을 발표합니다. 자신의 임기 중에는 결국 개헌을 하지 않겠다(호헌조치), 임기 만료 후 정권을 이양하고 개헌은 올림픽을 치른 다음 후임 대통령의 몫으로 미루겠다...는 것이 담화의 내용이었습니다.

직선제 개헌을 열망하고 있던 시민들이 분노한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호헌 철폐!"라는 구호는 이러한 맥락에서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후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이 터지고, 전국적으로 거리 시위가 확산되면서 민정당의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노태우가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겠다는 6.29 선언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직선제 개헌이 가능해지면서, 당장 개헌안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의 논의가 본격화 됩니다. 이 헌법 논의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당시의 여당인 민정당과 제1야당인 통일민주당 간의 이른바 '8인 정치회담'이었습니다. 이 8인 정치회담에서 이뤄진 합의를 베이스로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에서 헌법 개정안을 마련, 이후 10월 27일 국민투표(현재까지 최후의 국민투표입니다.)로 개헌안이 통과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현행 헌법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8인 정치회담은 비공개로 진행되어서, 어떤 논의가 오갔는지 확인하기 쉽지는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대통령 직선제'야 국민적 요구에 따라 가능했던 것이지만, 다른 개헌의 내용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회담의 내용을 까봐야 알 수 있는거니까요.

일단 '8인 정치회담'의 멤버를 봅시다. 먼저 민정당에서는 권익현, 윤길중, 최영철, 이한동 의원이 참여했고, 통일민주당에서는 이용희, 이중재, 박용만, 김동영이 참여했습니다. 통일민주당에서 참여한 네 명의 의원 중 이용희, 이중재 의원은 김대중 계열, 박용만, 김동영 의원은 김영삼 계열로 알려져 있습니다. 결국 노태우, 김영삼과 김대중이라는 주요 정치 지도자 간의 합의로 인해 개헌안이 마련된 셈이죠.

이 8인 정치회담은 7월 31일에 시작하여, 한달 뒤인 8월 31일에 대체적인 합의를 도출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국회의 헌법개정특별위원회에서 헌법개정안기초소위원회를 구성한 것이 8인 정치회담이 끝난 날인 8월 31일. 소위원회에서 만든 개정안이 보름 후인 9월 17일 개헌특위의 안으로 채택되었고, 이 안에 국회와 국민투표에서 확정되었으니 실질적으로 8인 정치회담이 개헌안을 거의 다 만들었다고 봐도 무리가 없습니다.

당시의 증언을 보면, 어쨌든 직선제 개헌을 한다고 했을 때 구체적으로 대통령제를 어떻게 하느냐가 주요 쟁점이었던 것 같습니다. 기존 7년 단임의 대통령제를 어떻게 바꾸느냐가 문제였다는 것이죠. 민정당은 6년 단임 대통령제를, 통일민주당은 4년 중임 대통령제에 부통령을 두자는 안을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결정된 것은 지금 우리가 잘 알듯 대통령 5년 단임제였죠.

전두환은... 지금 우리가 생각했을 때는 좀 어처구니 없이 보일 수 있지만, 나름 자신이 단임제 대통령으로 임기를 제대로 마치고 정권을 이양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두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승만이나 박정희는 권력 욕심에 장기 집권을 하다가 말년이 좋지 않았지만, 자신은 장기 집권 하지 않고 딱 단임제 대통령으로 마무리하는 좋은 선례를 남긴다는 것이었죠. 자기 뿐 아니라 자신의 후임자 역시 단임으로 해야 한다, 그래야 집권 연장의 욕심 없이 일할 수 있다는 것이 전두환의 일관된 의지였다고 합니다. 노태우는 중임제에 욕심이 있었지만, 전두환의 의지가 강하게 관철된 것이 단임제로 결정나는데 큰 영향력을 끼쳤다고 합니다.

통일민주당의 공식적인 안은 4년 중임제였지만, 김대중, 김영삼 양 김씨의 경우에도 은근히 단임제를 선호했다고 합니다. 양김씨의 각자 출마가 확정적인 상황에서, 혹시 자신이 떨어지게 될 경우 상대방이 8년 동안 대통령을 해서 자신이 대통령이 될 기회를 놓치는게 아닌가 하는 견제 심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결국 각자 자신이 집권 할 수 있는 가능성에 따라서 주판알을 굴렸던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민정당이 얘기한 6년 단임제도 길다, 5년으로 가자, 라는 것이 양김씨의 생각이었고 결국 5년 단임제로 결정이 나버렸습니다.

한편, 통일민주당이 주장한 부통령제를 민정당은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혹시나 단일화가 안되더라도, 양김씨가 각자 대통령, 부통령 후보로 나설 경우 민정당이 대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제로가 된다고 봤던 거죠. 양김씨가 분열해서 각자 후보로 출마할 경우, 노태우에게도 당선될 가능성이 높았고 실제로 역사는 그렇게 흘러갔습니다. 만약 부통령제가 실시되었다면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지... 양김씨 역시 별로 부통령을 하겠다는 의사는 없었고, 출마하면 자신이 당선될 수 있다는 자신감에 가득차 있었기 때문에 부통령제는 없던 것이 되버렸습니다 (...)

그렇다면 대통령제와 관련한 핵심 이슈들은 해결되었다, 다른 조항들은 어떻게 하느냐... 라는 문제가 남았는데요, 이 부분은 의외로 쉽게 해결되었다고 합니다. 기본적으로 제3공화국 헌법, 그러니까 유신 체제 이전의 헌법인 5차 개헌안이 주요한 참조점이 되었던 것이죠.

재밌게도, 5차 개헌안, 그러니까 헌법 6호는 앞선 글에서 살펴보았듯이 박정희가 5.16 쿠데타 이후 군정을 실시하는 과정에 만들어진 헌법이었습니다. 군사 쿠데타 세력이 만든 헌법을 주요하게 참조했다는 것은 어찌되었든 군부 세력의 연장인 민정당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겠죠. 그렇다면 기본적으로 '민주화 세력'인 양김씨는?

사실 김대중과 김영삼 모두, 헌법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기본적으로 헌법을 통해서 공정한 선거 경쟁이 보장되면, 자신이 당선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던 것이죠. 이런 태도는... 사실 이 두분이 헌법과 관련해서는 대통령 되는 것 말고는 별 다른 생각이 없었다는걸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_-;; 특히 71년 대선에서 김대중이 부정선거에도 불구하고 박정희에게 근소하게 패배했던 경험은, 선거 경쟁만 보장되면 할 만하다, 그러니 그 전 헌법으로 돌아가면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을 줬다고 합니다. 따라서 1962년의 6호 헌법이 헌법 개정 논의에 있어서 모범 답안처럼 '8인 정치회담'의 참고점이 되었다고 하구요.

그렇다면 6호 헌법에 없고 87년 헌법에 새로 등장한 조항들은 무엇일까요? 일단 헌법재판소를 신설한다는 것부터 살펴봅시다. 헌법재판소는 4.19 혁명 이후의 개헌인 헌법 제4호에는 존재하다가, 5차 개헌에서 사라진 기관입니다. 원래 '8인 정치회담'에서 헌법재판소를 복원할 생각은 별로 없었다고 합니다. 헌법 재판에 대해서, 위헌법률심사권과 위헌정당해산심판권을 대법원이 가지고, 탄핵 심판은 별도의 비상설기구인 탄핵위원회를 두는 것이 여야 모두의 생각이었다고 합니다.

오히려 쟁점이 되었던건 대법원장과 대법관 선임의 방식을 어떻게 하느냐였습니다. 이전 글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대통령이 대법원장을 임명하고 대법원장이 대법관을 제청하는 1안과, 법관추천회의의 제청에 따라 대법원장과 대법관을 대통령이 임명하는 2안이 경합했다고 합니다. 실제로는 1안에 가까운 방식이 되어서, 오늘 날 개헌 논의에서는 2안과 유사한 방안들이 논의되고 있다고 이전 글에서 쓴 적이 있죠?

그런데, 여기서 등장한게 또 전두환입니다. 8인 정치회담에서 논의되고 있던 헌법 개정안을 살펴보던 전두환이, 법관추천회의를 두는 것에 반대했습니다. 또, 위헌정당해산을 대법원이 해버리면 정치의 영역을 사법이 담당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고 반대 했습니다. 사법부가 정치의 장과 무관해야 한다는 전두환의 신념(?!)에 의해, 민정당은 위헌법률심사, 탄핵심판, 위헌정당해산심판 등을 담당하는 헌법재판소를 신설하는 것으로 입장을 변경했다고 합니다. 2000년대 이후 헌법재판소가 정치적으로 중요한 순간마다 인상적인 활약을 했던 것을 보면... 재밌는 역사의 비화라고 할 수 있겠죠.

9차 헌법 개정에서 새롭게 등장한 조항 중 의미 있는 것들은 최저임금제도의 시행을 들 수 있습니다. 최저임금제가 헌법에 명기 된 것은 노동과 임금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반영된 것으로 보이는데요, 제헌 헌법 이래로 계속해서 헌법에 노동의 권리와 의무에 대해서 규정하고 있었지만 임금과 관련된 내용은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1980년, 8차 개헌에 이르러서야 "국가는 사회적·경제적 방법으로 근로자의 고용의 증진과 적정임금의 보장에 노력"해야한다는 조항이 생겨났습니다. 최저임금제도를 헌법에 명시한 것은 임금에 있어서 국가가 직접 최저한의 수준을 규정함으로서, '적정임금의 보장'을 실체화한, 8차 개헌에서 한발짝 더 진일보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최저임금을 헌법에 명시한 것은, 전두환 정권 하에서 1986년 최저임금법이 공포되고 1987년 시행에 이르던 것과 맞물립니다. 이는 역시 국가가 저임금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인식의 변화 수준을 반영하던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1987년의 9차 개헌은 그동안 30년 동안 상대적으로 안정적으로 작동한 헌법을 만들어냈다는 것에 의의가 있습니다만, 앞서 살펴봤던 것처럼 기본적으로 정치 엘리트 간의 담합에 의해 그 내용이 결정되었다는 한계가 분명합니다. '8인 정치회담'의 실질적 주역이었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이 이후 차례 차례 대통령이 되었다는 점에서, 87년 헌법은 결국 이들에게 유리한 권력구조의 합의 과정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세 개의 글을 통해 한국 헌정사의 개헌 과정들에 대해 죽 살펴보면, 대부분의 개헌이 대통령 선거라는 권력을 목전에 두고 벌어진 정치적 행위의 산물이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개헌 논의가 상당히 중요한 것은, 당장 대선이라는 이벤트를 염두에 두지 않고, 여러 부분에서 헌법에 대해서 논의할 수 있는 시기라는 점이니다.

헌법의 개정은 무엇보다도 헌법제정권자이며 개정권자인 국민이 그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정말로 민주적 개헌이라고 한다면, 개헌에 대한 논의가 국민들로부터 상향적으로 공론화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무리 실질적인 개헌을 이뤄내기 위해서 라지만 개헌 일정을 6월 지방선거로 못박는 것은, 여러모로 우려가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개헌 일정을 정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시민들이 개헌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개헌에 대한 논의 속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일 것인가여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열심히 글을 쓰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요.)

그런 의미에서, 다음 글은 '개헌에 관한 생각들' 시리즈로 돌아가서, 개헌에 있어서 핫 이슈 일 수 밖에 없는 권력 구조와 정부 형태에 관해서 좀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금방 돌아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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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을 보면서도 씁슬했던 것은 .. 결국 양김이 단일화에 실패함으로써 대통령 직선제라는 열망은 이루어냈으나 대통령 선거 결과는 참 ;; 그 이후에도 뒤에 다른 포스팅에서 언급하실 것 같지만 3당 합당등의 일들이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양김은 물론 우리 한국 정치사에서, 한국에서 큰 거목이자 어른들이지만 몇몇 행보를 통해서 그들이 초래한 안타까운 일들도 있는 것은 명과 암으로 봐야할까요 ?

참 욕심들이 크셨던 것 같아요. 저는 개인적으로 단일화가 실패했던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말씀하셨다시피 3당 합당으로 군부독재 세력에게 면죄부를 준 것은 김영삼의 과가 너무 크다고 생각합니다..

헌법의 개정은 무엇보다도 헌법제정권자이며 개정권자인 국민이 그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정말로 민주적 개헌이라고 한다면, 개헌에 대한 논의가 국민들로부터 상향적으로 공론화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너무나 자명한데 어렵네요...

그렇긴 하죠--;; 다음 글에서는 이 상향식 공론화의 방법에 대해서 점 이야기해볼까 합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