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모르는 척 해서 미안해. 너무 아는척 하고 싶으면 모르는 척 하고 싶어져.” -영화 아저씨 대사
태식의 말을 이해하기엔 소미는 너무 어렸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한건 성인 관객들도 마찬가지 였을 것이다. 우리는 소미와 태식의 교감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둘의 감정선을 그려넣기 전에 납치는 시작 됐고 응징은 매우 강렬했기 때문에. 그러니 “아는척 하고 싶으면 모르는 척 하고 싶다”는 이 패러독스를 영화를 통해 해석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이 모순적인 대사를 꽤 오래동안 생각해왔다.
8년 만에 다시 본 아저씨. 나는 이제서야 저 역설을 조금은 깨달은 것 같다. 모든것이 몰락해버린 태식의 유일한 교감자 소미.
일상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남은 유일한 것. 잃어버림의 경험이 있는 사람이 가장 두려운 것은 또 다시 잃는 것이다. 절망속에서 유일한 내 편. 사실 이건 소미가 아저씨에게 느꼈을 감정이기도 하다.
태식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그니까 너무 아는체 하고 싶어서 다가가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뭐라고 해야 할 지 몰라서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서. 선뜻 내놓은 손길에 또 다시 누군가를 잃지 않을까 무서웠을 것이다.
그러나 소미는 그와 반대였다. 자기 편이 없는 세상에서 만난 유일한 내 편. 태식을 잃지 않기 위해 소미는 늘 한 걸음 더 다가가곤 했다. 마치 태식의 조심스러움을 깨는 듯한 발 걸음으로. 그러니 소미에게 아는 척 하고 싶으면 모르는 척 하고 싶어진다는 태식의 대사가 이해가 되었을리가 없다.
사실 정답은 없다. 너무 소중해서 없어지면 안될 것들에 대해 우리는 적극적으로 표현하거나 되려 너무 조심스럽게 행동한다. 그 중간지점을 찾기란 참 쉽지 않다.
잘읽고 갑니다.
예 형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