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in과 Sollen은 독일어로 영어의 be 동사와 shall 동사에 해당한다. 현실과 당위를 대변하는 것으로, 그 사이의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는 의미다.
우리나라 법학은 조선시대까지 상당히 정련된 법체계를 가지고 있었으나 이어지지 못했다. 대신 독일법을 주로 계수(繼受)했다. 일본이 독일법을 계수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우리나라도 독일법을 계수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법학을 공부함에 있어 독일어 단어는 자연스럽게 배우게 된다.
법학이란 규범학이기는 하나, 이상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 세계의 유지를 위한 규범학이기 때문에 현실과 당위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현실에 몰입하면 법이 추구하는 목적을 상실한다. 이에 반해 당위만 추구하면 그것 또한 못할 노릇이다.
고상한 도덕적 국가가 얼마나 반도덕적인지 우리 역사는 반복적으로 그리고 예외 없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세례를 받은 중세 유렵의 십자군 전쟁은 탐욕과 살육으로 점철된 것이었다. 남아메리카를 포함한 많은 나라가 기독교라는 고결한 정신을 바탕으로 원주민을 살해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신에 의해 허락된 행위가 되었다. 북아메리카 원주민을 학살하고 청교도 국가 미국이 건설되었으며, 제주 양민학살사건을 포함하여 일백만명의 민간인이 학살되었을 것으로 추산되는 보도연맹사건은 개신교의 주도로 자행되었다. 이는 특정 종교만의 일은 아니다. 극단적인 당위는 인간을 극단적 괴물로 만든다.
당위란 남과 나를 나누고 가를때 가장 편리한 심리적 편향이 될 수 있다. 당위 반대편에 있는 것은 배척되고 제거되어야하고 척결되어야 한다. 이에 따르는 경우 인간의 뇌는 충분한 보상을 주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 같다. 인류의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보이는 행태를 보면 그렇게 판단하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인다. 스키너의 권위에의 복종 실험결과도 이에 대한 구체적 논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에 반해 현실만을 강조하는 것은 또 어떤가? 경제적 생산성과 효율성을 중시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법학의 합목적성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영국의 마가렛 대처 수상과 미국의 레이건이 추구한 것은 정부의 기업적 효율성이었다.
그리고 현실이란 기존 세력의 유지를 인정해야 한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기존 세력의 유지란 그 세력을 강화하는 것을 그대로 인정해야 함을 의미한다. 현재와 비유하면 양극화가 지속적으로 악화되는 것을 그대로 놔두어야 함을 의미한다.
현실적 접근은 상당한 타당성을 지니나, 그 방향성을 상실할 위험이 있다. 옳은 것이 옳은 것이 아니라, 생산성과 효율성, 경제성만이 옳다는 주장이 될 수 있다. 목적이 아니라 수단만으로 전략과 정책의 판단을 할 위험이 있다는 의미다.
인류는 이 당위와 현실의 사이에서 시계추와 같은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미국의 대외정책이 고립주의와 개입주의의 사이에서 시계추와 같은 패턴을 보여주었듯이, 인류 역사의 패턴에 시계추와 같은 반복은 흔히 볼 수 있다.
종교적 편향에서 세속주의로 그리고 세속주의에서 종교적 편향으로의 인류역사에서 흔한 사례이다. 도덕주의에서 쾌락주의의 왕복 운동은 자연스러운 일일 수도 있다.
이런 단순한 왕복운동을 멈추기 위해서는 일종의 절제와 자제 및 균형이 필요하다. 그러나 절제와 자제와 균형을 유지하는 데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사람들이 선명함에 기울여지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는 자명하다. 절제와 균형은 흔히 회색주의자로 공격을 받는다. 매파와 비둘기파의 경쟁에서 분명한 매파가 쉽게 이기는 것을 생각해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제와 균형 및 절제를 최고의 미덕으로 삼는다. 플라톤의 중용은 치우치지 않음을 의미하며, 자사가 초안을 쓴 중용은 알맞음을 주장한다. 헤르만 헤쎄는 <지와 사랑>에서 이성과 감성의 조화로움을 이야기 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서생의 이상과 상인의 현실 간 조화를 이야기 한다. 클라우스 슈밥은 이상을 견지함에 있어 경제적 현실이 바탕이 되어야 함을 실천했다.
시계추를 놔두면, 세상의 흐름을 그냥 놔두면, 우리의 감정과 생각을 그대로 놔두면, 한 쪽 끝에 이르러야 다시 반대편으로 움직인다. 그 끝에 이르러서야 탄식과 절망이 있음을 알고 비로서 다른 편으로 움직인다.
이러한 순환적 움직임이 태극의 움직임이요 변증법의 행태이다. 시계추의 패턴, 태극의 움직임 그리고 변증법의 움직임으로 인해 우리는 캄캄한 어둠속에서도 빛을 기다릴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빛이 오래지속될 수 있도록, 균형과 절제와 비둘기와 회색과 양보와 절충과 부족함의 만족을 지향할 수 있어야 한다. 비록 우리 인간의 뇌가 극단을 지향하는 경우에 더 많은 도파민을 내뿜는다 하더라도 말이다. 우리 인간이 DNA에 의해 설계된 대로만 움직이는 것은 좀 쪽팔리지 않는가?
퓨처리스트 윤기영이었습니다.
(c) 윤기영,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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