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이어서 가보죠.
먼저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에서 발췌한 글을 좀 보죠.
의도적으로 질서를 만들어 낼 수 있는 (1)우리의 능력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시장의 자생적 질서에 맡기는 것이 더 낫다는 오스트리아학파의 주장은 100% 옳다.그러나 자본주의는 의도적으로 구축된 질서로 가득차 있다. 유한책임회사, 중앙은행, 지적재산권법 등 19세기말까지 존재하지 않다가 뒤늦게 도입된 제도들이 그 예이다.서로 다른 자본주의 경제마다 다른 다양한 제도와 그에 따라 달라지는 경제실적 또한 많은 부분이 자생적이라기보다 의도적으로 구축된 질서의 결과이다. 더욱이 시장 그 자체도 구축된 질서이다. (2) 시장은 특정행위를 금지하고, 어떤 것들은 억제하고, 또 어떤 것들은 장려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든 규칙과 규제 등에 기초한다. 시장을 자생적으로 생긴 질서라고 부름으로써, 오스트리아학파는 자본주의경제의 본질을 심각하게 왜곡 해석했다.
왜 뜬금없이 Satoshi의 글을 보다가 점프를 하느냐고요? 맥락을 파악하기 위해섭니다. 이전 글 ( https://steemit.com/kr/@hashit/7-why-economist-don-t-agree-with-bitcoin-3 )에서 Satoshi의 글은 화폐를 저축과 연관지어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알 방법은 없죠. 하지만, 설사 그랬건 안 그랬건 저는 cryptocoin의 미래상이 궁금한 것이지 Satoshi의 생각이 궁금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특히 현재의 정책 결정에 영향력이 큰 경제학자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알아봐야겠지요? 그래서 이어갑니다.
0. 슘페터에 대한 비판
“호황시의 이윤이나 불황시의 손실은 의미 없는 것이 아니다. 기업가간 경쟁이 작동하는 환경에서 이익과 손실은 오히려 경제 발전 메카니즘의 필수요소로 경제발전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제거될 수 없다.”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으로 반복되는 경기변동을 자연스러운 경제체제의 변동과정으로 보는 슘페터는 이러한 변화를 제거할 수 있다는 생각을 경계했습니다. 따라서, 단기적 경제 안정을 위해 통화신용정책을 고려하는 케인즈의 견해에 반대했지요.
그런데, 현실은 어땠을까요? 1929년부터의 대공황기에 슘페터는 정부는 개입하지 말아야하고, 자연스러운 구조조정, 즉 긴축을 외쳤습니다. 결과는 아시다시피 처절한 고통이었죠. 비판의 주된 논지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정부와 공공영역의) 개입주의와 보정적 정책수단(재정정책)을 전적으로 거부하는 자유주의적 대응은 ‘자기치유’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항구적인 긴축을 불러올 수 있다.” <긴축, 그 위험한 생각의 역사, 마크 블라이스>
위의 그림에서도 경기 싸이클의 하강 시 정부는 수요를 진작시키고 화폐를 공급하는 정책적 대응을 취했습니다. (파란 화살표) 대공황과 그 이후 단기적으로 발생했던 경기 침체의 대응을 통해 확인 할 수 있는 사항입니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가 그렇듯이 대조군은 없습니다.)
비판에 대한 부분은 차고 넘치기 때문에 자세히 소개하진 않겠습니다. 이론에 대한 평가는 역사와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굳이 할 필요가 없고, 우리는 그저 한 사람의 생각을 통해 얻을 것만 얻으면 되겠지요.
그래도 비판과 관련하여 , <긴축, 그 위험한 생각의 역사, 마크 블라이스>는 읽어볼만 하니 일독을 권합니다.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1405112)
1.
자 슘페터에 대한 비판은 살펴봤습니다. 그의 이론상 경기의 변동이 발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이에 대한 개입은 자연스러운 경제체제의 변동을 저해하는 행위라는 것인데, 실제 역사는 오히려 개입하지 않았을 때 더 고통이 길고 파괴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냥 바이바이 슘페터 하면 될까요? 그러기엔 살짝 아쉽습니다. 왜 그런지 그가 신용 (credit)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졌었는지 조금 살펴보도록 하죠. 누누히 얘기하지만 이를 살펴 보는 이유는 cryptocoin의 미래에 대한 intuition을 얻기 위함입니다.
기업가는 신기술의 발견이나 도입을 통해 경제적 평형상태를 파괴하고 새로운 시스템 혹은 구조적 평형상태를 찾아간다. 이러한 과정을 창조적 파괴 (Creative destruction) 라고 한다. 은행가는 이 과정에서 기업가만큼이나 적극적인 역할을 하는 존재이다. 기업가의 혁신 동기는 경제 구조의 변화를 초래하는데 은행가는 기업혁신을 파이낸스하고 자본을 제공하는 존재인 바 이는 은행가에 의해 새로운 신용의 창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신용의 기본적 기능은 기업가가 필요로 하는 생산재를 구매하여 다른 사용으로부터 회수하도록 함으로써 경제체제를 새로운 궤도 속으로 이끄는 데 있다. 신용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구매력의 단순한 이전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기업가에 이전할 목적을 갖는 구매력의 창출이다. 신용의 창출은 원칙적으로 사적 재산권과 노동분업의 사회(자본주의 )에서 경제발전이 이루어지는 방법을 특징지운다. 이런 식에 의해 단순한 경제 순환으로부터 경제발전이 전개될 수 있다. 이러한 기능이야말로 현대 신용제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CSchumpeter,1934)
자, 보고 싶은 요점만 뽑아 보도록 할까요? 은행가에 의해 새로운 신용이 창출되는데, 그러한 신용은 구매력의 단순한 이전이 아니라, 기업가에 이전할 목적을 갖는 구매력의 창출이라고 합니다. 구매력의 단순한 이전을 ‘저축’이라고 한다면, 기업가에 이전할 목적을 갖는 구매력의 창출은 ‘신용’입니다. 다른 말로는 ‘대출’이죠.
왜 굳이 모든 경제학자들이 다 하는 얘기를 굳이 슘페터를 살펴봐야 할까요?
대공황으로부터 (신)케인지언학자들은 불황시에 과감한 수요진작 정책 (재정, 통화 양측면에서)을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특히 현재 진행형이죠. 그리고, 단순히 불황시 뿐만이 아니라 그 후 수십년간의 호황기에도 통화정책을 통한 ‘수요관리’는 계속 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심지어 오스트리아 학파로 취급되는 슘페터조차도 fiat currency 시스템의 ‘신용의 창출’은 자본주의 시스템의 주요 동력이라고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신용의 창출’, 즉 은행을 통한 구매력의 창출은 단지 케인지언들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물론, 공급 측면의 신용창출과 수요 측면의 수요 창출은 엄연히 영동과 영서를 가르는 태백산맥만큼이나 큰 허들입니다. 하지만, cryptocoin이나 gold와 비교한다면 영동과 영서는 모두 강원도일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자, Satoshi의 글을 다시보죠.
Banks must be trusted to hold our money and transfer it electronically, but they lend it out in waves of credit bubbles with barely a fraction in reserve.
어떤가요? 어떤 면에선 은행의 credit 창출의 역할은 너무 과소평가한 것 같기도 하지 않나요?
너무 길어지지 않게 다음편에 이어서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