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잔의 기적' 단상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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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전 단상
 
 
축구 전술을 평가할 능력은 없이 그간의 결과에 따른 흐름 정도는 보는, 스포츠는 적당히 좋아하는 비평가의 시선이라 생각하시면 될 듯
 
 
앞선 조별리그두 경기 보고 ‘90년대와는 다르다’, ‘멕시코보단 독일이 우리에게 상성이 맞는다’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그 생각은 옳았다. 당연히 나 역시 2대0 승리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바고 어제 경기 시작 전엔 1대3 패배에 돈을 걸기는 했지만 말이다(기성용의 결장에서 희망을 잃었던).
 
 
즉 이제는 한국이 월드컵 진출 아시아 예선에서 헤맨다고 좌절하고 신태용이 하듯이 이상한 실험이나 트릭을 남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한국이 아시아 예선에서 헤매는 건 아시아국가들끼리의 격차가 좁혀진 탓이 근본적 이유이고(이에 대한 대처를 잘 못하고 있지만 그 얘기는 이따가), 그 아시아국가들과 여타 대륙 월드컵 출전국들과의 격차 역시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정신력’ 문제도 분명히 있지만 ‘격차’ 문제도 있음은 1998년 월드컵을 반추해보면 알 수 있다. 딱 이십년 전이다. 그 월드컵의 조별리그 세 경기의 구조는 복기하면 지금과 매우 흡사했다. 하지만 격차가 달랐기에 다소 다른 결과가 나왔다.
 
 
1> 1998년과의 비교로 생각해본 줄어든 격차
 
 
1경기: 멕시코전 1대3 패배. 골넣은 하석주의 백태클 퇴장으로 유명했던 그 경기. ‘이겨야 할 대상’으로 상정했던 상대에게 발렸다. 고종수가 인상적인 모습을 보이고 1999년 K리그 열풍을 주도하는 3인방 중 하나가 됐다. 이번 월드컵 스웨덴전에 비교할 수 있다. 그런데 그때보다 한국팀이 더 강했기 때문에 1998년에 하석주 퇴장 후 확실하게 한국을 응징하던 멕시코와 달리 2018년 스웨덴은 상당히 우물쭈물하는 모습을 보였다.
 
 
2경기: 네덜란드전 0대5 패배. 1경기 패배하고 선택지가 좁아진 상태에서 더 강한 상대에게 사력을 다해 덤볐으나 개발린 경기. 전술과 스피드에 완전히 말렸다. 차범근 전격 경질 경기. 스코어로 봐서는 의외지만 골기퍼 김병지가 인상적인 모습을 보였고 후반 막판 들어간 이동국이 슈팅 한 두 개로 찬사를 받았다. 이동국은 1999년 K리그 열풍을 주도하는 3인방 중 하나가 됐다(나머지 한 명은 안정환). 이번 월드컵 멕시코전에 충분히 비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때보다 한국팀이 더 강했기 때문에 대참사가 발생하지 않았고 그냥 말리고 발리는 경기가 나왔다.
 
 
3경기: 벨기에전 1대1 무승부. 참고로 이때 벨기에는 한국을 몇골차 이상으로 이겨야 16강 진출이 가능했고 앞선 두 경기 결과를 보고 자기들도 그렇게 잡아먹으려는 희망을 가지고 덤볐다. 근데 한국이 월드컵에는 나오는 나라들 특유의 ‘3패는 싫어’ 버프를 먹고 덤볐고(1990년 아시아 티겟 2장을 쥔 한국과 아랍에미리트는 깔끔하게 3패씩 거두고 짐을 쌌다. 1998년만 해도 1990년에 비하면 아시아가 강해졌던 것이고, 지금은 더하다. 1998년에 아마 이란이 미국 상대로 아시아 유일 승리경기를 했던 듯), 그래서 세계 축구팬에겐 젠젠 노관심이지만 한국 교민들은 열광시킨 무승부 경기가 나왔다. 유상철이 막 몸을 던져서 슛을 막고 그랬는데.
 
 
그리고 이때보다 한국이 더 강했기 때문에 독일전 2대0 레전설 승리가 나왔다. 1998년 벨기에전과는 다르게 세계 축구팬에게도 충격이고 세계 축구사의 반 페이지 정도를 장식하게 됐다.
 
 
2> 상성 문제
 
 
상성 얘기를 했더니 주변에서 “한국은 전통적으로 유럽보다는 남미에게 강했잖아요?”란 말이 나왔다. 멕시코가 더 껄끄럽고 독일에겐 상대적 선전의 여지가 있다는 말을 못 믿겠다는 것이다.
 
 
이건 절반은 상성 문제를 너무 안이하게 해석한 것이고, 절반은 내 얘기를 잘못 알아들은 것이다. 후자부터 얘기하자면 ‘한국이 멕시코를 이길 확률’과 ‘한국이 독일을 이길 확률’을 비교하면 그래도 전자가 높을 수 있다. 근데 한국이 멕시코에게 질 때는 개발리는 양상의 경기가 나올 것이다. 반면 한국은 독일을 상대로는 패배하더라도 개발리는 경기를 하지 않는다. ‘졌잘싸’ 경기가 나온다.
 
 
나는 축구 전술을 보는 눈은 부족하지만, 이 스코어들과 경기 양상의 흐름을 살펴보면 대충 이런 얘기가 된다. 독일이 멕시코보다 축구실력이 좋지만, 팀상성상 한국의 상성이 멕시코에게 안 맞고 독일에게 잘 맞는 것이다.
 
 
“한국은 유럽보다 남미에게 잘 먹힌다”는 건 냉정하게 말하면 이십년 전의 상식, 히딩크의 2002년 이전의 상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때는 체감적으로 맞는 말이었다. 유럽팀에겐 0대5 참사도 종종 나왔는데 브라질 상대로는 ‘졌잘싸’ 경기를 했으니까(그러나 그 이전 시대인 1994년 월드컵에서도 한국이 독일을 상대로 2대3 상성을 보여주는 경기를 해야 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 분석이 안 들어맞는 건 ‘브라질만이 남미가 아니다’라는 부분이 있고, 한국축구가 (아시아축구가 아닌) 세계축구 속 자신의 비교우위가 무엇인지 감을 잡지 못하고 헤매던 시절의 결과들이란 문제가 있고, TV중계 이후 ‘태권도축구’가 제어되기 이전 흐름이라는 문제가 있다.
 
 
1986년 월드컵에서 한국팀을 만났던 아르헨티나 마라도나의 회고를 들어봐도 알 수 있다.
 
 
“물론 나는 허정무를 기억한다. 당시 한국팀은 우리를 상대로 축구가 아닌 태권도를 했다”(2010년 마라도나)
 
“한국선수들은 우리보다 세배는 더 빨라 보였다. 냉정을 유지하면서 경기를 하기 위해 노력을 했다”(1990년대 후반 마라도나의 보카주니어스팀 대 한국 대표팀 복귀전 당시 회고. 한국에서 복귀경기를 뛰어야 하는 입장에서 두 문장 사이에 태권도 축구 얘기는 생략했던 듯. 다만 당시 우리의 비교우위가 스피드에 있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음. 차범근도 있었고.)
 
 
말하자면 투박하게 스피드/체격/개인기를 두고 볼 때, 한국은 측면 스피드가 좋고 체격이 아시아치고는 크게 밀리지 않는 편이었다. 개인기는 부족했다(이후 한국은 체력으로 스피드 강점을 강화하고 체격은 더 커지고 개인기도 점진적으로 보강하는 방면으로 발전을 하긴 함). 그래서 브라질 같은 팀 상대로는 스피드나 체격에서 밀리지 않으니 개인기를 ‘태권도축구’로 끊어먹으면서 버티는 것이었다.
 
 
유럽에겐 그게 안 통했고, 특히 1998년 네덜란드전 0대5 참패는 당시 지휘봉을 잡고 있던 히딩크가 이후 한국에서 실현할 그 축구와 비슷한 형태를 상위 체격호환으로 실현한 축구에 당했다. 측면에 오베르마스라는 빠른 선수가 있었다.
 
 
이후 2002년을 기점으로는 오히려 ‘유럽의 이류팀’ 상대로 더 선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측면 스피드에서의 비교우위, 유럽인이 휙 밀어도 한 번에는 밀리지 않는 체격으로 버티기(호주 이란 제외 아시아는 이게 안 되고, 이상하게 우리랑 할 때는 우리보다 체격이 더 좋은 거 같은 호주 이란도 유럽 상대로는 이걸 잘 못함), 유럽인보다 작은 체격을 순간 스피드 돌파로 강점으로 변환하는 식의 대응 덕분이었다(이를테면 이청용의 드리블 돌파는 유럽에서는 되는데 우습게도 아시아권에선 잘라 먹힌다. 아시아선수들의 순간 움직임이 이청용보다 못할 게 없으니).
 
 
특히 (이번 대회에선 거의 실종되었지만) 과거 아시아권에서도 통용됐던 측면 스피드 돌파 전술은 이를 별로 경험해 보지 않은 팀 한정 유럽의 둔중한 장신 포백라인을 순간적으로 허물어버리는 모습을 보였다(우리 한국인들은 지들이 자주 쳐먹는 음식에 비유하여 이런 상황을 언제나 ‘쌈싸먹는다’고 말해왔다). 2002년 폴란드전 2대0 승리, 2010년 그리스전 2대0 승리 등이 그 모범적 예시이며 평가전까지 합치면 이 비슷한 승리가 몇 개 더 있음.
 
 
여기까지 적으면 독일이 세계 최강레벨 축구실력을 가진 국가 중에선 유일하게 대한민국에게 ‘쌈싸먹힐’ 방식의 축구를 하는 나라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후 한국에게 대참사를 안겨준 세계 최강레벨 축구실력을 가진 나라는 아르헨티나였다. 2010년 1대4 패배를 생각할 것. 1골은 이청용이 엉겹결에 넣은 건데 부부젤라 없었음 불가능했을 골이었음. 아마 지금도 한국에겐 세계 최강레벨 축구실력을 가진 국가 중 아르헨티나가 제일 역상성인 나라일 것 같고, 멕시코에게 약한 이유도 이와 비슷한 연장선상에 있는 것 같다.
 
 
3> 향후 과제
 
 
결과적으로 대표팀의 경기에 실망하든 찬탄하든 우리는 1990년대로 돌아갈 수 없으며, 격차 역시 점점 줄어들었다. 개인기가 왜 아직도 안 되냐고 하지만 그 격차 역시 줄어들었다.
 
 
문제는 전략/전술 빌드업이 됐다는 느낌을 못 받았다는 것. 한국 축구엔 큰 틀에서 볼 때에도 적어도 두 가지 빌드업이 필요하다. 하나는 아시아에서 짱먹기 위해 필요한 빌드업. 둘은 세계권에서 선전하기 위해 필요한 빌드업.
 
 
두 전략적 목표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두 전략에서 상대할 팀들의 실력과 우리를 대하는 양상도 엄청나게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단 큰 틀에서 위 두 전략이 필요하고, 상대에 따라 세부전술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저 두 개조차 제대로 짜여져 있지 않다는 느낌이다. 당장 내년 아시안컵을 대비한빌드업이 필요할 것이다. 그럴 수 있는 감독을 선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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