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시普洱市 – 제갈공명, 보이차, 차마고도의 시작점]
며칠간 함께 해 준 차우가족들과의 눈물겨운 이별을 했습니다.
이것저것 특산물이라고 준비해 주고, 직접 제다한 차라고 봉지봉지 담아주고, 그리고 귀하고 값비싼 야생교목, 고수보이차들을 박스로 준비해서 택배로 보내는 것을 끝낸 후 손을 맞잡았습니다.
그때 잡은 그 손은 차 잎을 따면서 햇볕에 그을리고, 쇄청하느라 그을린 참 아름다운 손이었습니다. 이번 춘차가 나오면 잘 준비해서 나한테 오겠노라고…약속에 약속을 나누며 우리는 보이시행 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총32인승 버스로, 좌석과 좌석사이가 좁고, 그리고 역시 낡은 버스가 계곡과 계곡을 돌고 산을 넘어 8시간을 가야 보이시에 도착한다고 합니다.
임창시를 빠져 나갈 때 부터 차가 막히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예정시간 2시간을 넘기면서야 시내를 벗어나기 시작한 시간이 오후 4시.
막막했습니다.
순간 머리속엔 후회가 스치기 시작했습니다. 차라리 쿤밍으로 나가는 비행기를 타고 다시 보이시로 들어가는 국내선을 타면 되었지 않았을까? 이렇게 길에다 시간을 다 허비해 버리면 짧은 여행시간 더 많이 보고싶은 것들이 줄어들고, 아울러 후회가 남을텐데…….하면서 손가락 마디마디를 눌러보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다음 여행계획은 이렇게 하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다보니 버스는 어느덧 산중턱을 돌고 있었습니다.
내가 앉은 자리에서 위험천만한 산길을 능숙하게 돌아가는 운전기사님의 모습을 사이드 미러로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마음 졸이며 습관적으로 시선을 아저씨한테 향할 수 밖에 없었으나, 아주 유연하게 잘 운전하는 모습에서 이전부터 이 길을 수없이 왔다 갔다 했을 경륜으로 우리를 목적지까지 무사히 잘 데려다 주리라 믿었습니다.
다행히 밤길이 아니어서 단 한순간의 모습이라도 놓치지 않으려 창밖으로의 시선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높고 높기만 한 산중턱을 지나 그 나마 이 길이라도 있으니 외부세계로 나갈 수 있지 않았을까?
그 옛날에 말에 차를 잔뜩 싣고 몇 개월을 걸려 보이시까지 가서 차 물물 교환을 했을 것이고, 다시 돌아오면 한 해가 가는 그런 삶을 했을 그때를 생각하며 가다 보니 어느새 저 언덕 너머로 야경 불빛이 찬란하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곳이 바로 유명한 보이시 경곡현!! 이곳의 차도 황실에 상납을 했을 정도로 유명한 경곡 차산이 형성되어 있기도 한 곳이라 마음같아선 내려서 여기서도 이곳저곳을 섭렵해 보고 돌아갔음 했지만 마음은 급했습니다.
이제 2시간이면 보이시에 도착할 것입니다. 차의 집산지이자 원산지인 이곳 보이시에서 보이차의 보이가 유래했다고 합니다. 차를 타고 오면서 중국의 바이두 및 네이버를 통해 그간의 보이시와 관련된 자료를 검색해보고 또 검색해보면서 지식을 쌓아보려 노력을 했습니다.
청나라 시기 차의 집산지가 보이부(지금의 보이시)에 속하였습니다, 과거 운남의 보이차는 보이시에 집산되어 차마고도를 타고 멀리 머나먼 땅 티벳까지 전달되었을 뿐 아니라 청대 황실에 공납하던 관차 역시 당시의 보이부에서 관리하게 되면서 차산업은 이곳 보이부에 집중하게 되다가 2007년 4월 7일 현 보이시로 승급되었다고 합니다.
보이시는 만묘다원이 펼쳐진 경매산이 소속된 란창현과 그 주변의 맹련현, 서맹현을 포함한 변삼현을 녹색 실크로드 구역으로 정해 보이녹삼각(普洱绿三角)이라는 이름을 부여하고도 있답니다.
임창은 워낙 험한 산중이라 귀하고 많은 차산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이를 외부에 홍보하기 역부족인 환경을 가지고 있었으나, 시촹반나는 일찍이 황실시대부터 궁중에 차 공납을 하면서 차 사업에 눈을 뜬 곳이라 한다면, 보이시는 각 지방의 차들이 이곳에 집합되어 물류를 할 수 있는 즉, 차마고도의 시작점이기도 한 곳으로 유명합니다.
또한 제 개인적으로도 가장 좋아하는 인물이기도 한 제갈량을 차조(茶祖)로 섬기고 있는 곳이기도 하지요.
- 제갈량이 이곳 운남성과 전혀 연관이 되지 않을 듯 하지만 남만의 왕 맹획의 난을 진압하러 온 제갈량은 포로로 잡은 오랑캐를 잡았다 놓아주고 다시 잡았다 놓아주기를 7번 반복했던 “칠종칠금(七縱七擒)의 지략에 감복하여 항복을 하게 되는 고사가 있습니다.
그것도 고기와 술로 충분히 대접하고 내 보내는 온화정책을 폈다고 합니다. 포로로 잡혀 죽은 줄로만 알았던 패잔병들의 가족들은 남편이 살아오니 얼마나 놀랐겠으며, 아울러 돌아온 자들은 하나같이 제갈량의 인간됨에 탄복하였으니 지금의 소수민족이 그 후예들이란 것이지요.
제갈공명이 십만 대군을 이끌고 운남의 토족을 정벌하러 왔을 때, 운남에 도착하자마자 병사들이 시름시름 앓기 시작, 싸움도 한 번 제대로 못해보고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럴 때 시촹반나의 일부 차산을 형성하고 있는 뿌랑족 조상 중에 한 분이 제갈공명에게 보이차를 바쳤답니다. 밑져야 본전이라고 생각한 제갈공명이 차를 다려 병사들에게 마시게 했더니 축 늘어져 있던 병사들이 벌떡 벌떡 일어나 기운을 차리더라는 것이지요. 그때부터 보이차는 명차로 인정받기 시작했다는 설도 있고,
남나산 근처까지 출병했던 제갈의 군사들이 눈병환자가 속출했다고 합니다. 치병의 비책으로 공명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나무지팡이를 남나산 중턱에 심었더니 놀랍게도 지팡이에서 금세 잎이 돋아났고 그것을 끓여 마신 사병들이 모두 완쾌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차나무의 원조라고 지칭되었다고도 합니다.
보이시에 도착한 시간은 밤 12시가 거의 다 되어가고, 우리는 한 손에 보이차잎을 들고 시선은 저 멀리 차산을 향해 있는 제갈량의 동상이 우뚝 서 있는 모습이 보이는 곳에 숙소를 정하고 보이시에서의 일정을 시작합니다.
삼국지를 읽으며 좋아하던 인물 중에 하나가 제갈량인데. :)
칠종칠금 이야기도 재미나게 읽었었구요.
이렇게 역사적인 곳을 사진으로 보니 감회가 새롭군요 :)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
감사합니다^^자주 뵈어욤^^
험악한 산악지형에서 살아가는 그네들이 참 대단해 보입니다.
4차산업혁명으로 불타는 중국이지만 이곳은 아직도 청정지역이라~~그러나 어느날 갑자기 터널이 확확 뚫리는 날이 오지 않을까 싶어 은근 걱정되기도 했습니다. 그들만의 소중한것들이 간직되길 바라는 심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