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면 한 번도 없었다. 잘못을 따지고 상대방을 탓하여 이득을 봤던 경험이. 잘못을 들추고 탓하면 상대방이 인정하고 물러날 줄 알았지만, 그렇게 해서 볼 수 있던 건 더 강하게 반발하는 상대뿐이었다. 얌전히 묻혀 있던 잘못을 살살 털어서 끌어 올리면 어느새 잘못은 사라지고 잘못이 묻혀 있던 흔적만 남아 메울 수 없는 골이 되곤 했다.
이 사실은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싶은 너무 당연한 이야기여서 오히려 의식되지 않을 때가 많았다. 잘못을 지적하고 탓하고 나서야 아차 싶지만 이미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선명한 감정의 골을 만들고 나서야 그만두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한 해 두 해 시간이 지나고 인연이 왜 가느다란 실에 비유되는지 깨닫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아차 싶은 일이 줄어들었다.
사람과의 관계는 그랬지만 미처 생각하지 못한 관계가 있었다. 사물과의 관계다. 지금껏 사물과 관계를 맺는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사물은 이용하는 대상이지 관계의 대상이 아니었으니까. 애초에 사물과의 관계라는 개념이 없었다. 그 만남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그랬을 터였다.
지난 6월, 밖으로 나가면 숨이 턱 막히는 무더운 날이었다. 선배 사업가의 조언을 구하기 위해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에어컨이 약한 건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볕이 강한 건지 땀이 마르지 않고 있었다. 어디 시원한 자리 없나 주변을 둘러보니 의자 수보다 사람 수가 많았다. 앉을 수 있는 게 어디냐 싶어 커피를 홀짝거리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약속 시각이 되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표정도 익숙했다. 밖에 있다가 카페에 들어온 으레 짓는 이제 좀 살 것 같다는 표정이었다. 나도 저랬겠지. 하지만 저 표정은 얼마 가지 않을 터였다. 음료를 가지고 자리에 앉은 선배 사업가는 예상대로 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더워 당황한 듯했다. 티슈로 마르지 않는 땀을 닦으며 ‘와…. 와….’ 하는데 그 모습이 너무 공감돼서 웃음이 났다.
그는 과거 대기업에 다니며 직장 동료와 결혼해 주변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그럴 만도 했다. 둘의 벌이를 합치면 억 단위인 데다 안정적으로 계속 늘어날 예정이었으니까. 하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잦은 회식과 야근으로 건강은 나빠지고 가족에게 쓸 시간은 없고, 조금 있으면 애도 나오는데 이래도 괜찮을까 생각이 들었다. 그런 고민을 아내에게 얘기했더니 아내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결국, 둘이 동시에 사표를 내고 나왔다. 그때 아내와 약속한 것이 아내가 아이를 키우고 돈은 자신이 다 벌겠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퇴직자들 으레 하는 것처럼 퇴직금으로 호프집을 차렸다. 나름대로 장사도 잘됐다. 둘이서 대기업 다닐 때만큼은 아니지만 세 가족 먹고살 정도로는 충분했다. 하지만 바빠도 너무 바빴다. 호프집 특성상 밤에 장사했는데 낮에도 재료 준비니 뭐니 이것저것 할 게 많아서 하루에 두 시간 자면서 일했다. 장사 잘돼서 기분 좋은 것도 잠깐, 이래서는 회사 다닐 때와 다를 게 없었다. 시간 안 쓰고 돈을 벌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가 사업을 시작하게 된 이유였다. 지금은 부자들을 연구하여 자신을 비롯한 고객들이 부자가 될 수 있도록 부자 멤버십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 사업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아시다시피 제 형이 아이디어 사업을 하고 있잖아요. 평소에도 저한테 이것저것 사업 해보라고 아이디어를 줘요. 한번은 형이 부자 되는 방법을 파는 사업 해보겠냐고 하더라고요. 처음엔 내가 부자 되는 방법을 알면 이미 부자가 됐겠지 무슨 헛소리냐 싶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자꾸 생각나더라고요. 진짜 부자 되는 방법이 있을까? 찾아봤죠. 그러니까 방법은 없고 부자들의 특징이라고 자료가 좀 있더라고요. 자료를 다 봤어요. 재밌더라고요. 그러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부자가 됐기 때문에 이런 특징이 있는 걸까? 아니면 이런 특징 때문에 부자가 된 걸까? 한번 실험해본다는 생각으로 부자들의 행동을 따라 했어요. 실험이 성공하면 부자가 될 것이고 실패하면 지금처럼 사는 거였죠. 어떻게 되든 손해 볼 게 없었어요. 그게 시작이었죠.”
두 시간 남짓 이런 식의 대화를 주고받았다. 주로 내가 묻고 그가 답했다. 벌써 두 달이 지난 일이라 정확하게 무슨 대화를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대강의 맥락과 좋은 만남이었다는 느낌만 흐릿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다만 하나 선명한 것이 있다면 돈에 대한 그의 태도다.
“제가 이 사업을 하면서 확신한 것은 돈도 마음이 있다는 거예요.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에게 찾아갑니다. 흔히 돈 때문에 힘들었던 기억에 돈 탓을 많이 하는데 그러면 돈이 달아납니다. 돈 덕분에 할 수 있었던 것들에 집중하고 감사해보세요. 우리가 이렇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도 모두 돈 덕분입니다.”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해야 할 일은 지금 당장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미루게 되는 건 그런 사실을 인식했을 뿐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돈 덕분에라고 생각하는 삶의 태도를 그저 인식했을 뿐이었다. 이따금 돈 때문에 이게 뭐 하는 짓이냐 탓하곤 했으니까.
지난주 장염으로 며칠 누워있었다. 죽만 먹으며 단칸방에 혼자 누워있으려니 시간이 아까웠다.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누워서 스마트폰을 들었다. 상대방을 설득하는데 안정감 있는 목소리와 정확한 발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요즘 많이 느낀다. 좋은 목소리 만드는 법을 검색했다. 여러 전문가가 글 또는 영상으로 제작한 자료들이 여럿 나왔다. 너무 많아서 어떤 걸 선택해야 할지 고민이 됐다. 고민 끝에 하나를 골라 봤더니 결국엔 호흡이 중요하다는 얘기였다. 제대로 호흡을 연습할 수 있게 도와주는 앱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켓에서 호흡으로 검색했다. 여러 앱이 나와 가장 평점이 높고 설치 수가 많은 앱을 실행했다. 호흡을 들이쉬고 참고 내쉬는 시간을 설정해서 연습할 수 있는 앱이었다. 간단한 기능이지만 꼭 필요한 것이었고, 앱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건 광고가 없다는 점이었다.
광고 없으면 돈도 안 되는데 왜 만들었을까? 다른 이득이 있나? 이리저리 생각해보는데 딱히 없다. 돈 말고는 이런 행동의 동기가 될 만한 게 생각나지 않는다. 그 순간 벼락이 치는 듯했다. 사람들은 돈 때문에 앱을 만들고 글을 쓰고 영상을 찍어 공유한다. 그리고 더 많은 돈 때문에 더 편리하고 깔끔한 앱을 만들고 힘들게 쌓아 올린 비법을 글로, 영상으로 기꺼이 공유한다. 결국, 돈 때문에.
그 순간 진심으로 감사했다. 내가 누리고 있는 많은 것들이 돈 덕분에 가능한 것이었구나. 그래, 돌이켜보면 돈 때문에 힘들고 비참했던 시간보다 돈 덕분에 누리고 살 수 있었던 시간이 훨씬 많았다. 비로소 인식은 앎이 되었다. 돈 때문에 일어난 변화 덕분에.
잘못이 묻혀있던 흔적이라,,,생각이 깊어지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