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엔딩5

in #kr7 years ago (edited)

은숙은 대문을 향해 곧장 걸어왔다.

영길이 대문 앞에 서 있다는 걸 모를 리 없지만
모른다는 것 처럼
눈길을 주지 않은 채 주저함 없이

걸어왔다.

영길이 은숙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은숙이 옆으로 비껴가려고 방향을 틀었고
영길이 다시 앞을 막아 섰다.

걸음을 멈춘 은숙이

천천히

눈을 들어 영길을 바라보았다.

크고 까만
은숙의 눈이

가까웠다.

하얗게 피어오르는 은숙의 숨결이 느껴졌고

영길은 까닭없이 아득해졌다..

“할 얘기가 있어.”

영길이 어렵게 입을 떼자

“말 해.”

은숙이 짧게 대답했다.

영길을 똑바로 쳐다보는 그 눈길엔
아무런 표정이 실려 있지 않았지만
그 눈을 마주 보는 것 만으로도 영길은 숨이 차 올랐다.

그래서였을까..

“저기…”

그토록 추위 속에서 연습을 했건만 영길은
쏘아보는 은숙의 까만 눈동자 앞에서 길을 잃어버렸다.

“지금 눈이 오거덩......”

엉겁결에 내뱉고는 머리 속이 하얘진 것 처럼 다음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눈은 계속 내리고 있었고..

은숙이 ‘그래서?’ 라는 얼굴로 쏘아보자
문영길은 더욱 허둥댔고
연습했던 대사는 첫 출발이 틀려버린 다음 부터는 새까맣게 지워졌다.

눈은 계속해서 내렸고..

은숙이 하얀 입김을 뱉으며 말했다..

“셋 셀 동안 얘기 해. 하나.”

아..

무정하여라..

마음을 알아주길 바란 단 한 사람이 은숙이었으나
이 순간 은숙의 매정한 눈빛은 영길을 절망에 빠뜨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영길은 사력을 다하여 입을 연다고 한 것이..

“하얀 눈을 보면 너의 하얀 살결이 생각나지.”

아뿔싸......

이게 뭔가. 이게 아니었는데..

졸지에 목욕하는 은숙을 훔쳐 본 걸 실토해버린 영길이었다.

은숙의 눈이 더 매서워졌고

“둘.”

말투는 더욱 단호해졌기에

영길은 다급하게 다음 말을 찾으려 버벅거리는데..

“셋.”

마지막 숫자가 불려지고 만 것이다.
선고가 내려지고 만 것이다.

영길은 은숙이 가버릴까 와락 무서워 은숙을 안아버리고 말았다..

‘절벽에서 떨어지기 직전의 심정이었다.’ 고 현재의 문영길씨는 회고한다.

“은, 은숙아. 잠깐만..”

그런데 화를 낼 줄 알았던 은숙이 가만히 서 있었다.
싸대기라도 맞지 않을까 겁이 난 게 이상할 정도였다.

그 시간이 얼마 동안이었는 지는 모른다.
일 이초였을 수도 십 몇초였을 수도 있겠지만

은숙의 작고 말랑한 몸이 영길의 가슴팍에 쏙 들어와 있었다는 것 만큼은
선명하게 기억난다고 지금의 문영길씨는 말했다.

“잠깐만 은숙아.. 지금 생각이 안 나서 그렇거등..”

영길은 그렇게 말하며 은숙을 안은 팔에 은근히 힘을 주었다.
가만히 있는 은숙이 영길에게 살짝 자신감을 불어넣은 거였다.

그러나

은숙이 양손바닥을 힘껏 앞으로 내지르며 영길의 가슴팍을 쳤고
뒤로 밀리던 영길은 중심을 잃지 않으려고 발을 잽싸게 움직였으며
양 발이 꽁꽁 언 땅바닥 위를 미끄러지며 허공으로 들렸고
영길의 엉덩이가 먼저

쿵!

땅바닥에 떨어졌다.

충격은 엉치뼈를 거쳐 척추를 타고 순식간에 올라와 머리를 흔들었는데
아프다고 느낄 겨를도 없이 그 소리가 너무 크게 느껴져
엄마가 소리를 듣고 달려 나오지 않을까 생각마저 들었다.

은숙이 영길을 내려다 보고 있었는데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은숙도 막상 이 상황에 놀란 눈치였다고
문영길씨는 기억한다.

그렇게 잠시 영길을 보던 은숙은 서둘러 시선과 자세를 거둬들였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영길을 지나쳐 대문 안으로 발을 옮겨 놓았다.

영길은 주저 앉은 채 시선만 은숙을 쫓았는데

우뚝

은숙이 멈춰 섰다.
그리곤 천천히 영길을 돌아보았다.

고개를 돌리기 직전에 은숙이 살짝 웃었던가
아니었던가.. 영길은 애매하게 느꼈는데

은숙은 아까와 같은 매정한 표정으로 그러나
목소리는 한결 누그러뜨리고 말했다.

“앞으론 누나라고 불러. 한 살이나 적은 게..”

그리고 은숙은 대문 안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랬다

은숙은 문영길 보다 한 살이 많은 고3이었던 거다.
그런데 누나라고 불렀던 기억은 없다고 지금의 문영길씨는 회고한다.

왜 그랬을까?

왜 그런 거죠? 내가 묻자 문영길씨는 잠시 눈을 꿈벅이더니
모르겠는데? 라고 말한다.

이건 나도 해석 불가능이다.
남초적 [본능] 습관 이었을까?
아니면 은숙이 한 집 식구 같아서였을까?
누나라는 단어가 남녀의 관계로 설정하는데 장애가 되어서?
‘은숙씨’ 라고 부르기엔 노티나서?
모르겠다.

아무튼..

다짐했던 고백은 처참하게 망가졌지만
영길은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았다.

그 <앞으로>라는 단어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는 생각하는데

그 날 밤의 좌절에도 불구하고 그 단어는
아직 가능성이 열려있음을
기회가 또 있을 수도 있음을
다른 사람도 아닌 은숙이 직접 암시한 거 아니겠는가, 라는 것인데

내 해석을 들은 문영길씨는 ‘과연 옳다.’ 라면서 껄껄 웃긴 했다.

영길은 그렇게 한동안
내리는 눈 아래
얼어붙은 땅바닥 위에 앉아 있었노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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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길씨가 살던 집은 대략 이런 느낌. 마당 깊은 집, 이라고 하던가. 오른쪽에 있는 별채가 잘 안보이는데 거기에도 한 세대가 산다. 세 세대가 마당을 공유하고 함께 사는 집. 영길의 할아버지 때 부터 살던 집.)

영길은 늦잠을 자고 일어났다. 방학이었던 것이다.

함박지게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을 견디지 못하고 눈을 뜬 영길은
시계를 먼저 보았는데 열 한시가 막 넘어가고 있었다.

영길은 엎드린 채 방문을 열고

“엄마-“

불렀으나 소리는 텅 빈 마당으로 맥없이 흩어졌다.

툇마루에도
마당의 펌프에도
시멘트 댓돌에도

햇살이 쨍하게 부딪히고 있었고 그만큼 적요했다.

목이 말랐던 영길은 마당으로 내려와 부엌으로 들어갔고
주전자를 들어 꼭지를 입에 물고 벌컥컬컥 물을 들이켰는데

맞은 편 별채에 사는 여자가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역시 늦잠을 자고 일어났는지 하품을 하며 슬리퍼를 발에 꿴 여자는
몸을 활처럼 휘며 한껏 기지개를 펼치고는 펌프로 다가왔다.

영길은 입가에 흘러내린 물을 닦으며 여자의 행동을 지켜 보았다.

예쁜 여자였다.

가끔 늦은 밤 화장실에 가게 되면 때마침 귀가하는 여자와 지나칠 때가 있는데
그 때 마다 여자의 온 몸에서 흘러 넘치는 야릇한 향기는
문영길의 가슴을 요동치게 했었다.

그건 은숙에게서 나던 상큼한 비누 냄새완 다른 거였는데

뭐랄까

더 유혹적이고 더 위험하게 느껴졌으며
영길을 마비시키는 듯한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여자의 평소 옷차림도 남달라서
일반적인 직장인이라고 보기엔 화려하고 대담했다.

엄마는 그 여자를 백야시라고 부르며 대놓고 경계를 했는데
그건 그럴만도 했다.

사춘기 왕성한 아들과 중년의 남편에게 미칠 영향도 위협적이었겠지만
엄마 스스로에게도
그 여자의 젊고 도발적인 매력은 눈꼴 사나웠을 것이다.
월세를 꼬박꼬박 내지 않았다면
아마도 엄마는 무슨 핑계를 찾아서라도 여자를 내보냈을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사람을 어떻게 백야시라고 부르냐? 라는 게 영길의 생각이었는데
어느 날은 아빠 역시 점잖게 한 마디를 하셨더랬다.

"멀쩡한 이름 놔두고 사람을 그렇게 부르면 쓰나."

그날 엄마의 분기탱천을 영길은 잊지 못 한다.
마치 여자와 아빠가 한편을 먹고 엄마를 구박이라도 한 것 처럼
아예 같이 살 지 그러냐! 엄마는 아빠를 몰아 부쳤는데
어지간한 바가지는 한쪽 귀로 흘려듣던 아버지 마저
친구 만난다며 슬그머니 집을 나가셨던 것이다.

“아버지가 잘 못 하신 거지 뭐..”

당시의 아버지 나이가 된 오늘 날의 문영길씨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이제 다 이해되는 거지 뭐..

아무튼 그 여자 백야시가 방을 나온 거였다.

잠자리에서 막 빠져 나온 그 차림 위에
니트쟈켓 하나만 더 걸쳐 입은 차림으로
여자는 펌프 앞으로 와 쪼그리고 앉았고

영길은 부엌 안에서 주전자를 치켜 든 채 바라보았고

여자는 펌프질을 했으며
깨끗한 물을 바가지에 받아 한 모금 시원하게 마시고는
대야를 채운 차가운 물에 손을 넣더니
차갑지만 상쾌하다는 얼굴로
두 손으로 물을 떠 가볍게 얼굴을 씻었는데..

여전히 주전자를 치켜 든 채 보고 있던 영길의 눈에

여자의 가슴골이 대단히 적나라하게 보여지고 말았던 것이다.

여자가 서너번 정도 고양이 세수를 하는 동안
즉 가슴의 깊은 골이 보이다 사라지다 하는 동안

주전자를 치켜 든 소년 동상처럼 영길은 고정되어
주전자 꼭지에서 물이 또르르 흘러내리는 것도 모른 채
눈길을 포획당했던 것이다.

문영길씨는 그 날의 장면을 매우 강렬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 여자의 얼굴은 오히려 희미하다고 했다.

그 때 까지 여자에 대해 아는 거라곤 은숙의 비누냄새나
대문 앞에서 은숙을 엉겁결에 끌어 안았을 때의 작고 말랑했던 느낌..
그게 아니면 이 여자에게서 나던 복잡한 향기 그게 전부였던

열 일곱 살의 문영길에게

그 날의 장면은
따뜻했던 겨울의 햇살과 더불어
지금은 없어져 버린 마당 깊은 집에 대한 추억과 더불어
지워지지 않는 장면이 된 모양이었다..

세수를 마친 여자는
다시 추위가 찾아오는지 어깨를 움츠리며 일어섰는데
자기 방을 향해 돌아서기 직전 부엌 쪽을 힐끔 보았다.

영길은 눈이 마주 친 것 처럼 심장이 덜컥 내려 앉았고
눈동자만 아래로 깔며 주전자를 든 소년 동상으로 그냥 서 있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불을 키지 않은 부엌 안은 어두웠으므로
마당의 여자 쪽에선 안이 안 보였을 것 같은데
그런데 싱긋 여자가 웃으며 돌아섰고 방으로 들어갔다.

별 의미없는 입가의 실룩임이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영길은 그 여자와
무슨 비밀의 암호라도 주고 받은 것 같은
연결의 느낌과 또한 그렇기 때문에 불쑥
솟아나는 불안감 같은 걸 느꼈었다고 한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듣다보니 이 문영길씨
평범한 50대의 아저씨가
보기 보단 공상의 감각이 꽤나 예민한 거 같다.
한 때 배우를 꿈꾸었다더니 이 양반
그 내면에 아무런 근거도 없었던 건 아닌 모양이다.

그 날 밤...

문영길은 은숙의 부엌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못 견디게 은숙이 보고 싶어졌다는데
왜 하필 그 날 밤이었는지
혹시 낮에 본 백야시의 장면과 어떤 상관을 가지는 것인지
그것은 나도 문영길씨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은숙은
한 집에 살면서도 한 집에 사는 것 같지 않았고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도 가장 멀었다.

이불 속에서 영길은 불현듯 은숙이 보고 싶어졌고
이런 그리움이란 한번 치솟으면 가라앉기 힘든 것이어서
영길은 어느 새 부엌 가까이 와서 서성이게 된 것이다.

부엌엔 불이 켜져 있었다.

영길은 은숙이 아닐까 하는 설레임을 안고 문으로 다가갔고
예의 그 문틈으로 부엌을 들여다 보았는데

역시나 은숙이 있었다.

목욕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은숙은 설겆이를 하고 있었는데
이 시간에 왠 설겆이? 라는 생각이 고개를 드는 동시에
영길은 보았다.

은숙이 울고 있었다

팔뚝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그 눈물이 그릇에 떨어지기라도 한 듯
그릇들을 박박 문지르면서

화가 난 것 처럼

울면서

그러고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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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초적 본능>이라는 표현에 대해... 본능이란 <동물의 행동 중 연습이나 모방 없이 태어날 때 부터 유전적으로 몸에 지니고 있는 성질>을 의미한다 (위키백과에서 인용). 즉 사회화나 학습 이전의 본원적이고 본질적인 성질. 남성우월적 의식이란 오랜 학습과 사회화와 의식화의 결과로 보는 것이 일반적으로 타당할 것이며, 뒤에 형성된 것이 앞서 존재하던 것과 동시적으로 놓여진다는 것은 물리의 일반적 성질이나 존재론적 질서에 비추어보아도 용납하기 힘든 무지의 소치로 보인다. 성립불가능이다. 논리적으로 완전한 오류. 게다가 이 표현이 나쁜 것은 남초적 현상을 독자 제위로 하여금 마치 생물학적 본능인 것 처럼 인식하게 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지극히 타당한 지적으로 받아들여 그 표현을 수정하였습니다. 오류가 있었던 사실을 남겨두기 위해 삭제하지 않고 [ ] 속에 묶어 두었습니다. (취소선을 하고 싶었는데 여긴 안되네요) 본능 대신에 습관이라고 표현해 봅니다. 오래동안 학습되고 사회화되고 의식화된 습관이 아니었을까.. 현재로선 그렇습니다. 더 적확한 표현을 찾아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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