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A국에서 일어난 일이다. 횡단보도와 신호등이 있는 나라였지만 그 나라 사람들은 엄한 차도 위를 걸어다녔다. 차들은 차도 위의 사람들을 전부 피해 다니면서도 속도 하나 줄지 않았다. 패미콤 화면 같은 풍경. 그런 풍경 속에서 정신없이 걸어 다니다보니 금새 출출해졌다.
우리의 점심은 빅맥이었다. 그 곳엔 미국의 것보다 훨씬 크고 근사한 맥도날드가 있었다. 곡선으로 휘어진 M자와 그 노란색 간판을 받치는 기둥이 너무 거대해서 사뭇 웅장한 분위기마저 풍기는 맥도날드였다. 들어가보니 조명도 테이블도 의자도 꽤 서구적인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음식을 주문하고 앉는데, 웬 깡마른 남자가 절뚝거리며 우리에게 왔다. 오른쪽 다리가 부러진 것처럼 보였다. 그는 뼈만 남은 앙상한 몰골에 허수아비 같은 통바지를 입고 하반신을 바닥에 끌다시피 걸었다. 병원비가 없는데 밥도 몇일씩 굶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테이블들을 돌며 자존심을 걸고 동냥했지만, 그 곳 사람들에게 완벽히 투명인간 취급 당했다. 그의 존재는 마치 거대한 맥도날드에 어울리지 않는 바퀴벌레 같은 것이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외지인처럼 보이는 우리에게 와서 두 손을 비는 것이었다. 100원이라도 괜찮으니 도와달라는 시늉이다. 우리가 어쩔 줄 몰라하자. 그는 금방 고개를 떨구고 무거운 몸뚱이를 들어 자리를 비켰다.
떠나려는 그에게 조용히 다가가 한국 돈으로 만원, 그 나라의 돈으로는 사흘치 밥값에 해당되는 것을 그의 목에 걸려있던 가방에 넣어주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내 손을 쳐내며 가방을 감쌌다. 내가 자신의 가방을 훔치려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나는 손가락으로 방금 넣어준 만원을 가르켜주었다.
그러자 그는 갑자기 바른 자세로 일어섰다. 그리곤 가방을 안고 굉장히 빠른 속도로 뛰어 밖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전혀 아픈 사람이 아니었다. 달리는 폼을 보니 건강한 수준이 아니라 아예 우사인 볼트였다.
우리는 벙찐 표정으로 넋놓고 멀어져가는 그를 바라보았다. 맥도날드의 창 밖으로 거대한 노란 간판. 그 아래 쓰여진 문구. I'm lovin it 이란 글자 보다 작아져 눈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앙상한 아저씨는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나중에 듣게 되었다. 이 나라의 걸인들은 원래 식당 테이블마다 구걸하며 돌아다닌다고 한다. 사실 보이는 것처럼 몸이 아픈 사람들이 아니라고 한다. 가족도 있는 사람들이라고. 아픈척, 불쌍한 척 연기하는 것 뿐이라고. 그걸 아는 내국인들에게 이들은 투명인간 취급, 벌레 취급을 받고 비난을 산다고 한다. 그래서 이 걸인들의 타겟은 주로 외지인들이라고..
글쎄. 아프지 않은데 아픈 척 과장했다고 해서 가난하지 않은 걸까. 그도 집에서는. 하나 뿐인 딸에게는.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똑똑하고 힘도 세."하고 건강하게 허세도 부렸을 것이다. 그러곤 밖에 나가서는 바닥을 기는 척 하며 100원짜리 연민을 구걸한다. 운이 좋으면 이틀 밥 먹을 돈을 벌어 가족과 함께 하기 위해서. 그들을 버러지라 욕하는 우리는 과연 얼마나 더 숭고할까. 승진하고 윗사람에게는 잘 보이기 위해서 상사 발가락 냄새 맡으며 온갖 호박씨 까면서 나보다 약해보이는 것들엔 무차별 화살을 겨냥하는 우리의 이중성과, 푼돈 벌려고 안 아픈데 아픈척 하는 걸인의 위선 중에 누가 더 거짓된 것일까?
사라진 만원은 아깝지 않았다. 그보다 기분 나빴던 것은 만원을 받고 달려나가는 그 아저씨의 표정이었다. 대박을 얻어 신나는 표정도 아니었다. 호갱을 만나 통쾌한 표정도 아니었다. 뭔가 엄청난 죄책감과 그것을 숨기고 싶어 어두워지는 표정이었다. 방에서 자위하다가 들킨 아들 같은 표정이었다.
나는 그때 우사인 볼트처럼 달려가는 그 아저씨를 붙잡았어야 했다. 마라톤 선수 아베베 비킬라처럼 안간힘을 써서 끝까지 달려 그를 붙잡았어야했다. 이유는 없다. 그에게 무언가 말해주지 못해서 불편한 마음이 아직까지 남아있다.
하지만 그를 붙잡았다면 내가 뭘해야 했을까.
그를 붙잡고 술집으로 데려가 함께 취해야 했을까 "삼촌, 삼촌이 가난한 척하면서 돈 벌어야하는거 그거 부끄러운거 아니야. 돈이 좆같은거지. 안 그래? 망할 부자놈들이 문제라고. 왜 고개 숙이고 그래? 응? 삼촌, 한 잔 더 해!"
아니면, 교회에 데려가야 했을까
"사랑하는 형제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이 어떠하든 당신을 사랑하셔요. 이제는 자책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품으로 나오세요." 라고 했어야 했을까.
모르겠다. 죄책감으로 얼룩져있던 그 아저씨의 표정이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만원을 소중하게 품고 멀리 달려 사라져가는 그의 귀에 들리게, 내 속이 후련하게 크게 외쳐주고 싶다. 그렇게 뛰지 않으셔도 된다고. 뭐 잘못하신거 있으시냐고.
가방에 대해 포스팅해주셨네요. 지나가다 들려봅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