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은 스크롤을 내려주세요)
1 . 장르 이해의 확장
오컬트 영화의 상당수는 귀신 들린 사람에 의한 괴기한 장면을 연출하고, 언제 어떤 식으로 터질지 모르는 이상 현상으로 관객의 시선을 붙잡습니다. 여기서 귀신은 명백히 '악한 존재' 혹은 '세계를 위협하는 절대악'으로 상정돼요. 이야기는 대개 신부 혹은 악령퇴치 활동가가 귀신을 쫒아내는 것으로 끝납니다. <검은 사제들>도 그런 영화였죠.
<사바하> 역시 비슷한 전개를 갖추고 있는 것처럼 시작합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탯줄이 없어 주인공의 무릎살을 베어먹고 태어난 쌍둥이 '그것'은 사람이 아닌 무엇. 귀신입니다. '그것'이 태어난 해에 부모가 사망합니다. 염소가 울어대고, 소들이 미친듯이 죽어나가는 이상현상이 일어납니다.
<검은사제들>처럼 악령과 싸우고 악령을 퇴치하는 영화를 기대하신 분이라면 실망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정통 엑소시즘의 문법으로 출발해서 이 모든 설정을 비틀어 버립니다. 그 핵심은 한국적 장르 이해의 확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뱀 그리고 선과 악의 개념
목사의 시선으로 불교계의 사건을 조명하게 되는 설정은, 서구적 세계관에 익숙한 관객이 동양적 세계관의 영화로 들어가게 되는 눈높이와 일치합니다.
'그것'이 서구 엑소시즘적 절대악의 존재가 아니라는 설정을 위해 영화는 선과 악의 개념을 계속 되짚어줍니다. 불교의 사천왕은 본래는 악신이었지만, 부처를 만나 불법에 귀의해 악귀를 잡는 보살이 되었다고 말입니다. 악한 존재도 선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뱀의 이미지를 사용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기독교적 세계관이 바탕이 된 서구사회에서 뱀은 줄곧 유혹, 악, 사탄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불교의 세계관에서 뱀은 사탄이 아니라 미륵을 수호하는 존재입니다. 인도 설화에서 뱀은 석가모니가 수행할때 폭염을 막아주고, 폭우가 쏟아지자 석가모니를 덮어 지켜줍니다. (정나한이 '그것'에게 다가갈때 뱀이 하악질 하면서 '그것'을 지키려 드는 것은 '그것'이 사탄이 아니라 신적인 존재임을 암시하는 겁니다)
"선과 악을 나누는건 기독교의 이분법적 사고"라는 해안스님의 말은 이점을 더 확실히 합니다. 불교에서 악이란 인간의 욕망과 집착을 형상화한 것에 불과하다. 선과 악은 상태이지. 본래부터 선한 존재와 악한 존재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악을 구별하려는 자들이 도리어 악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불해서 미륵이 된 김제석은 자신이 죽을거란 예언을 피하기 위해 소년범들을 데려가서 여자아이들을 죽이도록 훈련시킵니다. 그렇게 키워진 정나한이 이금화를 죽이려 들때 "당신은 악하게 태어났기 때문에" 죽는 것이라고 이야기하죠. 선악을 구분 짓는 것의 폭력입니다.
착한 존재와 나쁜 존재를 구분 짓는 서구적 세계관은 유색 인종, 개발되지 않은 국가들을 악으로 규정하고, 제거되거나 교화시켜 다스려야할 것으로 삼았던 역사가 있습니다. 질서의 폭력성이라고 할 수 있어요.
영화의 내용은 아니지만, 반대로 악을 상정하지 않는다는 진리관 역시 폭력적일 수 있습니다. 모스님이 가정폭력 고충을 얘기한 여성에게 "번뇌로부터 벗어나십시오" 등의 충고를 해주는 것, 실존하는 고통을 악이 아니라 마음의 차이로 간단히 규정해버리는 것 역시 질서의 폭력성이라고 할 수 있어요.
박웅재 목사는 실존하는 고통, 악에 대해 질문하고 신을 의심하는 캐릭터입니다. 선교를 갔다가 자신을 제외한 일가족이 피살 당했다는 신학교 동기의 이야기는 사실 박목사 본인의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땅바닥에서 개미떼 같이 지지고 볶고 사는데 하늘에 있다는 신은 뭘하는거지?" 신을 의심하는 그는 가짜 이단을 잡는 일을 하고 있지만, 내심 '진짜'를 만나서 따져보고 싶어합니다.
3 . 의심이 실현하는 사바하
'사바하'라는 말은 '그렇게 이루어 주소서'라는 의미로 기독교의 '아멘'과 비슷한 역할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사바하가 실현되는 계기는 초월자의 전능성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의심입니다.
박목사는 불사의 몸과 여섯 손가락을 가졌다는 진짜 신을 찾아 발로 뛰어다닌 끝에 마침내 미륵이 된 김제석을 마주쳤지만, 진짜 신은 사람 좋게 미소 짓는 김제석(유지태 역)이 아니라, 창고에서 불길하게 울고 있던 '그것'입니다.
'그것'은 신이자, 예수를 상징하는 캐릭터입니다. 김제석이 티벳 고승의 예언을 피하기 위해 영월 출신 여자 아이들을 모두 죽이려한 것은, 동방박사의 소식을 듣고 예수를 죽이기 위해 베들레헴 아기들을 모조리 살해했던 헤롯왕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입니다. 작중 배경이 성탄절인 것을 감안했을 때, '그것'이 머무는 개들이 갇혀 있던 창고는 예수가 태어난 마굿간을 의미한다는 점을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정나한(박정민 역)이 '그것'에게 정체를 묻자, '그것'은 스스로를 '울고 있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피 흘릴 때 울고 있던 존재니라"고 말합니다. 성서에는 예수가 웃었다는 기록은 없고. 울었다는 기록 밖에 없습니다.
'그것'의 모습은 "신이 어디 계시느냐"는 박웅재 목사의 질문에 대한 영화적 대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땅바닥에서 개미떼 같이 지지고 볶고 사는데 하늘에 있다는 신이 뭘하는건지"에 대한 대답입니다. '그것'은 신적인 존재지만 하늘 높은 곳이 아니라 소외된 곳에 있고, 인간들마저 외면하는 세상의 고통에 끊임없이 울부짖는 존재입니다. 자신의 전능함으로 세상의 질서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명을 버림으로 세상을 구하는 존재입니다.
'그것'은 정나한에게 그가 속한 세상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자신의 양 아버지가 진짜 미륵인지 확인하라고 합니다. 나아가 여섯개의 손가락을 가진 미륵 김제석이 뱀이라고 말합니다. 의심은 그동안 믿음으로 여자 아이들을 죽여왔던 정나한을 영화적 주제이기도 한 진리로 이끕니다. 날때부터 악한 존재로 태어나서 제거돼야 하는 존재는 없다. 성불한 미륵이라도 타락하여 악해진다. "선한 존재와 악한 존재는 정해진 것이 아니다"는 진리로 정나한을 끌어들입니다.
<곡성>이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하면서도 나약한 무기로서의 의심(그럼에도 현혹될 수 밖에 없는 의심)을 보여주었다면, <사바하>는 신의 뜻이 이루어지게 만드는 의심을 보여줍니다.
물론 여기서 의심은 타인을 추궁하는 마피아 게임의 의심도, 나의 주체성을 깨닫는 데카르트적인 의심도 아닙니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의 의심입니다. 신이 계시다고? 그럼 왜 아픈 사람들이 있는거지? 신이 있는데 왜 밥을 굶는 사람이 있는거지? 하늘 높은 곳이 아니라 소외된 곳에 머무는 신은 그런 의심들을 환영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의심으로 초대합니다.
작중 박웅재 목사는 '그것'(신, 예수)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이여 어디 계시나이까"라는 성서 시편의 탄식시를 읊조리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납니다. 박목사는 신을 만나지 못했고, 아마 계속 의심할겁니다. 사람들은 의심치 말고 믿어야 사바하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신을 의심하기에 신의 뜻을 듣기만 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 것. 그것이 사바하를 실현해가는 신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