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장님 소설가

2만권의 책 읽기와 유전, 불의의 사고가 겹쳐 시력을 상실했으나 죽을때까지 독서와 쓰기를 멈추지 않은 전설의 소설가 보르헤스. 그는 훗날 포스트모던의 아버지로 불리게 된다. 한때 현존하는 지구인 중(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가장 똑똑한 사람이자 <장미의 이름>, <푸코의 진자> 등을 쓴 베스트셀러 작가이기까지 한 움베르토 에코는, 포스트모던이란 사실상 보르헤스의 작품을 해석하면서 얻은 부산물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디스 이즈 보르헤스. 더 레전드!

문학과 대중 문화의 화합

포스트모던 문학의 주요 창작 특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예술과 대중 문화의 혼합이다. <불한당들의 세계사>에서 보르헤스는 갱스터, 서부 영화의 장르적 특징을 적극적으로 차용한다. 여기서 우리는 대중 문화의 에술의 혼합이, 그러니까 고급+고급도 아닌 고급과 저급의 합체가 왜 근대의 대안, 즉 포스트모던이 될 수 있는지 의문을 품을 수 있다.

보르헤스는 그 어떤 소설가보다도 서사의 힘을 믿었던 것 같다. 그는 한 대담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작가들이 시 또는 문학의 가장 오래된 형태가 서사라는 것을 잊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다. 할리우드는 서부 영화를 가지고 세계의 서사성을 살려놓았다.

보르헤스에 의하면 문학의 본질은 서사다. 그러나 서사는 반복적이며 자기모방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야기들은 점점 더 비슷해진다. 새로움의 한계에 부딪히는 것이다. 몇몇 똑똑한 작가들은 이제 서사로는 승부가 될 수 없음을 깨닫고 형식에 눈을 돌린다. 회화가 해바라기를 어떤 식으로 그리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예술을 만들어내듯 서사도 형식을 취해 서로 다르고, 복잡하고, 정교한, 그리하여 소설가라는 전문적 직업을 가진 사람만이 감당할 수 있는 소설 예술이 탄생한다. 소설 예술은 끝내주게 아름답지만 그것은 알맹이가(이야기) 빠진 모델하우스 같다. 보르헤스는 이 지점에서 여전히 서사의 힘을 간직하고 있는 영화, 대중 소설에 눈을 돌린다.

중세를 대체한 르네상스는 역사상 한 번도 제시된 적 없는 미학적 관점을 창조한 게 아니었다. 르네상스는 슬로건은 단순했다. 바로 과거로의 회귀, 이른바 '고대의 부활'. 마찬가지로 보르헤스의 작업은 문학의 본질로 되돌아가기 위한 노력이었다. 이야기를 버리고 형식을 취한 모던은 더 이상 순수하지 않다. 따라서 이야기를 되찾는 것, 그것이야 말로 모던을 넘어서는 길인 것이다.

가로되,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불한당들의 세계사>를 특징 짓는 또 하나의 포스트모던 징후는 바로 상호텍스트성이다. 상호텍스트성이란 쉽게 말해 기존에 존재하는 작품을 '다시 쓰는' 것이며 좀 더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베껴 쓰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집에 수록된 모든 소설은 '장밋빛 모퉁이의 남자'를 제외하고는 이미 존재하는 책을 다시 쓴 소설이다. 보르헤스는 이런 사실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으며 책의 말미에 원전을 써주기까지 한다.

상호텍스트성은 '태양 아래 새로운 건 있을 수 없다'는 창작 행위의 본질적 회의를 쿨하게 인정하는 태도다. 이제 작가는 새로운 작품을 창조해냈다는 영광과 권력을 반납하고 편집자의 위치로 내려온다. 작가의 창조 능력을 신성시하는 사람이라면 상호텍스트성은 심한 모욕으로, 나아가 파렴치한 사기로 보일테지만 나에겐 이것이 문학의 새 지평을 여는 중요한 열쇠로 보인다.

상호텍스트성 안에서 개개의 작품은 더이상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모든 문학 작품은 그저 다른 작품의 그림자일 뿐이며 작가는 이 절대적 평등 속에서 원하는 것을 취사 선택, 그저 황홀한 그림자 놀이에 동참하면 그만인 것이다. 새로운 것에 대한 강박, 변화에 대한 강요는 무너지고 그 위에서 놀이로써의 문학이 가능성을 싹틔운다. 이제 창작은 마치 레고를 쌓고 허물기를 반복하는 아이들의 놀이를 닮아간다.

기타 등등

보르헤스의 명성을 듣고 <불한당들의 세계사>를 첫 책으로 선택한 사람은 뭔가 아쉬움을 느낄 수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소설집은 보르헤스 전형적 특징이 불완전하게 제시되기 때문이다. 상호텍스트성은 이제 막 뿌리를 내린 새싹처럼 가냘프고 대중 소설의 장르적 특성은 어두운 지평선 위로 간신히 고개를 내민 여명처럼 희미하다. <불한당들의 세계사>에는 이 모든 것들이 아직 씨앗인채로 잠복해 있다.

그러나 서사의 유희를 발견한 사람에게 보르헤스는 필연이다.어차피 그리 되어질 것이라면,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이라면, 각 작품집의 호불호가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무엇으로 시작했든 당신은 결국 보르헤스를 완독할텐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