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이 리브라 백서를 공개했다. 전 세계 시가총액 10위 안에 드는 기업이 블록체인 프로젝트를 시작한다는 것 만으로도 굉장한 이슈거리지만 페이스북이기에 그 의미는 더욱 중요하다. 전 세계에 수십억 명의 사용자가 있고, 그 사람들을 이어주는 강력한 SNS와 메신저도 가지고 있다. 페이스북의 사용자들이 (물론 자회사인 인스타그램 등까지 포함될 수도 있다) 리브라를 주고받기 시작한다면 이전에는 관계와 정보를 공유하는 플랫폼이었던 것들이 리브라를 통해 가치의 전달과 창출까지도 포괄하는 플랫폼으로 진화할 것이다.
하지만 페이스북의 진짜 목표는 단순한 플랫폼이 아닌 것 같다. 리브라라는 이름에서부터 그 속내가 드러난다. 혹자는 Libra의 뜻은 liberty와 같은 어원을 가진 자유라고도 한다. 전 세계 사람들의 금융의 자유를 높여주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해석이다. 백서에 나와있는 비전을 보면 타당한 해석인 것 같다. 백서 초반부터 금융 서비스에서 제외된 사람들을 위해 리브라가 나왔다는 선언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대부분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다. 알고 보면 libra는 화폐의 단위라는 것이다.
파운드를 써본 사람들은 한번씩은 의문을 품었을 것이다. 왜 영국 파운드화는 £로 표시하는지, 파운드 단위는 왜 lbs라고 표시하는지 말이다. 이 때 등장하는 L이 바로 libra의 L이다. 리브라는 고대 로마시대 때 사용되는 무게 단위로 로마 파운드라고도 불린다. 이 단위는 후에 중세시대 화폐단위의 기준점이 되고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상업도시들이 화폐를 발행할 때까지도 사용되었다. 그리고 그 흔적이 지금 L로 남아있는 것이다.
페이스북의 리브라는 토큰 종류로 따진다면 실제 화폐나 자산으로 뒷받침되는 스테이블 코인이다. 하지만 백서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여기이다.
It is important to highlight that this means one Libra will not always be able to convert into the same amount of a given local currency (i.e., Libra is not a “peg” to a single currency). Rather, as the value of the underlying assets moves, the value of one Libra in any local currency may fluctuate. However, the reserve assets are being chosen to minimize volatility, so holders of Libra can trust the currency’s ability to preserve value over time.
리브라는 특정 국가 화폐나 자산과 1:1로 연동되기보다는 IMF의 특별인출권(SDR)과 같이 여러 화폐나 자산이 혼합된 인덱스와 연동된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SDR 구성비 출처: IMF
재밌는건 페이스북의 리브라가 어떤 자산과 어떤 비율로 연동될 것인지 정해놓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 행간에 숨어있는 의미는 자산 구성비를 환경에 맞게 바꿔갈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SDR도 최초에는 금 0.888671g과 연동되었다가 지금의 구성비로 바뀌었다고 하니 둘의 속성이 매우 비슷하다 할 수 있다. 여러 화폐와 자산을 조합하며 페이스북이 목표로 하는 것은 리브라의 가치가 떨어지지 않도록 지지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페이스북이, 그리고 리브라 협회가 얻게 될 힘은 무엇일까? 바로 간접적인 화폐 발권력이다. 즉, 직접 화폐를 발행하지는 않지만 다른 국가나 특정 자산의 가치를 활용해서 리브라라는 화폐를 주조해낼 수 있는 능력이다.
아마 페이스북이 아니었다면 이러한 방식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냥 얌전히 평범한 스테이블 코인이나 만들라는 비판을 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페이스북이 하고 있다면 이 방식은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인터넷 사회에서 페이스북은 독점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다. 디지털 공간에서 사람들은 페이스북을 통해 소통하곤 한다. 고대 도시국가에서 공론장과 같은 역할을 페이스북이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페이스북과 예전 도시국가를 비교하면 한 가지 차이점이 존재한다. 바로 화폐이다. 아무리 디지털 공간에서 독점적인 페이스북이라도 경제에 있어서는 미국경제와 달러화에 종속된 하나의 기업일 뿐이다. 하지만 리브라를 통해 페이스북은 화폐에서도 독립하며 새로운 디지털 도시국가로 변모하고자 하려는 듯하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리브라 협회가 쟁쟁한 기업들의 참여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 기업 역시 국가의 경제적 제약으로부터 벗어나고자 고민하고 있던 터라면 리브라에 참여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다국적 기업들이 모여 이제는 다기업 국가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페이스북의 큰 그림은 아마 리브라 토큰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리브라 블록체인 위에 여러 가지 토큰이 올라갈 가능성이 있는데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빅맥이나 파이크 커피 같은 재화 기반 스테이블 코인이다. 이것들이 리브라로 거래된다면 전 세계 어디에서나 리브라를 통해 재화를 구매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아예 리브라 지갑을 탑재한 스마트폰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오프라인에서도 편리하게 리브라를 쓰도록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리브라는 더이상 단순한 서비스가 아니라 일종의 시민권이 될 것이다. 페이스북이 만든 리브라라는 도시국가의 시민권. 그 대상은 전 세계 사람들을 향하고 있다. 어쩌면 제3세계의 몇몇 나라 사람들은 자국의 화폐를 포기하고 리브라를 사용하게 될 수도 있다. 리브라 백서는 "empowers billions of people"로 시작한다. 그러나 아마 아직 쓰이지 않은 그 마지막은 "liberates Facebook from states"로 끝나게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