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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부의 ‘투명한’ 관리 가능”
블록체인을 주목받게 했던, 그리고 여전히 강조되고 있는 핵심 아이디어 중 하나입니다. 보통 ‘장부’라는 표현이 쓰이긴 하지만, 생각해보면 투명하게 관리될 필요가 있는 ‘모든 종류의 기록’에 적용할 수 있을 겁니다. 만약 기록 조작과 관련해 좋지 않은 경험을 하신 분이 있다면, 한층 달콤하게 들리지 않았을까 싶네요.
물론, 맹점은 있습니다. 블록체인의 변경 불가능성은 ‘이미 입력된 내용’을 고치거나 삭제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데이터의 입력(input)을 통제할 수 있는 건 아니기에, 애초에 조작된 데이터가 들어가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죠. 데이터 입력의 투명성은 따로 대안을 마련해야겠지만, 일단 정보의 보존 측면에서는 블록체인이 확실한 기여를 할 수 있을 겁니다.
블록체인의 변경 불가능성은 꼭 산업이 아니라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2018년 4월, 이더리움 네트워크에 트랜잭션 인풋 데이터 옵션을 이용해 중국 북경대학교에서 있었던 성폭행 사건이 기록된 적이 있었죠. 덕분에 해당 사건은 전세계 사람들에게 공개됐고, 누구도 마음대로 지울 수 없게 됐습니다.
다른 한 예로, “선출직 공직자의 언행과 행적 등을 블록체인에 기록해야 한다”라는 의견을 본 적이 있는데요. 뉴스를 통해 정치인이나 고위공직자의 막말이 구설수에 오르는 걸 종종 볼 수 있는 시대라 그런지… 참으로 귀가 솔깃해지는 이야기였습니다. 대기업 총수나 기타 유명인 등 공적인 포지션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마찬가지로 적용해볼 수 있겠네요.
▲ 말 필터링 스킬(?)이 부족하신 분들에게는 특히 위험할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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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빛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그림자가 생겨나는 법이죠. 프라이빗이 아닌 이상, 블록체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공간입니다. 하지만, 여기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과연 ‘책임감 있는 기록’을 할까요? 아닐 겁니다. 아무리 낙관적으로 보려 해도 그건 불가능한 일이죠.
부적절한 내용에 대한 필터링을 보장할 수 없는 환경. ‘한 번 기록된 내용은 지울 수 없다’는 특성. 두 가지 조건 하에서 부작용이나 악용 사례가 생길 거라는 예상을 하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현대의 사람들은 인터넷 기반의 서비스를 이용하는 데 무척 익숙합니다. 검증되지 않은 내용이나 누군가에게 민감할 수도 있는 내용을 보는 일도 흔하죠. 만약 블록체인에서 이러한 일이 일어나면 어떨까요? 글자 그대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겠죠.
물론, 사후 조치할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 다만 블록체인에서의 수정은 원래 내용을 없애는 것이 아닌, 수정사항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말에 비유하자면 “아, 방금 했던 말은 취소.”라든가 “그 말은 이렇게 정정하겠습니다.”와 같은 거죠. (흠… 이렇게 보니 ‘삭제 불가능성’이라고 불러야 더 정확한 게 아닌가 싶지만… 지금으로서는 핵심이 아니니 미뤄두도록 하겠습니다.)
한 번 내뱉은 말을 주워담을 수 없는 것처럼, ‘한 번 내놓은 글도 주워담을 수 없는’ 오픈 네트워크. 그 공간은 과연 깨끗해질까요? 아니면 더 혼란스러워질까요? 쉽게 답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 취소한다고 해서 이미 들은 말이 없던 것이 되지는 않는 법.
출처 : <원피스> 애니메이션
잊힐 권리(Right to be forgotten)에 대해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잊힐 권리의 핵심은 ‘내 자신이 무심코 올린 글’ 또는 ‘타인이 나에 대해 올린 글’을 언제든 지울 수 있어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도 변경 불가능성과는 공존하기 어려워보이는 개념이죠.
잊힐 권리는 몇 년 전까지 꽤 핫했던 키워드였습니다. 지금은 다소 뜸해졌습니다만, 2014년 잊힐 권리를 인정한 유럽 사법 재판소의 판례가 존재하는 한 앞으로도 쟁점이 될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향후 일반인들도 블록체인 네트워크를 자연스레 활용하는 시대가 온다면, 단순한 게시물 작성 행위가 자기 자신, 혹은 다른 사람의 잊힐 권리와 충돌할 수 있다는 점을 꼭 기억해야 할 겁니다.
▲ '트인망'과 함께 거론되는 레전드급 짤방이라죠?
가히 딜레마(Dilemma)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변경 불가능성은 탈중앙성과 더불어 블록체인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존 시스템에 대한 대안으로 자리잡으려는 이상, 포기할 수도 없고 포기해서도 안 되는 특성이죠. 하지만 잊힐 권리와 변경 불가능성이 맞부딪친다면… 어느 쪽이 불리할지는 뻔해 보입니다. 블록체인에 기록된 무언가로 인해 누군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주홍글씨’를 안게 된다면… 누가 그 책임을 져야할지도 한 번쯤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개인의 잊힐 권리와 공익을 위한 투명성. 이 두 가지 사이에 절충안이 필요하게 될 겁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뾰족한 솔루션을 내놓기도, 심지어 방향을 제안하기도 쉽지 않군요. 지금도 블록체인은 해결해야 할 현실적인 이슈가 많습니다. 적잖이 열띤 논쟁을 만들어낼 것 같은 난제까지 얹어주기엔, 솔직히 면목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걸 알면서도 왜 굳이 이야기를 하느냐… 라고 하신다면, 언제가 됐건 반드시 짚고 가야 할 문제라는 건 변하지 않기 때문이라 답하겠습니다. 당면한 문제들이 해결되고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기 시작하면, 언제나 그렇듯 기술의 발전 속도는 엄청날 겁니다.
너무 빠르게 달리는 바람에 ‘인간의 문제’가 얼렁뚱땅 넘어가는 일이 없도록, 미리 포석을 하나 놔두는 셈이라 해두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