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6시.
해도 뜨지 않은 겨울의 새벽.
눈은 어김없이 떠졌다. 시야 가득 담긴 분홍빛 천장에 잠시 이 곳이 어딘지 가늠하지 못한다.
이 곳이 어디인가. 익숙한 천장은 노란 얼룩이 가득해야 했다.
‘아아.’
이내 손녀의 방에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다리가 아파 한평생 지어오던 농사를 쉬고 아들을 따라 도시로 온 게 어제인데 그걸 그새 잊었다. 나날이 무언가를 잊는 건 빠르고 알아차리는 건 더디다.
바닥에서 몸을 일으켜 앉아 옆에 두었던 가방을 뒤적인다. 늘 가지고 다니는 묵주를 꺼내어 기도를 시작한다.
‘오늘도 우리 막내 아들 사고 없이 운전하게 하시고. 우리 자손들 모두 건강하게 해주시고...’
창을 바라보며 하느님에게 자손의 건강과 안녕을 기도한다. 오랜 기도를 끝마치자 커튼 사이 동이 트는 것이 보인다. 시계가 이제 막 반을 넘어 가고 있다.
다시 자리에 누워보지만 한참을 뒤척이다 결국 이부자리를 정리한다.
‘아직 날도 추운데 반팔이라니 젊네. 젊어.’
아직 침대 위 잔잔한 숨소리를 내며 자는 손녀의 얼굴을 바라본다. 덥다고 투정하는 손녀이지만 이불을 다시 덮어주고 방을 나온다.
화장실에 들어가 얼굴과 손을 씻는다. 손 주름을 손으로 피며 손을 씻는다. 주름이 펴도 펴도 다시 돌아온다.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얼굴의 물기를 훔치고 손을 뻗어 화장실 찬장을 열었다. 대부분이 비어있는 찬장에 얼마 남지 않은 수건이 놓여있었다.
‘요새 다들 바쁘다더니. 수건도 없네.’
거실에 나오자 아들이 방에서 나온다. 벌써 출근 시간인가보다.
“벌써 일어나셨어요? 잠도 없으셔라.”
“잠이 안와서.”
“와. 부럽다. 나는 한 시간만 더 자고 싶은데. 원 없이 자고 싶다.”
연신하품을 하며 아들은 양말에 발을 꿴다.
“뭐라도 먹고 출근해야지. 우유라도 한 잔 먹고 가. 내가 가져다주마.”
“됐어요. 원래 아침에 아무것도 안 먹어요.”
“그래도 뭐라도 먹고 가야지.”
“배 안 고파요. 저 다녀올게요. 심심하시면 티비라도 보고 계세요.”
주방으로 가려던 나를 말리며 쇼파에 앉힌다. 두 손에 리모컨을 쥐어주고는 나간다. 두 손에 쥐어진 리모컨의 수많은 버튼에 그저 가만히 손에 쥐고 티비에 다가간다.
뭔 놈의 티비가 화면은 큰데 버튼이 안 보인다. 시골집의 뚱땡이는 화면 아래 크게 있는데.
이리저리 둘러보다 옆면의 버튼을 찾아냈지만 한 평생 밭일하면 굳은 살 박힌 손끝으로 누르기에는 너무 작다.뭉득한 손끝으로 꾹꾹 눌러대니 결국 티비가 켜졌다. 왠 여자들이 물건을 들고 설명하기 바빴다. 또 다시 이것 저것 누르다 꺼질까봐 그냥 앉아서 봤다.
어멈이 11시가 다 되어서야 일어났다.
“어머니 뭐 하세요?”
하필 내가 보다보다 리모컨으로 채널을 바꿔보려 시도하다 실패해 소리만 커지고 화면은 이상한 글자만 떠다닐 때 나왔다.
“뭘 잘못 누르셨나보네. 이건 이 빨간 버튼 누르면 돼요. 뭐 보고 싶은 거 있으세요?”
“아니. 그냥 아무거나.”
“뉴스 보실래요?”
뉴스를 틀어놓고 어멈은 주방에 들어갔다. 주방에 따라 들어가 내가 어제 가져온 반찬통을 꺼냈다.
“어머님. 제가 금방 차려드릴게요. 가서 앉아계세요.”
반찬통 네 개를 한꺼번에 들고 나르는데 어멈이 나에게서 반찬통을 빼앗았다. 완곡한 만류인 것 정도는 알았다.
다시 쇼파에 앉았다. 소리가 작아 잘 들리지 않았지만 귀찮게 하기 싫어 그냥 있었다. 대신 화면에 나오는 자막을 읽었다.
“어머님 식사하시고 좀 있다 주은이 일어나면 먹게 덮어만 두세요.”
“너는 안 먹고 나가니?”
“저는 일어난지 얼마 안돼서 배 안 고파요.”
“그래도 챙겨먹어야지...”
“어머님 제가 얼른 나가봐야해서. 뭐 필요한 거 있음 주은이 시키세요. 아참 나가실 때는 꼭 주은이랑 같이 가셔야해요. 다녀올게요.”
어멈이 헐레벌떡 나갔다. 창밖으로 어멈이 아파트 단지를 가로질러 뛰어가는 걸 바라봤다.
한 평생 시골에 살아서 그런지 높이에서 바라보는 사람이 생소했다. 무엇보다 모든 게 빠르게 지나다니는 도시가 생소했다. 새까만 시멘트 위 저 무서운 차들을 요리조리 피해 잘도 달려갔다. 그래도 달려가는 모습이 불안해 사라질 때까지 바라봤다.
어멈이 퍼놓은 밥을 다시 밥통에 넣고 다시 쇼파에 앉아 자막을 읽었다.
해가 중천을 넘어가도 손녀는 일어나지 않았다. 방학이라고 해도 너무했다. 결국, 손녀를 깨웠다.
“주은아, 그만 일어나라. 주은아..”
비몽 사몽한 손녀는 등을 돌리며 웅얼거렸다. 뭐라는 지 들리지 않았다.
“그만 일어나봐. 주은아. 밥 먹어야지.”
“아후, 할머니. 그냥 좀 더 자게 둬!”
손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쩔 수 없이 다시 나와 쇼파에 앉았다. 뉴스는 끝나고 노래하는 방송이 나왔다. 희미하게 노래 소리가 들렸다. 노래 자막을 보며 희미한 노래 소리를 따라 불렀다.
손녀는 얼마 있지 않아 일어나 쭈뼛쭈뼛 내 옆에 앉았다.
“할머니 소리 질러서 미안해. 내가 다시는 안 그럴게.”
“해가 중천인데 일어나서 움직일 생각은 안하고 할머니한테 버럭버럭 소리나 지르고.”
“방학이라 오랜만에 늦잠 자는 거라 그랬어. 어제 너무 늦게 자기도 했고 분명 얼마 안 잔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시간이 빠르지?”
옆에 붙어 용서를 구하는 손녀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자다 일어나 열이 오른 붉은 얼굴에 머리는 까치집이었다.원래 화난 것도 아니었지만 용서를 구하는 손녀의 머리를 빗어주었다. 그새 씩 웃으며 달라붙었다.
“할머니가 좀만 젊었으면 너처럼 빈둥빈둥 안거리고 여기저기 일하러 다녔을 거야.”
“에이 그거야 할머니가 지금은 잠이 없어서 그렇지. 젊었으면 할머니도 나처럼 늦잠 잤을 걸?”
“할머니는 안 그랬어. 한 평생 부지런히 살았어.”
“젊었을 때도?”
“그래. 할머니는 어렸을 때도 제일 일찍 학교가고 그랬어. 다른 애들보다 일등하려고 하나라도 더 보려고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일도 제일 일찍 일어나서 시작하고 늦게까지 하고.”
“역시 우리 할머니. 그러니까 여전히 똑소리 나시지. 근데 할머니 밥은 먹었어?”
“엄마가 밥 해놨어.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고 했는데 일도 안하고 배는 고프냐?”
“칫. 나 안 그래도 곧 일가거든요?”
“일 가? 그럼 가기 전에 밥 먹어야지. 국 데워줄게.”
“아니야. 지금 안고파서 가서 먹을 거야. 할머니 국 데워줄까? 불 위험하니까 내가 데워줄게.”
일어나려다 다시 주저앉았다.
“아니야. 됐어.”
“그래? 그럼 나는 얼른 씻고 나가봐야겠다.”
손녀는 준비하러 들어가고 또 다시 거실에 덩그러니 남아 티비를 봤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배가 고팠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배가 고팠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데 배가 고팠다.
젊었을 적처럼 하루 한 시간이라도 더 살아보겠다고 일어났지만 아무것도 한 게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늙은이의 시간은 빠르게 달려 하루가 끝나가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인데, 아직 할 수 있는 데 세상이 빠르게 변해버려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내가 고작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이 집에 갇혀 앉아서 티비를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그 티비소리 마저도 노래를 부르며 요란법석하게 준비하는 지 손녀의 노랫소리에 섞여 사라졌다.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건데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이게 살아있는 건가 싶다.
뭐하나 제대로 할 수 없다면 배라도 고프지 말아야 할 것 아닌가.
왜 신은 이렇게 인간을 평생 배고프게 만들었는가.
그럼 적어도 평생 내 밥벌이는 할 수 있게 만들어주실 것이지.
왜이리 늙은이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드시는 건지 참 원망스럽다.
웬 늙은 가수가 나와 노래를 시작했다. 아주 오래전 이름을 들어봤던 것 같은 가수이다.
저 가수가 아직도 노래를 하는 구나. 저 늙은 가수는 무슨 노래를 할까.
그 노래가 듣고 싶었다. 멀리 두었던 리모컨을 손에 다시 쥐었다.
스무 개는 족히 넘어 보이는 버튼을 손에 쥐고 요리조리 살피다 아까 잘못 눌렀던 경험을 떠올리며 화살표가 위로 향하는 것을 눌렀다. 꾹꾹 눌렀다. 소리가 점점 커졌다. 이제는 귀에 들렸다. 별것 아닌데 큰일을 해낸 기분이 들었다.
문득 다 떨어졌던 수건이 생각났다.
노래를 들으며 한 쪽에 널어둔지 오래되어 보이는 빨래를 갰다. 차곡차곡 정리해 화장실 앞에 가져갔다.
“오! 마침 수건이 없어서 당황했는데 히히 할머니가 있어서 다행이다.”
고개를 쏙 내민 손녀가 웃으며 말했다.
“알면 잘해 이놈아. 나가기 전에 할머니 데워먹게 가스 불 알려주고 가고.”
나는 여전히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나는 여전히 배고프다. 나는 여전히 살아있다.
'나는 여전히 배고프다.'라는 제목으로 옴니버스 형식의 글을 써볼까합니다. 어쩌면 배고픈 사람들, 어쩌면 일이 고픈 사람들, 어쩌면 관심이 고픈 사람들 등 배고픔이라는 우리의 본능이자 살아있음을 느끼게하는 감정을 주제로 하였습니다.
할머니의 심정이 글로나마 조금 전달되는 기분입니다.. 뭐가 그리 바쁘다고 밥 한 술 안먹고 다들 나가버리는 걸까요, 앉아서 할머니랑 같이 밥 한 술 떠주면 좋을텐데..
그러게요ㅠ 이번 명절은 할머니 뿐 만 아니라 다같이 앉아서 식사하고 많이 얘기 나누는 명절이 되도록 노력하려고요:)
어릴 적 가출해서..ㅎㅎ. 3일을 굶어본 적이 있어요....
정말 남의 집 담을 넘을 뻔 했는데.....어떤 아주머니가
손을 잡고 집에 데려 가셔서 밥을 주셨어요...
살면서 세 번 눈물과 밥을 먹었는데...그 중에 첫 번째죠.
배고픔이란.....채워지면..그 순간엔 지워지만
멍처럼 내 삶 어딘 가에 남아서......계속 더 해져서
살아냄을 필요 이상으로 게걸스럽게 만들기도 하니...
그래서 부모님들이 늘 밥은 꼭 챙겨먹고 다녀라 하시는 거 같아요....살아냄이 게걸스러우면.....
아무리 좋은 옷을 입고 있어도...누추하게 되니까...
망상에 빠져...좋은 글에 댓글로 누를 끼쳤네요....
건필하시길....
누라뇨!! 그럴일이 있나요. 댓글도 읽어주신것도 감사해요.@ystory님도 건필하세요:)
할머니가 젊은 나처럼 속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할머니는 아무것도 모를 것 같고, 자막도 읽을 줄 모를 것 같은데 나와 같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재밌어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맞아요. 저도 @kimssu 님처럼 모를 거라 생각했는데 저의 오해였다는 걸 알았어요. 할머님들 안에 여전히 분홍빛과 꽃을 좋아하는 소녀가 살고 있고 열정 넘치고 뭐든 해낼듯한 젊은이도 있더라고요. 그런 깨달음 끝에 탄생한 글이랍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