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4일의 기록│ 잠깐의 마법

in #kr7 years ago







잠깐의 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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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4일 금요일 오후 세 시의 기록 │ by @chaelinja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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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ke Pupuke, Auckland, New Zealand / ⓒchaelinjane, 2018





푸푸케 호수




 나는 지금 푸푸케 호숫가의 벤치에 앉아 있다. 순대가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는 두두를 위해 집 근처 공장에 가서 순대 870g을 사고, 오늘 세 시간만 운영하는 과일채소트럭에서 좋은 가격에 장을 보고 오는 길이다. 정말이지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오랜만에 마음이 가벼워졌다. 주변 공원을 검색하다가 거대한 푸푸케 호수를 찾아가보기로 결정한 것이다. 날씨는 기가 막히지만 바람이 심하게 분다. 후드를 뒤집어 쓴 덕분에 바닥에 비친 그림자가 꼭 외계에서 온 생명체 같다. 겨울이 다 지난 것 같아도 이럴 땐 계절의 기운을 숨길 수가 없다. 미리 내 마음을 읽었더라면 오리털 패딩을 챙겨왔을 텐데. 바깥으로 삐죽 나온 손가락이 금방이라도 얼어붙을 것 같지만 이 비현실적이고 꿈 같은 장소에서 타이핑을 멈추고 싶지는 않다. 햇볕이 바람보다 더욱 강하게 내리쬐길 바랄뿐이다. 바람을 등지면 햇살도 함께 등져야해서 조금 아쉽다. 추위를 견딜 수 없을 때쯤 차 안으로 들어가야겠다.


 윈드서핑을 즐기러 오는 사람들이 호숫가로 속속 모여든다. 내가 오기 전부터 있던 한 서퍼의 회색빛 푸들은 친숙한 이들이 등장할 때마다 귀를 펄럭이며 기뻐서 왕왕 짖는다. 이렇게 바람이 많이 부는데 저 녀석은 털이 짧아 바람에 날리지도 않는다. 귀와 꼬리만 바람에 펄럭이는 모습이 꽤나 귀엽다. 녀석은 물가로 헤엄쳐 오는 흑조에게 별안간 달려가고, 햇볕 아래 누워 친구들이 윈드 서핑을 즐기는 걸 바라본다. 글을 쓰다가 느낌이 이상해서 앞을 보면 저 녀석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 우리는 몇 초간 눈을 마주치다 누구 하나가 먼저 눈길을 돌리면 제 할 일을 계속 한다.


 이런 풍경에 음악이 빠질 수가 없지. 저장된 노래를 뒤적이다 첫 곡으로 Jay Park의 Yacht를 틀었다. 두두가 또 Jay Park이냐고, 몸서리를 칠 정도로 나는 이 노래를 좋아하고 엄청나게 많이 듣는다. 한국어 버전, 영어 버전, 리믹스 버전, 커버 버전을 주렁주렁 연달아 재생해놓는데 어쩜 이렇게 질리지도 않는지! 그런데 오늘 이곳만큼 이 노래가 어울렸던 적이 없는 것 같다. 노래만 듣고 있어도 이미 푸푸케 호수 위로 요트 한 척을 유유히 몰고 있는 기분이 든다.


 이번 주는 요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이상하게 두두와 부딪히는 일이 자꾸만 생겨났고 또 악몽을 꿔댔으며 '기록자의 사진엽서' 세 번째 편지의 마감일로 정해둔 수요일에는 글을 쓰느라 그야말로 머릿 속이 전쟁터였다. 평소보다 열 배 정도 글이 써지지 않았지만 꾹 참고 우직하게 계속 써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수요일날 예정되어 있던 커피 수업이 선생님의 개인 사정으로 하루 늦춰지지 않았다면 아마 목요일까지도 진을 빼고 있었을 것이다. 목요일은 모니터를 쳐다도 보기 싫었고 커피 수업을 다녀오니 하루가 다 지나 있었다.


 그리고 오늘- 마침내 평온한 시간을 누린다. 하루 쉬고 나니 글이 또 마구 쓰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이미 지나간 일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대해서 쓰고 싶었다. '두리의 모험' 에피소드가 몇 개나 남아 있지만, 역시나 가장 마음에 드는 형태는 그때 그때 바로 써내는 글인 것 같다.






해가 저문 주차장




 오늘 오후의 마법은 끝이 났다. 머리 속에서 지끈거리는 생각과 고민들이 다시 되살아났다. 아빠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고 나서는 한동안 차 안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해답을 얻기 위해 책들에, 작업들에 매달리고 있는 요즘이다. 좋은 공기를 마시며 움직이고 그저 계속 해나갈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볼 생각이다. '걱정'이 아니라 '해결책'을 찾기 위한 고민은 인생에 꼭 필요한 검은 시간이라 믿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도 양팔을 벌리고 온 몸의 감각을 곤두세워 천천히 움직이면 출구로 향하는 벽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 벽이 어디로 이어질지는 모르지만 조금씩 움직이는 것밖에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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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정말 아름 답네욤,,!

ㅎㅎㅎㅎ 푸푸케 호수의 풍경은 정말 아름다웠답니다 :)

리리님은 제가 만난 스팀잇의 최고의 작가분 입니다!
오늘도 잘 봤어요~~~
그 곳에서 맛보는 순대는 어떤 맛일지 궁금해 지네요~~~

케이티님, 이곳 순대는 끝내주게 맛있답니다 ㅎㅎㅎㅎ

으어 너무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ㅠㅠ
그렇지만 힘내서 지금 이 시기도 잘 견뎌볼게요 :))
너무 감사합니다...!!

그림인 줄 알았는데 직접 찍으셨나 보네요 잘 보고 갑니다 ^^

네- 감사합니다! ㅎㅎㅎ

잘보고 갑니다 @chaelinjane

팔로할게요~ 자주뵈요~~

JY님 반가워요! :)

빛내림 숨막히네요.

정말 숨막힐 듯한 빛내림이었어요....! :))

두달만에 들어와서 본 글이 이 글이라 다행입니다 :) 좋은 사진이에요.

으아아 해적님 너무 오랜만이어요... ㅠㅠㅠ
오랜만에 오셨는데 기운이 빠지는 글이라 죄송해요 ㅠㅠ ㅎㅎㅎㅎ
감사합니다 너무 반가워요!! ㅠㅠ

글 반갑습니다. ^

ㅎㅎㅎ 인석님 요새 오프라인 마음 수련을 정말 열심히 하고 있어요 :)
매일매일 숲 산책도 하고, 명상도 하고, 책도 많이 읽고 있답니다,
글을 쓰는 시간은 조금 줄어들었지만 말이에요. :)

무언가 답답함이 그로써 함께 느껴지네요..
시원하게 풀리는 시간이 빨리 오기길~~~

나름시스님, 감사합니다- !!!!!
지금은 오르막길을 힘겹게 올라가는 시기인듯합니다ㅎㅎㅎㅎㅎ
잘 이겨내보겠습니다-!!!! :))

화이팅 입니다저도 힘든 시기라 느껴진듯해요
함께
힘내봐요^^
멀리서 응원 합니다!

ㅎㅎㅎㅎ함께 기운 충전해서 이번주도 잘 보내보아요-!! :))))

저도 응원 듬뿍입니다!!!!!!!!!!!!

리리님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주시구요^^

화이팅

크으-
토랙슈님의 진한 응원은 늘 강렬한 힘을 줍니다ㅎㅎㅎㅎㅎㅎ
정말정말 감사해요...!
이렇게 또 월요일이 시작되었고 여름도 거의 끝나가네요.
이번 주도 힘내자구요!!!!!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