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 by 조남주
1982년부터 2016년까지의 우리나라 조간신문의 요약본을 짧은 시간에 휘리릭 읽은 기분이 든다. [82년생 김지영]은 우리가 태어나던 때의 우리 부모님 이야기이고, 우리가 '국민학교'를 다니던 때의 이야기이고, 우리가 진로를 고민하고 어렵게 취직할 때의 이야기, 그 곳에서 했던 모든 고민들을 김지영씨의 이야기를 빌어 기록한 책이다. 나는 이 책의 리뷰를 쓰기보다 김지영씨의 이야기를 듣고 동감하며 김지영씨에게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싶다.
아들과 딸 - 이미 딸이 셋이나 되어 죄인이 되어있던 엄마가 나를 임신했을 때, 아니 오빠를 임신했을 때 눈치없이 나도 같이 왔다고 한다. 이미 딸부자이던 집에 귀하디 귀한 아들이 태어났다 좋아했는데 알고보니 아들딸 쌍둥이었단다. 나중에 동네 아지매들의 충격적인 증언에 의하면, 딸래미는 이틀동안 엎어놨다고 한다... 알아서 죽으라고.. 그런데도 안죽고 살아났다는. 우리엄마는 어느 여편네가 그런 말도안되는 소리를 지껄이더냐고 노발대발 했지만 단한번도 그 '여편네'를 찾아낼 노력은 하지 않았다.
학창시절- 지금은 '감히' 학생들에게 손도 못대는 시대이지만 내가 초등학생일때부터 심지어 고등학생이 될때까지 선생님은 감히 거역할 수 없는 신적인 존재였다. 큰 잘못도 아닌 일에 손찌검을 해대는 선생들 천지였고, 심지어는 공공연하게 성추행을 하는 늙수그레한 선생도 있었다. 초등학생때 평소에 나를 예뻐하던 선생님이 같은 반이었던 우리보다는 두살이 많은, 유난히 성숙해 보이는 언니의 긴 생머리를 연신 쓰다듬으며 브래지어 끈 있는 부분을 만지작 거리는걸 본 이후 나는 그 선생님이 나를 볼때마다 소름이 끼쳤었다.
고등학교 1학년때인가? 우리반 담임은 변태같다고 소문이 자자했는데 그는 평소 수업할 때 들고다니던 작대기로 여학생 가슴 부분을 쿡쿡 찌르면서 모욕을 주었고, 영어 선생이었던 한 선생은 성격 이상자였는데 기분이 좋고 안좋을 때가 극과 극을 달리던 그의 폭력적인 말과 행동 때문에 나를 비롯한 많은 학우들의 영어시간이 괴로웠었다. 야자시간에 화장실을 갔다는 이유로 폭력을 휘두르는 학주도 있었고(그걸 다 견디고 있었다 그때 우리들은), 이미 세상이 변하고 있었는데도 학교 안 세상은 바깥세상과 격리된것 같기도 했다.
변태들- 바바리맨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우리 때 진짜 많긴 했다. 부산에서 대학을 다닐 때 내가 본 최초의 변태는 자기 중요부위를 손전등으로 비추고 있던 놈이었다. 아마 대학 1-2학년 되었을까? 나는 학교와 집을 걸어서 등하교 했는데 그날은 아마 동아리 활동을 하고 밤늦게 귀가하고 있었던 것 같다. 눈이 안좋아서 렌즈를 착용하거나 안경을 꼈는데 그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집 가까운 데로 진입해 막 골목을 돌았는데 어떤 남자가 손전등을 들고 자기 몸 아래쪽을 비추고 서있었다. 처음엔 인지하지 못하고 물끄러미 보면서 옆으로 스윽 지나치는 찰나에 나는 그놈이 비추고 있는게 뭔지 알아챘다. 너무 충격적이었으나 이미 지나친 뒤라 소스라치게 놀랄 새도 없이, 고개만 살짝 똑바로 돌렸을 뿐 계속 집을 향해 잰걸음으로 걸어갔다. 아마 나보다 그 변태가 더 당황했을것 같다. "뭐야 저거???"
내가 만난 두번째 변태, 내 최악의 변태는, 승무원 합격 후 내 귀 고막이 선천적으로 약하다며 마지막으로 입사가 무한보류되고 난 후 우울증이 극심하던 차에, 마침 작은 무역회사에 합격하여 약 3개월을 다니던 회사의 사장이었다. 그는 겨우 신입이었던 나를 유능하다며 거제나 울산 등지의 출장길에 데리고 다녔다. 일을 배운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따라다니며 공부하며 최선을 다해 그를 보좌했다. 당일치기로 가는 출장이었고 주로 사장의 차를 타고 다녔는데 어느 순간부터 이 인간이 자기 와이프를 비방하기 시작하고 자기 부부문제를 마치 애인한테 털어놓듯 하기 시작했다 이 미친놈이. 그러던 어느날 거제도인가로 출장을 가던 중이었나? 운전을 하면서 나보고 손을 잡고 가자고 했다. 그때 내나이 스물다섯, 약 삼십분을 그렇게 손을 잡혀 가다가 내가 참을 수 없어 손을 빼냈고 얼굴이 시뻘개진 채로 거제까지 갔다 왔다. 그 하루가 지옥 같았다. 그렇게 기겁해서 나는 회사를 관뒀다. 왜 그때 가만 있었을까. 왜 나는 그때 아무에게도 말을 못하고 혼자 삭이고 말았을까. 아마도 그때 그 즈음에 내 스스로는 패배감으로 가득했고, 그곳에서 그 시기를 이겨내고 회사의 핵심인물이 되겠다는 사명감에 젖어 있을 때라 어떻게든 버텨보려 했던 이유가 컸지 싶다. 지금이라도 나는 그인간을 찾아내서 고소하고싶다.
직장생활- 우리학번은 저주받은 학번이라고들 했다. 첫 수능세대, 졸업하던 해에 IMF가 터졌으니 그럴만도 하다. 그래도 난 취업운이 따랐던것 같다. 졸업하고 바로 일을 할 수 있었으니. 그 변태사장이 있던 무역회사를 그만두고부터는 꾸준히 좋은 회사에서 비교적 안정적으로 사회생활을 한 것 같다. 그렇지만 늘 한계가 있었다. 지방대를 나온 여직원, 전문직이 아니다보니 연봉이 올라가는 속도도 느리고 폭도 적었다. 그래도 어려운 시기에 직업이 있고 빡빡한 서울생활에 이만큼 가계에 도움이 되는게 어디야... 하며 끊임없이 스스로를 격려하는게 최선이었다.
출산.육아 -지영씨와 마찬가지로 나에게도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었다. 나는 서울에서 살았고 친정식구들은 부산에, 시어머님은 일찌감치 아예 당신은 아이를 봐줄 생각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가까스로 구했던 조선족 아주머니는 복직 일주일만에 다른데서 일하기로 했다고 연락이 왔고 발등에 불이 떨어진 나는 부랴부랴 아는 분을 통해 복직 직전에 아이를 맡기고 출근할 수 있었다. 월급의 상당부분을 그분 월급으로 지불한지 1년이 다 되어갈 즈음 나는 안되겠다 싶어 돌도 안지난 아이를 동네 어린이집에 보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가 전쟁이었다. 남편과 아이문제로 다투는 일이 잦았고 아이는 아이대로 12시간 넘게 방치되는거 같아 마음은 늘 죄책감으로 시달려야 했다. 아무리 6시 칼퇴근을 하더라도 지옥같은 퇴근길을 해치고 우리동네로 진입하더라도, 도보로 한참을 더 걸어야 하는 어린이집에 가보면 우리 아이 혼자 남아 엄마를 기다리고 있는 날이 허다했다.
어린이집에서는 6시가 되면 모든 아이들의 하교준비를 시작한다. 매섭게 춥던 어느 날 아이를 데리러 도착해보니 가방을 매고 외투에 털모자에 목도리까지 두르고 한시간을 앉아 땀을 뻘뻘 흘리며 기다리던 아이를 보았을 때, 엄마가 퇴근해서 오려면 시간이 걸린다는걸 알면서도 매번 그렇게 아이들 모두를 기계같이 준비시켜놓는 선생님들이 정말 야속했다.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에 아이가 잠든 모습을 보고 하염없이 울었던 날들 또한 얼마나 많았던가. 또, 분명히 내가 회식이 있어 남편이 아이를 데리러 가기로 했는데 그새 남편이 까먹어 버리고, 나는 나대로 고삐가 풀려 무장해제가 되어 회식을 즐기다 9시가 되기도 전에 만취하여 원장 선생님의 짜증섞인 전화 한통에 부랴부랴 택시를 잡아타고 아이를 데리러 간 날도 있었다. 그렇게 전쟁같은 시간을 보냈더랬다.
[82년생 김지영]은 우리나라에서 태어나 학교를 다니고 직장생활을 하고 결혼과 출산을 겪은 여성이라면 누구나 공감할만한 소설이다. 비참하지만 않을 정도로 힘겹고 고단한 삶의 터널을 그나마 잘 견디며 지나온 우리 여자들의 이야기.
감사합니다. 너무 기쁘네요^^
댓댓글로는 안되나 싶어 다시 시도해 봅니다. @홍보해
뭘로 감사를 드려야 할지~ 영향력 없지만 댓글에 보팅합니다^^
보팅 감사드립니다 :)
이 책 저도 순식간에 읽어버렸던 책이네요.
포스팅 잘 보고 가요^^
네 중간에 끊을 수 없더라고요 ^^
저도 책 읽는거 좋아해 자주 뵙게 될 듯하네요^^
같은책이라도 읽는 사람에 따라 그 느낀점이 다른데 그렇기에 책 리뷰가 재밌는것 같네요
다음 책 리뷰도 기다리겠습니다^^
아 정말 반갑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정말 82년생 김지영은 많이 읽혀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홍보해
@홍보해 군요. 착각하고 있었네요.
감사합니다^^
짧다면 짧은 리뷰지만 한 사람의 생애과정을 감히 공감할 수 있게 하는 글입니다 포스팅 잘봤습니다 ^^
더 길게 썼다가 줄이고 또 줄였네요...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