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happyworkingmom 님의 글을 읽고 상념에 잠겼다. 그녀의 글에 내가 단 답글 말미에 내가 한 말, “저는 못된 며느리였거든요” 라는 갑작스러운 자기고백에 나 스스로 당혹스러워진다.
신랑과 만나고 사귀고 연애하고 연애하고...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부산에 있는 신랑과 꼬박 1년을 장거리 연애를 했고, 내가 부산으로 직장을 옮기자 마자 복학을 한 신랑은 또 다른 도시로 가서 학교를 마치기 까지 4년, 그리고 서울에서 일을 시작하고 다시 1년, 내가 서울 본사로 발령이 나기까지 도합 6년을 그렇게 장거리 연애를 하다가 결혼을 했다.
나중에 신랑과의 이야기를 쓸 기회가 올지 모르겠으나, 그시절 이야기를 잠시 하자면, 한 달에 한 번 나는 꼭 새벽 첫 기차를 타고
토요일 새벽에 부산역을 출발, 일요일 오후 기차를 타고 돌아오곤 했다. 갈 때마다 본사 교육을 핑계를 대고 다녔는데 그때 엄마는 알면서도 모른척 한건지 진짜 몰랐는지, 아니면 ‘서울 본사’의 아우라가 엄마를 그렇게 믿게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당시 엄마는 어떠한 질문도 하지 않은 반면, 오히려 노처녀로 시들시들 늙어가던 같이 살던 둘째언니로부터 갖은 구박과 추궁을 들어야 했다. 참을만 했다.
일요일 아침 신랑의 자취집에서 늦은 아침을 같이 지어먹고 정확히 열두시, 이제 집으로 가야할 시간이다. 지금도 하고 있는 [출발 비디오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시그널 음악이 흘렀는데 그소리만 들리면 우리는 마치 다시는 못만날 사람들인양 이제 가면 또 한 달을 기다려야 볼 수 있다며 괴로워 했다.
결혼을 하고도 몇년동안, 개가 종소리를 들려주고 먹이를 주기를 반복하면 나중에는 종소리만 들어도 입에 침이 고인다는 조건반사의 일환인, 그 시그널 음악만 들리면 우울해 지는 증상이 지속되었었다. 그야말로 이유없이, 그 소리에 익숙해진 우울감. 언제인지 모르지만 결혼 후 몇년 후에는 말끔히 사라졌다.
장거리 연애를 하고 당시 남자친구의 집은 부산이라, 아들이 만나고 다니는 여자친구를 벌써 가족의 범주에 넣고 시부모님은 나를 대했더랬다. 가족의 각종 대소사에 항상 나를 초대하셨고 얼떨결에 쫓아다니다 보니, 그리고 항상 남자친구가 보고싶어 힘들던 시기라 불러주시면 한달음에 달려가서 마치 며느리가 하듯 이것저것 도왔다. 솔직히 기뻤다.
아들 하나 바라고 딸 셋을 두고도 목숨이 위중함에도 이번에는 꼭 아들이라는 엄마의 알 수 없는 확신에, 출산을 감행했던 엄마가 쌍둥이일지도 모른다는 말에도 당연히 아들 쌍둥이일거라 믿고 낳아보니, 쓰잘대기없는 가시내가 하나 더 나왔다는 엄마의 매몰찬 이야기. 그리고 그 딸은 죽으라고 이틀동안 엎어놨는데 안죽고 살아났다는 믿을 수 없는 큰엄마의 증언. 나중에 나중에 시집가고 애낳고 물어보니 엄마가 무릎을 탁 치며 “그때 큰엄마가 노망끼가 좀 있었잖아~~” 한다. 나는 웃었다.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와 엄마의 끝도 없는 불화, 그 가운데서 숨죽이던 쌍둥이 오빠와 나. 나와는 열 살 차이가 나는 큰언니가 일찌감치 여동생들을 데리고 도시로 나간터라, 그 끔찍한 집에는 나와 오빠만이 남아 어린 불안을 온 마음으로 받아내고 있었고, 고 1이 되던 해에 나는 언니들의 자취집으로 갈 수 있었다. 아니 보내졌었다.
뭐든 잘먹고 뭐든 잘하는 나와는 다르게 언제나 시름시름 앓던 오빠 때문에 점쟁이를 두고 그분의 말에 따라 가정을 꾸려나가던 엄마가, 점쟁이가 하라는 대로 다해도 오빠의 상태가 나아지지 않자, 지금 생각해보면 몸이 약하다 말고는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도, 우리 엄마를 물주로 빨아먹으면서도 따로 방법을 제시할 것이 없던 점쟁이의 입에서 나온 묘안이라며, 아들 기를 다 뺏어가는 가시내와 떨어트려 놓으라는 분부 하에... (겨우 90년대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는... 나 스스로도 믿기 힘들다ㅜㅜ)
그래도 큰언니 품에서 언니들의 보호를 받으며 지낸 그 십대의 끝자락이 내가 기억하는 가장 행복한 가족과의 시간이었다.
후에 오빠가 군대를 가고 내가 대학 진학을 하고 은퇴를 한 아버지가 집에 들어앉고 자식들 곁에서 살고싶다며 다시 부산에서 합가를 했다. 이미 이빨빠진 호랑이인 아버지와, 지난 세월 모든 불행의 찌꺼기를 온몸으로 감당해 내며 살아온 엄마와의 또다른 기나긴 동거.
신랑을 만나고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따뜻한 마음이 나를 안아주고 만져주고 위로해 주었다. 나는 또다른 세상에 와 사는 것 같았다. 마치 이제껏 나라는 존재에게 하나도 줄 축복이 없다며 돌아앉아,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을 퍼주던 하나님 아버지가, 미처 나를 발견하지 못하다가 그제서야 본것모냥으로, 그동안의 모든 축복이라며 ‘옛다~ 받아라 축복’ 이러고 무심코 던진 그 축복에 내 온 마음이 화답하며 그 축복을 주섬주섬 줏어 입고 있는 느낌이었다. 혹시라도 안 맞으면 어떡하나, 혹시라도 이게 내 것이 아니면 어떡하나 조심조심 하나하나 남김없이 껴 입고 싶었다.
예의 그 ‘경주마 눈가리개’를 하고 앞만 바라보며, 축복이라 믿는 것을 어색하게 껴입고 자기만 노려보는 여자친구에게 질릴 법도 한데, 이 착한 남자는 내 손을 잡고 이야기하곤 했다. “눈 풀어.”
그리고 그와 함께온 가족들...
아버지라는 존재는 내게 늘 두려움이었고 공포였다. 엄마라는 존재는 또한, 자신의 불행을 마치 내가 불행의 씨앗인양, 그 작고 맑은 눈을 향해 표독스럽게 쏟아붓던 잔인함 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때 그 어린 내 모습을 사진으로 보는 것도 싫어한다. 마치 개가 들었던 종소리처럼, 출발 비디오 여행의 시그널 음악처럼, 내 어린 시절의 사진들은 그 시간들을 불러 왔다.
시아버지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ㅜㅜㅜ학교 주차장 이중주차 차 빼라는 연락이 와서 지금 가야해요ㅜㅜㅜ 궁금하시면 나중에... 아니면 오백원ㅋ 뭐래ㅜㅜㅜ
궁금한 사람 여기 손이요!!
북키퍼님 얼른 와서 다음 이야기도 써주세요~~
감사합니다ㅜ 조악한 글에 답글도 냉큼 달아주시고... 아침부터 차 문제문제로 옥신각신... 지금도 계속 도로에 있네요
어머...아직도요?? ㅠㅠ
힘내세요
잘 해결하셔야 할텐데요..ㅠ
네ㅜ잘 해결했어요 감사해요-^^
한줄 한줄 bookkeeper님의 억누른 감정이 느껴지는 것 같아 제가 다 울컥 했습니다.
참 힘든 시기를 보내셨구나.. 겪어보지 못한 제가 그 마음을 다 알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아픈 상처를 만져줄 좋은 분 만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반전아닌 반전으로 글이 짤려서 당황하긴 했네요.ㅋㅋ
skuld2000님 공감에 감사해요. 나도모르게 연재 중 ㅜ
궁금한 사람 여기요!ㅋㅋ
정말이지 90년대든 80년대든 나이드신 분들은 그렇게 아들 아들 하셨지요..
지금 생각하면 그분들도 그렇게 당하셨어서 그랬던 것일까 싶기도 하구요~
고마워요 akoano님~
'못된 며느리'란 제목에 끌려서 들어왔는데, '시아버지는 다정한 사람이었다.'로 끝이 났네요.
저 궁금합니다!
궁금해 하시고 읽어주셔 감사요^^
6년동안의 장거리 연애 하셨군요...저도 6년 연애를 통해서 현재의 배우자와 너무 잘 살고 있어요...서로에 대해서 잘 아니까 좋은 것 같더라구요..하지만 남들처럼 그 흔한 맞선 한 번 안 보고 결혼한 것은 늘 아쉬움으로 남더라구요...가 보지 않은 길(?)....소통하고 싶은 이웃이라서 맞팔신청합니다. 외화벌어서 부자되고픈 dollarlove입니다. 많은 응원부탁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소통할 수 있으면 해요^^
엄청궁금하네요~ ㅎㅎㅎ
레알궁금
ㅋㅋㅋ 그냥 못된 며느리 ㅜㅜ
못된 며느리는 도대체 어디에요? ㅋㅋㅋ 절묘한 끊기 신공 ㅠㅠ
ㅋㅋ 다음 글에서 ㅋㅋ
저희 엄마도 참 모지셨는데.. 못지않으시네요 ㅜ.ㅜ
어릴적 부모로 부터 들은 모진 말들.. 정말 잊혀지지 않죠~
매우매우 궁금합니다.... 지금 살펴보고 있는데 2편도 후루룩 읽어 볼거 같아요 ^^
아, 토닥토닥.
TV에서 봤던 아들과 딸 드라마 생각이 나네요. 다음편 읽으러 갑니다.
짱짱맨 태그 사용에 감사드립니다^^
짱짱 레포트가 나왔어요^^
https://steemit.com/kr/@gudrn6677/3zzexa-and
궁금하지만 2편이 이미 올라와 있으므로 ㅋㅋ
90년대에도 그런 일이 있었군요 마음 아프네요ㅠ
네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