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에 쓴 글입니다. 이 글에 한탄(?)같은 게 좀 있어서 미리 명시해둡니다.
<설리>는 깔끔하다. 스토리는 군더더기없이 담백하며, 감성팔이도 없고 호들갑을 떨지도 않는다. 영화는 사고와 관련된 모든 이에게 공정한 시선을 제공한다. 영화에 나오는 모든 이들은 성실하다. 심지어 악역 포지션의 캐릭터들도 행동에는 합리성이 있다. 때문에 영화는 의도적으로 감동을 유발하지도 않고, 주인공을 고난에 빠뜨리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마냥 심심한 영화인 것도 아니다. 플래시백으로 들어간 사고 장면은 긴박함과 박진감을 동시에 제공하며, 구조과정은 다양한 사람들의 눈을 빌려 여러 각도로 재현된다. 개인의 고뇌부터 긴박했던 비행기 순간까지 90분이란 시간 안에 잘 버무려져있다.
설리 슐렌버거는 불가능이라 생각한 시도를 통해 155명의 사람들을 구해냈다. 그는 영웅이 되었고 언론은 그의 일거수 일투족에 집중한다. 그런데 이후 조사에서 그 시도 외에 더 안전한 생존 방법이 존재했다는 의혹이 제기 된다. 모두가 그를 영웅이라 칭송할 떄도 그는 ‘해야할 일을 했다’며 자신의 행동에 자랑스러워하지 않았다. 그저 그 상황에서 취할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고, 그랬기에 위험을 무릎쓰고 행한 것 뿐이다. 그런데 안전한 대안이 존재했다면, 그의 행동은 모든 승객을 위험에 빠뜨린 잘못된 판단이 된다. “나는 진짜 옳은 일을 했는가?” 고뇌는 혼란이 되고, 비행기가 건물에 들이박는 환상과 악몽은 더 심해진다.
그 대답을 감독은 직접 영상으로 보여준다. 그의 판단은 바로 이루어진 게 아니다. 긴급한 순간에도 최대한 매뉴얼을 따르고 여러 방법을 시도하며 비행기를 살리려 노력했다. 그게 실패해서 허드슨 강 불시착을 택했고, 판단 이후에도 ‘대안이 있냐’며 부기장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의 판단은 충분히 합리적이었고, 그렇기에 그의 행동은 비난받을 수 없다. 영화는 비행기 속 다양한 인물 군상을 보여준다. 골프여행을 가는 부자가, 다리가 불편한 어머니를 데리고 가는 딸이 있다. 평범한 일상을 향유하고자 했던 155명의 일반인을 구해냈다는 것만으로 그는 영웅이라 할 수 있다.
영화는 거기서 더 나아간다. 기적은 설리 혼자의 힘만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다. 설리를 비추던 카메라는 시선을 돌려 다른 이들을 비춘다. 희생자가 될 뻔한 일반인들을 거쳐 사고와 관계된 사람들에게 주목한다. ‘허드슨 강에 비행기가 추락했다‘는 전대미문의 사건에 그들은 너무나 침착하고 신속했다. 관제사는 그 순간에도 최선을 다해 그들에게 해답을 주려 노력한다. 비행기 승무원은 기장의 오더에 착실히 따르고, 충돌 후에는 매뉴얼에 따라 승객을 먼저 대피시킨다. 출퇴근 배를 운행하던 선장은 즉각 그들을 구출하러 나서고, 대기 중이던 구조대 역시 신속하게 출근해 완벽하게 그들을 구조해낸다. 모든 이들이 ’맡은 바를 해낸‘ 덕에 155명의 승객들은 24분만에 모두 안전하게 구출될 수 있었다.
그리고 영화의 포커스는 다시 설리에게 돌아온다. 모든 승객들이 대피가 완료된 후, 비행기 내부를 확인한 뒤에야 그는 마지막으로 비행기를 떠난다. 많은 이들의 도움으로 구출이 완료된 후에도 ’155명‘을 되뇌이며 승객들의 안전을 확인하려 노력한다. 주변의 거듭된 요구로 사고 장소를 떠나는 순간에도 그는 동료에게 승객들의 여부를 확인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는 기장으로써 최선을 다했고 마지막까지 책임감을 잃지 않았다. 설리로 시작된 영웅담은 많은 이들의 노력을 골고루 칭송한 다음 다시 설리로 끝난다. 그리고 설리는 마지막 순간 청문회에서 ’모두가 영웅이었다‘라고 말하며 기적의 공헌자 들에게 감사를 보낸다. 영화는 과장과 억지 감동없이 기적에 관여한 모든 이들을 높이고 관객들에게 묵직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기적은 개인이 만들어낸 게 아니다. 모든 이의 노력이 있었기에 단 한 명의 사망자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은 영웅적인 행동을 한 게 아니다. 그들은 그저 자신이 맡은 바 행동을 수행했을 뿐이다. 미국에는 아직도 정의로운 존재들이 많고, 그들을 뒷받침하는 착실한 시스템도 존재한다. 이스트우드가 영화의 시선을 설리 한 사람이 아닌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분배한 것은 이 때문 일거다.
위기의 순간에도 맡은 바 사명을 다하는 사람들(궤는 다르지만 여기에는 청문회 사람들도 포함된다), 자신의 과오에 대해 고민하고 사과하는 풍경, 행동의 기반이 된 위기대처 시스템 등 영화는 많은 면에서 정직하고 바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모든 게 올바로 진행되었던 이 기적을 통해 ‘위대한 국가’로써의 미국을 다시금 되뇌인다. 스토리는 건조하고 자극은 적으나 메시지는 또렷하다.
‘맡은 일을 수행한다’라는 당연해 보이는 명제가 영웅담이 되는 시대는 얼마나 암울한 걸까. 아무리 현실을 배제하려해도 이 영화는 세월호를 떠오르게 만든다. 155명을 계속 읖조리는 선장, 사고가 발생하자마자 작동하는 구조작업,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위원회는 현실에 없었다. 476명의 사람들이 기장의 무책임한 행동 아래 사지로 몰렸고 304명이 불귀의 객이 되었다. 시스템은 미숙했다. 골든타임 동안 구조작업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정부 관계자들은 보고에만 집착하다 사건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지금도 세월호에 대한 의혹은 해결되지 않은 채 얼룩져있다. 사회는 더이상 정부를 신뢰하지 않는다. <설리>를 보는 나로써는 저렇게 돌아가는 시스템과 사회 인식이 경이롭다. 건강한 정신을 갖춘 사람들과 건강한 시스템이 만들어낸 결과는 155명 전원구조였다. 그 위대한 업적은 별다른 각색 없이도 충분히 울림이 있다.
‘국뽕’이란 말이 희화화되긴 하지만, 그 자체는 나쁜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살고 있는 곳에 대해 자부심을 갖게 만드는 게 뭐가 나쁘겠어. 다만 그 방법이 문제인거지. 한국의 소위 '국뽕 영화'들은 과한 조미료 첨가로 스스로 메시지를 묻는다. 뜬금 로맨스를 넣고 유머를 던지며 사건의 가치를 떨군다. 억지 과장과 미화로 사건을 포장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자랑스러운 일은 과장할 필요가 없다. 억지 감동과 웃음도 진실과 메시지 앞에는 무의미하다. <설리>는 그런 면에서 완벽하다. 과장도 없고 미화도 없다. 좋은 편집과 꽉 차있는 스토리는 재미와 메시지를 동시에 잡았다. ‘올바른 일을 올바르게 전달하는 것’ 국뽕 영화는 이래야 한다.
P.S) 이 영화 스토리 중 실제 사건과 큰 차이점이 하나 있다. 영화의 악역포지션(?)인 위원회 측은 실제로는 그렇게 압박을 가하지 않았다고 한다. 설리의 제안으로 그려진 35초 설정 역시 위원회 측에서 먼저 했다고 한다. 영화를 본 당사자인 슐렌버거 기장은 ‘위원회가 너무 부정적으로 그려졌다’며 모든 사람들의 이름을 가명으로 쓸 것을 제안했고 이는 받아들여졌다. 현실은 영화보다 더 정의로웠다.
"아니요. 우리 모두가 해낸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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