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 운동의 순수성을 얘기하는 이들에게

in #kr7 years ago (edited)
"‘본성’으로 치부되어온 왜곡된 남성성에 대한 전면적인 질문과 해체, 재구성 없이 미투 이후의 세상이 법적 처벌 사례 몇 건으로 쉽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왜곡된 남성성을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지 남자와 여자가 함께 진지하게 질문하고 답을 찾을 때다."
- [경향신문]미투 이후의 남성성   by  정은령 

 위 인용문은 정은령 박사님의 기고문 중 마지막 문장이다.  그리고  내가 페미니즘을 접한 이후로 계속해서 얘기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동안 '남성'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 우리 사회에 있어 왔고, 그 왜곡된 인식이 사회적으로 문제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개개인에게 있어서도 '진짜 자기'로 살아가는 것을 막는 벽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나는 인형을 매우 좋아한다.  그 때마다 가장 많이 들었던 얘기는 "남자는 인형을 좋아하면 안돼. 그건 여자애들이나 좋아하는 거야"라는 말이었다. 그래서 성인이 될 때까지는 강제로 인형을 내 주변에 놓을 수 없었다. 경제권을 확보하여 그러한 어른들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와졌을 때, 비로소 인형을 당당히 구매하여 내 방에 놓을 수 있었다. (심지어 나는 과거 연애 중에 여자친구로부터 인형을 선물 받았다. 여자친구가 내가 인형을 좋아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반면 여자친구는 인형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다른 것을 선물해주었다. 전통적(?) 성관념에 비추어보면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다.)


 일터에서도 마찬가지다. 남자는 힘이 세고 여자는 약하니까 보호받아야 한다고 얘기하는 건, 올바른 관점의 얘기가 아니다. 정확하게는 남녀가 아니라, 힘이 센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뉘어서 일을 맡겨야 한다. 여자 중에도 힘이 센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남자 중에도 힘이 약한 사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저 관점데로라면 한 쪽은 단지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힘쓰는 일에서 배제될 수 있고 한쪽은 단지 남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힘을 쓰는 일을 해야 한다. (실제로는 여성보다 힘이 약해도 말이다.) 이 밖에도 무수히 많은 비합리적 사례가 가부장제 문화가 고착화된 사회 속에서는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나라가 바로 그 가부장제가 오랜시간 고착화되었던 나라였다.)


페미니즘은 그래서 남녀 모두, 해방시킨다.


미투 운동도 마찬가지다. 아주 간단한거다. 남녀 모두(다른 모든 성적 지향을 가진 분들 포함), 내 몸은 내 거다. 왜 타인이 당사자의 허락 없이 상대방의 몸을 함부로 건드리나.  우리는 이제 신체의 자유라는 매우 기본적인 것을 실제 현실에서 구현하고자 할 뿐이다. 그 당연한 것이 우리 사회에서는 자리잡지 못했고 남성의 경우도 피해 사례가 있지만 상대적으로 더 약자이고 성적 대상화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여성의 경우는 지금까지 그것이 일상적으로 벌어졌고, 벌어지는 중이어서, 그 피해 사례가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건, 특별하고 유별난 것이 아니고, 그냥 합리성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 사회에서는 합리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유별난 사람 취급을 받는다.)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현실에서도 부합되게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동안은 너무 비합리적인 것이 많았다보니 이러한 불합리가 사람들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 뿐이다. 이런 얘기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우리 사회가 이전보다는 성숙해졌고 무엇보다 남녀 모두 교육수준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기에, 이러한 비합리성이 인식되고, 얘기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모든 것을 '정의'의 문제로 치환하는 이상한 경향이 있다. 새로운 이슈를 접할 때마다 "무엇이 정의로운가?"라는 관점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이 억울한 가해자를 만들지 않아야 한다는 군중심리로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의 상황이 단순히 남성연대의 발로라고만 보지 않는다.(그런 측면도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오직  한 방향으로만 담론을 하는 것을 설명할 수 없다.) 그보다는 갑작스런 이 모든 상황에서 어디까지가 정의로운 지점인지에 대해서 자신의 삶의 궤적에 비추어 생각하는 과정에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 관점은, 문제를 올바르게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 특히 젠더 문제는!


이것은 합리와 비합리의 문제로 바라보아야 하고 그래야만 명확해진다. 정의는 대부분 상황과 맥락에 따라 판단이 달라진다. 모든 상황에 통용되는 정의란 존재하지 않는다. (더 깊이 들어가면 마이클 센델의 강의가 나와야 하므로 생략) 무엇이 합리적인가? 우리 사회가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는게 합리성을 찾아가는 길인가. 그 관점에서 젠더 이슈를 바라봐야만 비로소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된다. 


미투 운동의 순수성을 운운하는 사람들은, 미투 운동이 부정의 상태에서 정의를 찾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본인들이 당사자도 아니면서 그런 얘기를 하는 거다. 즉, 여성들이 피해를 보고 있던 상황이 정의에 반하는 상태였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잘못을 한 가해자를 찾아서 처벌해야 하는 문제로만 보는 것이다. 틀렸다. 완전히 틀린 번지수라고 본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모두가 재판관이 될 수 밖에 없다. 실수로 잘못 처벌을 하면 안되니까. 엄격하게 피해의 내용과 어떠한 잘못을 했는지를 가려내야 한다.  그런데 젠더 문제는 애초에 그런 문제가 아니다. 젠더 이슈의 대부분은 "어, 이게 당연하지 않아? 근데 왜 우리 사회는 그렇게 동작하고 있지 않지?"에서 출발한다.


누가 옳으냐가 아니라, 무엇이 합리적인 행동인가? 로 질문을 옮겨가지 않는한, 미투 운동은 계속 될 것이고 설사 앞서 말한 이들에 의해 위축되는 일이 벌어지더라도 이름과 형태를 바꾸어서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남성들 스스로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여기에 동참해야 한다는 인식이 없다면 설사 모든 가해자를 처벌하고 모든 피해자를 구제해준다 한들(그런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겠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Sort:  

미투 운동에 대한, 우리사회의 고질적 병폐를 지적하심과 동시에 ,근본적이고도 탁월한 관점과 합리적 대안을 제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asakhan님의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제 자신이 성장한 느낌입니다. 오직 평등하고 다양한 인간이 서로 다른 독립된 인간 앞에 인간 뒤에
인간 옆에 공존할 뿐입니다., 남성 여성이라는 말은, 가부장적 제도에 의해, 후천적으로 문화에 의하여 만들어졌다는 생각입니다. 남성이 제1성이고 여성이 제2의 성이라는 관념도 남성이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악습이라고 봅니다. '남성' 안에도 '여성성'이 존재하며 '여성' 안에도 '남성성'이 존재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니까요! 인위적인 가면과 관습을 벗고 좀 더 솔직하고 합리적으로 남녀 상호 간에 평화와 공존을 모색해야 할 시기입니다. 미투운동의 본질은, 시시비비를 가리는 정의의 문제가 아니라, '인격의 존엄성과 신체의 자유와 그 자치의 원리'에 근거한 합리성의 문제라고 지적하신 점은, 제게 큰 감명을 주었습니다.
저와 같은 몽매한 사람들이 독단과 편견과 아집에서 깨어나도록, 그리고 우리사회가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며 배려하며 보다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갖도록, 지금처럼 지속적으로 이끌어주시기 바랍니다! 환절기에 감기 유념하십시오! 굿 럭 !

감사합니다. 저 역시 계속 공부중입니다만. 공유하고 싶은 얘기가 떠오르는데로 계속 포스팅하겠습니다.

처음 댓글을 남겨 봅니다~ 역시 이웃이 많아야 좋은 글을 많이 보게 되는 듯 합니다 ㅋㅋ 가즈앗!!!

감사합니다. 함께 페미니스트의 길로 가즈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