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서양철학사 책은 어떤 걸까?

in #kr7 years ago (edited)

명색이 서양철학을 공부했고 또 가르치고 있는 처지라서 그런지 적당한 서양철학사 책을 추천해 달라는 요청을 가끔 받는다. 지금 생각에는 교양 시민이 서양철학을 꼭 공부해야 하는지 회의적일 때도 많다. 아무리 공부해도 도무지 알아먹기 어렵기 때문에 선뜻 철학 공부를 권하기도 마땅치 않다. 생각의 훈련이 필요없다는 말은 아니고, 굳이 그걸 저 어려운 분과학문인 '철학'을 통해 해야겠느냐는 데 대한 의구심이다.

나는 철학은 무척 어렵고, 극한의 수학이나 자연과학과 똑같이 어렵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사람들의 오류 중 하나는 철학은 '말'로 하는 작업이라 '수'로 하는 작업인 수학이나 자연과학보다 쉽다고 여기는 일이다. 철학은 말로 정교하게 구성한 생각의 체계를 담고 있다. 심지어 그 체계는 철학자마다 다르게 구성되어 있다. 한 철학자를 이해했다고 해서 다른 철학자가 그저 이해되는 일은 없다는 말이고, 어떤 점에서는 각 철학자마다 매번 다시 시작해야 한다.

철학사 책은 각 철학자의 작업을 대체로 시간 순으로, 새로운 문제가 등장한 순으로,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 달라지는 지점을 중심으로 철학사가가 나름의 관점으로 비교적 짧게 정리해서 쓴 책이다.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철학사 책이란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딱 한 권만 읽겠다고 했을 때 무엇을 보면 좋을까?

나도 철학사 공부를 통해 철학에 입문했고 벌써 그 시간이 30년에 육박한다. 지금은 내가 읽었던 책보다 좋은 책이 많이 나왔음이 분명하지만, 나는 그걸 따라다니며 읽을 필요가 없었다(이미 전문가인데 뭐). 그래서 솔직히 말하면 좋은 철학사 책을 추천할 자격이 없다.

(1) 분명하게 말하지만 서양철학사 전체를 다룬 책은 한 권만 읽으면 충분하다. (물론 코플스톤처럼 여러 권으로 나누어 쓴 철학사가도 많다.) 그 후에는 개별 철학자에 대한 저명한 연구서를 읽으면 된다. (믿을 만한 전공자의 평가를 꼭 거쳐야 잘못 입문하지 않는다.)

(2)그 다음에는 원전을 읽어야 한다(물론 좋은 번역으로 읽는 것이 좋다). 이게 보통 일은 아니지만, 원전을 읽지 않고서 한 철학자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건 옳지 않다. (다행이도 철학사 책에는 원전의 발췌가 많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걸 보는 게 철학사 책을 읽는 가장 중요한 목적 중 하나이다.)

'교양' 수준에서 이렇게 복잡하게 철학사를 접근해야 할까? 어떤 교양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 몰라도, 생각의 훈련에 가장 적합한 학문 분과는 단연코 철학이다. 하지만 이 일이 결코 쉽지 않기에 선뜻 권하기 어렵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원전 읽기 수준까지 열심히 정복할 생각이 없다면 굳이 철학사에 입문할 필요도 없지 않나 싶다. 물론 책을 읽다 보면 철학자의 이름이 많이 등장하고, 그 사상의 핵심이 알고 싶어지기도 하며, 그냥 건너뛰자니 찜찜하기도 하고, 읽는 내용이 이해가 안 되기도 한다.

그렇더라도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한다. 철학은 요점 정리가 불가능하며, 문제와 체계 전체를 이해하려는 노력 속에서만 얼마간 내용을 드러낸다. 철학은 장신구가 아니며, 철학자가 머리를 싸매 생각해 낸 것에 접근하려면 꽤 많은 시간과 고민을 바쳐야 한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몇 가지 철학사 책을 추천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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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포스팅 잘 읽었습니다 :-) 원전 그대로를 읽어야 한다는 말에 공감합니다.
특히 외국도서는 원문 그대로를 읽는 게, 그 언어에 담긴 문화적 배경, 사회적 배경 그리고 한국어로는 번역할 수 없는 뉘앙스까지 담겨서 좋았어요.
보통 원본 읽기는 뉘앙스가 중시되는 소설에서 많이 추천되는데
교과서 등도 원본으로 읽을 때 저는 참 좋았습니다 :-)

대학다니면서 철학수업을 몇개 수강했는데 전공자가 아니다보니 항상 단편적인 지식뿐이였어요. 다음 포스팅이 너무 기대됩니다 :)

아이고, 기대가 크시다니 부담됩니다. 한꺼번에 많은 걸 쏟아내긴 어렵겠지만, 천천히 내보이겠습니다.

원전을 읽으라는 말이 공감이 가네요
사실 깨달은 바를 언어로 한번 거치는 과정, 그걸 다른 사람이 받아들이는 과정 자체가 이미 상당부분 오해의 가능성을 두고 있는데... 다른 언어로 번역까지... 게다가 철학에 대한 통찰과 외국어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로 알고 있는데요...

교수 중에 아예 기말고사로 번역시험을 내고 자기 이름으로 번역서를 내는 경우도 봤을 정도니까요

원전 읽기는 일단 맛을 알고 나면 헤어나오기 어려울 정도예요. 외국어로 읽을 수 있으면 더 기막히고요.
쉽지 않은 과정이라서 많이 권장하기는 어렵습니다.
수업에서 소수 학생을 상대로 할 수밖에요.

원전까지 파고들 자신은 없고.. 좋은 철학사 책 추천 기대하겠습니다..^^

너무 기대하시면 부담됩니다만, 잘 소개해 보겠습니다.

교양 수준에서 너무 깊이 파고들면 자칫 흥미를 잃을수도 있겠군요..!
이번에도 포스팅 잘보고 갑니다.

철학이고 뭐고 간에, 지적 자극이 팍팍 오지 않으면 금방 손 떼게 되지요.

책 추천 기대합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클 수 있지만, 암튼 아는 대로 소개해 드릴게요.

서양 철학사가 공부하고 싶어 무작정 도서관에서 스텀프의 서양철학사를 빌려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가 3년 전이었는데 책 출간은 90년도 였던 거 같아요. ㅎㅎ 매번 글 잘 보고 있습니다. 다음 포스팅도 기대중입니다~!

열심히 공부하셨네요^^

스스로 홍보하는 프로젝트에서 나왔습니다.
오늘도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의 꾸준한 포스팅을 응원합니다.

입문용 책이 있으면 좋을것같습니다
철학은 오래된학문인 만큼 오래된 이유가 있지않을까하네요

예. 저도 책을 하나 써보려 합니다. 철학사 책은 아니지만 철학을 공부할 수 있는 그런 책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