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비 철학자입니다. 요즘 노벨문학상 후보로 매년 거론(누구에 의해?)되는 시인이 추문에 휩싸여 있습니다. 저는 시인에 대해서가 아니라 '노벨문학상'에 대해 말해보려 합니다.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담고 있다기보다 자료를 찾아 정리한 글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총 3편으로 나누어 포스팅합니다.
노벨 문학상에 도전한다? (2/3) - 이번 글
* 전체 차례:
1. 노벨상의 유래 - 2. 노벨 문학상, 그 권위에 도전한다 - 3. 노벨 문학상의 평가 기준
4. 노벨 문학상의 선정 과정 - 5. 노벨 문학상 선정 기관, 스웨덴 한림원(아카데미) - 6. 노벨 문학상을 둘러싼 정치성과 문학성, 그 영원한 갈등
7. 노벨상에 대한 우리의 반응 - 8. 한국 문학의 반성 - 9. 한국 문학, 노벨 문학상에 도전한다
** 우리는 앞 글에서 노벨 문학상이 20세기를 대표하는 작가들 예컨대 톨스토이, 카프카, 체홉, 릴케 등의 작가들을 외면했다는 사실을 보았다.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의 선정은 과연 공정한 것일까? 아니면 배후에 어떤 비리가 숨어 있기라도 한가? 이번 글에서 우리가 살펴볼 것이 바로 이점이다.
4. 노벨 문학상의 선정 과정
노벨상을 선정하는 기관은 각 부문마다 다르다. 물리학상과 화학상 그리고 경제학상은 스웨덴의 왕립 과학 아카데미에서, 생리의학상은 스웨덴 왕립 카롤린스카 의학 연구소에서, 평화상은 노르웨이 국회의 노벨 위원회에서, 그리고 문학상은 우리가 '한림원'이라 부르는 스웨덴 아카데미에서 수상자를 결정한다. 하지만 물론 이 기관이 전세계를 상대로 하는 후보 조사 작업에서부터 관여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주제인 노벨 문학상의 경우를 살펴보기로 하자.
노벨 문학상의 후보를 직접 추천할 수 있는 기관은 전세계에 꼭 세 개밖에는 없다. 스웨덴 아카데미, 프랑스 아카데미, 스페인 아카데미가 그 기관이다. 물론 이 기관들이 제멋대로 후보를 선정하지는 않는다. 이 기관들은 매년 9월 전세계 문학 관련 개인들이나 단체들에 후보 추천 의뢰장을 발송한다. 각국의 아카데미, 펜클럽 본부, 과거 노벨상 수상자, 유력한 비평가들, 문학 방면의 학자들, 또는 탁월한 능력을 보이는 출판인들, 명망 있는 문인 등 후보 추천 의뢰장을 받은 개인이나 단체는 그 해 연말까지 추천을 완료하게 된다.
물론 자기가 자기를 추천하는 통로는 완전히 배제되어 있으며, 추천 의뢰장의 수도 제한되어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 펜클럽 본부에는 추천 의뢰장이 발송되지 않았다. 이런 점들은 한국에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가 나오지 않는 이유가 된다. (이 문제는 다음 글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하자.)
아무튼 이렇게 모아진 추천장을 1월 한 달 동안 검토하고 난 다음에, 3국의 아카데미는 2월 1일까지 선정된 후보자를 노벨 문학상 위원회에 넘기게 된다.
노벨 문학상 위원회는 스웨덴 아카데미가 지정하는 5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대개 스웨덴 아카데미의 종신회원 18명 중에서 선정되지만, 가끔 예외가 있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는 1974년 공동 수상자였던 마르틴손과 욘손의 수상이 왜 문젯거리가 됐는지 알 수 있다. 이들 회원의 수를 놓고 볼 때, 그들의 수상은 누가 봐도 뻔히 '집안잔치'였다.)
이렇게 모아진 후보의 수는 대략 3~400 명에 이르는데, 노벨 문학상 위원회는 이들을 8월 말까지 매주 목요일마다 만나 검토하게 된다. 심의 과정 중 이들은 각국의 전문가들을 초청해서 자문을 얻기도 한다. 최종적으로 5,6명이 추려져서 스웨덴 아카데미에 넘겨지는데, 이 때 노벨 문학상 위원회는 자신들의 소견서를 첨부한다. 이 소견은 대체로 스웨덴 아카데미에서 받아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노벨 문학상 위원회의 구성원이 바로 스웨덴 아카데미 회원이기 때문이다.
스웨덴 아카데미는 최종 후보자의 작품을 읽어가기 시작한다. 작품은 가능하다면 원문으로 읽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원문으로 읽을 수 없는 경우 영어, 불어, 독어, 스페인어 등 서구어로 번역된 여러 판본들을 입수해 읽게 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비서구권 문학이 수상자로 선정되기가 어려운 이유의 하나를 찾을 수 있다. 그들의 작품이 서구어로 번역된다는 것 자체가 힘들 뿐더러, 원뜻에 충실하게 번역된다는 것은 더더욱 힘들다. 문화와 언어의 벽을 뛰어 넘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일례로 1945년 수상자인 칠레의 가브리엘 미스트랄은 스페인어권에서는 알려지지 않았던 여류 시인이었다. 그러나 운 좋게도 그녀의 작품은 그루베리라는 시인에 의해 스웨덴어로 번역됐고 그것이 빌미가 되어 남미에서는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거머쥐었다.
또한 1992년 수상자인 데릭 월코트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시인이었지만 자신의 희곡을 스웨덴어로 번역해서 스웨덴 왕립극장에서 공연하는 등 자신을 홍보하는 일에 전념한 결과 영광스런(?) 수상을 하게 되었다는 비아냥거림이 나오기도 했다.
이러한 일화들은 번역, 특히 스웨덴어나 영어로의 번역이 수상에 얼마나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잘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아무튼, 노벨 문학상 위원회는 독서를 진행하는 동안 제외시킬 후보자를 차츰 탈락시켜 가며 마지막 선정 작업에 들어가게 된다. 18명 회원들이 대체로 동의하는 작가가 있을 경우에는 별 문제가 없지만, 다소 이견이 있을 경우에는 투표를 해서 과반수 이상의 표를 얻은 작가를 수상자로 결정한다.
이처럼 상당히 치밀하고 타당해 보이는 수상자 선정 과정은 그러나 알고 보면 다분히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령 후보자를 추천하는 최종 기관이 왜 하고많은 나라 중에 스웨덴, 프랑스, 스페인 세 나라의 아카데미밖에 없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는 것은 충분히 타당하다. 또한 아무리 막강한(?) 단체라지만 노벨 문학상 위원회가 6~7 개월 동안 3~400 명이나 되는 작가의 그 많은 작품을 심사해서 뛰어난 작가를 골라낸다는 것도 무리가 아닐 수 없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노벨 문학상의 수상 대상을 결정하는 스웨덴 한림원의 선정 기준이 변덕스럽기도 하고, 매우 많은 경우에 이 점을 비평하는 지성인들을 모독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후보들의 문학적 등급이 객관적으로 입증된 적도 없거니와 잘못이 정정된 적이 없다.
그러나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스웨덴 아카데미에 집중된 권력이다. 그 기관은 후보자를 직접 추천할 수 있으며, 노벨 문학상 위원회를 구성하는 권한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수상자의 최종 결정을 할 수 있기도 하다. 결국 노벨 문학상은 이들 스웨덴 아카데미에 의해 시종일관 좌우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모든 권한을 거머쥐고 있는 이 기관의 정체가 무엇인지 밝히는 것이 노벨 문학상에 얽힌 숱한 의혹들을 푸는 지름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5. 노벨 문학상 선정 기관, 스웨덴 한림원(아카데미)
스톡홀름 구시가의 왕궁 바로 옆에 위치한 스웨덴 한림원은 '스웨덴어의 순수성, 우수함, 기품을 지키고 신장시키는 일'을 목적으로 1786년에 창립되었다. 스웨덴 한림원은 우리 나라의 예술원에 학술원의 성격을 가미한 기관이라고 하겠는데, 특징은 회원이 주로 문학 중심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종신 회원으로 대개 노인들(대개 70대 이상)이며 사망 등으로 인해 자리가 빌 경우에 만장일치로 새 회원을 뽑게 되어 있다. 그런데 회원이 되려면 우선 귀족 출신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으며 여기에 문학적 재능이나 업적이 큰 고려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
사실 심사위원들은 대체로 훌륭하고 교양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문학에 정통해 있지는 못하다. 스웨덴 내에서도 최고 정상급이 못되는 문인들이 매년 세계 최고(?) 수준의 문인을 선정하여 노벨 문학상을 선정한다는 이런 아이러니를 비꼬아서 미국의 '뉴스위크'>지는 1985년 10월에 '스웨덴 최고의 정상급 작가들이 한림원 회원이 된 적도 없고 앞으로 될 수도 없다는 사실이 노벨 문학상의 성격을 잘 반영한다'고 보도한 바 있다.
또한 그들은 언어적 지식에 많은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 그들은 스웨덴어 이외에 주로 영어로 썼거나 번역된 작품을 갖고 심사한다. 섬세한 의미 차이를 중요시하는 문학 영역에서 이중 삼중으로 번역된 작품으로 심사를다는 것은 크나큰 한계를 미리 설정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앞서 소개한 미스트랄과 월코트의 예가 이를 잘 입증해준다.
그러나 무엇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이 갖고 있는 고질적인 편견이다. 스웨덴 한 일간지의 문화부장은 '한림원 회원 18명은 대체로 중도우파의 성향을 지니고 있으며 정치적으로 문제가 많은 사람들이다'라고 평한다. 앞에서 살펴보았지만 그들은 노벨의 유언을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으로 해석해서 귀족적이고 보수적인 관점에서 수상자를 결정하는 우를 범하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문학의 실험성, 도전성, 혁명성을 무시하고 정치와 시대상에 영합하는 작품을 선정한 경우도 많다. 초현실주의와 다다이즘(앙드레 브르통, 기욤 아폴리네르, 장 콕도 등), 정치성 문학(베르톨트 브레히트, 에즈라 파운드, 앙드레 말로 등), 에로티즘 문학(D.H.로런스, 헨리 밀러 등)이 배제된 것은 한림원 회원들의 성향이 어떠했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노벨상 수상을 둘러싸고 블랙리스트(쉰들러 리스트는 아니다!)에 관한 소문도 있다. 물론 여기에 관한 진실을 알 도리는 없다. 하지만 그 징후는 여럿 있다. 그레이엄 그린, 앙드레 말로 등이 그 리스트에 속해 있었다는 추측이 계속된다. (뒤에서 보겠지만 한림원 회원인 룬트비스트를 둘러싼 잡음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스웨덴 한림원 창립 200주년인 1986년, 노벨 문학상 심사위원이자 문예학자인 키엘 에스프마르크는 "노벨 문학상"이라는 300페이지 분량의 책을 냈는데, 그는 심사위원들의 편견, 우둔함, 이기성을 철저하게 분석하면서 3분의 1이나 되는 작가들이 잘못 선정되었다고 묵묵히 인정한 바 있다. 마땅히 수상해야 할 작가 50내지 100명 정도가 수상하지 못한 비운을 맛봤으며, 첫 10년 동안에는 톨스토이 대신 센케비치를 선정하는 등 졸작을 선정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버나드 쇼가 '노벨이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것은 용서할 수 있지만 노벨상을 발명한 것은 용서할 수 없다'고 신랄하게 비판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이다.
이제 우리는 문학 외적인 요인, 예컨대 정치 문제 때문에 수상자 선정에 어떤 숨은 이야기들이 있었는지를 알아보기로 하겠다. 노벨 문학상을 둘러싼 정치성과 문학성, 그 영원한 갈등은 과연 해결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질문을 던져놓고 몇 가지 일화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6. 노벨 문학상을 둘러싼 정치성과 문학성, 그 영원한 갈등
'회원들은 누구나 자신이 알고 있는 분야에서 수상자를 선출하려 하고 있다' 또는 '회원들 사이에 자기가 미는 작가를 수상시키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다'는 따위의 얘기도 매년 10월이 되면 한림원 주위를 끊이지 않고 맴돈다. 그들은 '예의'와 '눈치'를 중요한 선정 기준으로 갖고 있다는 얘기도 있다.
마르틴손과 욘손을 수상자로 결정한 1974년, 세계 여론은 '노벨 문학상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은 스웨덴 아카데미의 내부에 은밀하게 자리하고 있는 정치성이다'라고 떠들어댔다. 사실 노벨상은 문학성보다는 정치성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다는 견해는 별로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사실 많은 경우에 후보자 선정 과정에 있어서 누구에게 줄 것인가를 따지지 않고 어느 나라 작가에게 줄 것인가를 먼저 따진다고 추측된다. 가령 '이번에는 미국에 줘야 한다'는 원칙(?)이 서게 되면 그 다음에 가서야 미국 내에서 수상 후보로서 몇 사람을 꼽게 된다는 것이다. 그 증거로 1930년 수상자인 미국의 싱클레어 루이스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수상자가 결정되기 전부터 '이번에는 미국 작가의 차례다'라는 소문이 공공연한 비밀로 떠돌고 있었다. 결국 데오도어 드라이저와 루이스가 후보로 부각되다가, 루이스가 수상하게 되었다. 스웨덴 아카데미는 '루이스는 미국 상류사회의 유머를 그린 우수한 작가이며 그가 회의주의자이긴 하지만 드라이저의 운명주의보다는 노벨 문학상의 취지에 가깝기 때문에 수상자로 결정했다'고 밝혔던 것이다.
다른 증거도 많이 있다. 1934년 스웨덴 아카데미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이탈리아의 베네디토 크로체를 내정했었지만, 발표 직전에 루이지 피란델로로 교체하는 소동을 빚었다. 무솔리니 정권에 신랄한 비판을 가했던 크로체가 수상할 경우 혹시 파시즘의 보복이 있지 않을까 두려워한 스웨덴 정부가 외압을 가했기 때문이다.
1953년 윈스턴 처칠의 수상도 암시해주는 바가 많다. 당시 그는 세계 최강국 수상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1965년 수상한 솔로호프의 경우는 용감(?)하게도 파스테르나크를 지명했다가 몰아닥친 폭풍의 피해를 수습하느라고 선정한 것이었다. 1984년 체코인 사이페르트를 수상자로 결정한 것은 미국의 대(對)소련 전략의 일환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반소작가인 그를 선정한 것에는 모종의 뒷거래가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1987년 미국 국적으로 수상한 브로드스키는 망명 작가였기 때문에, 모국인 소련에 영예를 돌리게 하기는커녕 미국이 소련 내 정치문제를 공격할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다.
이런 사태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데 대해 스웨덴 한림원의 사무국장 길렌튼은 1985년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정치가 개입할 여지는 없다. 물론 스웨덴 아카데미 회원들의 정치적 편견이 수상작을 결정하는 데 무의식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것은 예컨대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 해도 파시스트에게는 상을 줄 수 없는 것과 같다. 하지만 노벨 문학상이 정치성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는 주장은 언어도단이다'라고 변명한 바 있다. 하지만 그는 또한 '작가의 인기와 유명도가 수상의 장애가 될 수 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해명 발언은 곧 허위임이 드러난다. 그것은 스웨덴 한림원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사람인 아투르 룬트비스트(Artur Lundkvist)의 존재 때문이다. 그는 좌파 시인으로 레닌 상을 수상한 경력도 있으며 스웨덴 안에서 라틴 아메리카 문학의 권위자로 꼽히고 있다.
그는 1968년 한림원 회원으로 선출되었는데, 유난히 고집이 센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발언권은 거의 절대적이어서 매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선정이 그의 개인적 견해에 의해 좌우된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이다. 실제로 그가 회원이 된 이후 미국과 유럽 수상자가 현격하게 줄어들었으며, 그 대신 라틴 아메리카 등지의 급진적 경향을 갖는 작가들이 수상자로 결정되기도 하였다. (물론 이 현상에 대해 나눠주기식 수상이라는 비난도 적지 않다.)
룬트비스트의 영향력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그는 1980년 영국의 '선데이 타임스'>지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개인적 취향으로는 그레이엄 그린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기사가 보도된 이후 '룬트비스트가 스웨덴 아카데미 회원으로 있는 한 그레이엄 그린은 결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얘기가 공공연히 떠돌았다. 그레이엄 그린은 영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일류급 작가로 평가되고 있었는데, 20년 넘게 해마다 노벨 문학상 최종 후보에 오를 뿐 정작 수상은 하지 못했기 때문에 '만년 노벨 문학상 후보'라는 딱한 별명을 안게 되었으며, 결국 1991년 영원히 노벨상을 탈 수 없는 곳으로 가고 말았다(룬트비스트도 1991년 11월에 같은 곳으로 갔다).
룬트비스트는 또 다른 일화도 남기고 있다. 1985년 수상자인 클로드 시몽은 1983년도에도 최종 후보까지 올라 영국의 윌리엄 골딩과 치열한 경합을 벌이다 탈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룬트비스트는 최후까지 시몽을 지지해서, 심사가 끝난 후에도 '나는 골딩을 지지하지 않았다'고 공식 발언을 함으로써 심사 내용을 공개하지 않는 노벨상 80년의 전통을 깨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결국 클로드 시몽은 룬트비스트의 후광을 입고 1985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그는 프랑스 독자들에게도 낯선 작가였으며 비슷한 계열의 '누보 로망' 작가인 알랭 로브그리예나 나탈리 샤로트보다 훨씬 덜 평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룬트비스트의 후광 아래 영예롭게도(?) 수상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비단 룬트비스트에 관련되지는 않았지만 다른 일화도 있다. 1960년 수상자인 생종 페르스는 문인 심사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앙드레 말로보다 불리한 입장이었다. 하지만 시인이자 외교관이기도 했던 그는 UN 무대에서 사귄 스웨덴 출신의 함마슐드 총장의 막강한 입김으로 말로를 제칠 수 있었다. 이 일화는 이 상이 얼마나 관료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같은 숱한 사례들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노벨 문학상은 과연 순수한 문학상이라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정치적 농간에 크게 좌우되는 불명예스런 상이라 보아야 할까? 우리는 어렵지 않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문제 때문에 심지어는 스웨덴 내부에서도 노벨 문학상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여론이 많이 일고 있다. 작가이자 스웨덴 유력 일간지인 '다겐스 니헤르테'의 전 편집장 올로프 라저크란츠는 1989년 노벨상 수상자가 발표된 직후 '노벨상은 가치 없는 제비뽑기에 불과하며 마땅히 폐지되어야 마땅하다'고 말했다.
1960년대 이후 비서구권 수상자들이 등장하게 된 것도 고운 시선으로 보기 힘들다. 그것 역시도 정치적 안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나눠주기식 수상자 결정에 반발을 한 몇몇 나라 언론은 아예 노벨상 수상 소식을 짤막한 단신으로 처리하기도 한다. 물론 자국인 수상의 경우 예외가 되지만.
노벨상이 진정 제대로 된 평가를 수행했는지 여부에 대해 죠지 스타이너는 '오직 시간만이 진정 남아야 할 것을 결정할 수 있다'고 평하고 있다. 에즈라 파운드가 말했듯이 '문학은 새로움을 머무르게 하는 새로움'인 것이다. 우리는 '세계적 명성'과 '위대한 가치' 사이에는 아무런 필연적 연관성이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하겠다.
지금까지 우리는 노벨 문학상이 안고 있는 여러 잡음과 그 원인에 대해 상세히 고찰했다. 이제 남은 문제는 한국 문학과 노벨상을 관계짓는 일이다. '한국에서는 언제쯤 노벨상을 탈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해서 우리는 '한국 문학이 어떤 발전을 할 수 있을 것이며 인류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옮겨감으로써 이 문제를 성찰할 수 있을 것이다.
노벨 문학상에 도전한다? (2/3) - 이번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