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어쩔 수 없이 바깥에 나와야 했다. 방에 가만히 있는 것이 우울을 더 키우는 것 같아 지인이 있는 곳에 잠깐 들리기로 했다. 꼼짝없이 부암동까지 가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지인의 배려로 삼청동에서 만나게 됐다.
며칠 밖에 안 나왔다고 벌써 날이 선선해졌다. 늘 사람으로 붐비던 거리에는 사람도 없고, 바람은 시원하고, 하늘은 파랬다. 평소라면 좋아서 방방 뛰었을 텐데, 오늘은 그전보다 조금 나은 정도였다.
그리고 오늘은 하루종일 이 앨범을 들었다.
< Keith Jarrett - Köln Concert >
밥을 먹고, 짧게 이야기를 나눈 후 지인은 부암동으로 다시 돌아갔다. 남겨진 나는 국립현대미술관으로 갔다. 삼청동에 올 때마다 꼭 들리는 곳이지만, 전시보다는 도서관에서 주로 시간을 보낸다. 가방을 물품 보관소에 넣어두고, 읽던 책 한 권만 들고 가 조용한 시간을 보냈다.
언젠가 가난한 예술가들과 함께 작업했던 적이 있다. 편의점 커피를 사 동네 공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는데, 가난한 예술가의 모임이라 그랬는지, 편의점 커피에 취해서였는지 자연스레 우울증이라는 주제가 나왔다. 그중에서 나는 돈을 제일 잘 벌고 있었고, 그래서였을까? 그들 중 가장 많이 웃었다.
하나둘 자신의 우울 증상을 이야기하던 사람들은 서로에게 조언을 해주고, 급기야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웃으며 하기 시작했다. 주변에 온통 가난한 예술가(가난한 예술가들이 모두 우울한 건 아니겠지만)뿐인 우리는 곁에 우울한 사람이 무척 많았고, 이야기의 끝에는 너무 많이 세상을 떠났다는 말까지 나오게 되었다.
운이 좋은 것인지, 내 주변 사람 중 삶을 포기한 사람은 여지껏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그들을 볼 때 약간의 거리감이 느껴졌다.
한 사람이 '정말 죽을 것 같은 사람은 안 죽고, 안 죽을 것 같은 사람이 죽더라'라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 생각 없이 듣고 있었는데, 그 사람이 갑자기 진지하게 "저는 @ab7b13씨가 가장 걱정돼요."라며 말을 꺼냈다.
나는 평소와 같이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으려 했지만, 그는 말할 틈을 주지 않고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그때 그가 했던 정확한 말은 기억나지 않지만, 맥락은 이랬다. 사소한 것에 너무 많은 기쁨을 느끼는 사람은 사소한 것에도 너무 많은 슬픔을 느낀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머리를 띵하고 맞은 기분이었다.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 말을 들은 후로는 마음껏 기뻐하면서도 어딘가 두려워졌다. 나의 기쁨에 비례해 슬픔도 함께 온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도 몇 번씩, 꾸준하게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는 항상 문자 대신 전화를 했는데, 오랜만에 내 웃음소리를 들으니 반갑다고 했다. 나는 "이 웃음 때문에 제가 더 슬퍼지는 건 아닌가요?"라고 묻고 싶었지만, 그냥 더 큰 소리로 웃었다. 그는 통화 말미에 다시 볼 때까지 건강하게 지내라는 말을 덧붙였는데, 괜히 그 말이 죽지 말고 살아있으라는 소리로 들려 기분이 오싹했다.
요즘은 평소보다 우울했기 때문에 그 말이, 그리고 그 사람이 계속 떠올랐다. 맥없이 기뻐해 그만큼 슬퍼져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소한 것에도 기쁨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부러워요~ ^^
감사합니다. 언제나 기쁨만 있으면 좋겠지만, 그럴 순 없으니 적당히 슬퍼지는 법도 연마를 해봐야겠어요!
행복의 판도라 상자가 열린 것 같은 느낌이네요
사소한 행복이 뒤집어 생각해보면 사소한 것에도 불행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니
꽤 섬세한 분이신 거 같아요 그 분은
네. 저도 저 이야기를 듣고는 내심 놀랐어요. 행복의 판도라 상자라는 표현이 재밌네요. 곱씹어보니 정말 맞는 말이에요.
빛과 그림자지요. 빛이 빛인건 어둠이 있기때문에 빛이 있는거죠. 빛밖에 없으면 빛이 있는지도 몰라요. 마찬가지로 기쁨만 있다면 그 기쁨은 기쁨이 아니죠. 기쁨이라고 알지못하죠. 슬픔이 있으니까 상대해서 기쁨이 있는거지요.
그것을 이해했기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도 있는거 같습니다. 죽음과 삶, 기쁨과 슬픔이라는 것에 차이를 못느끼기 때문이죠. 허무를 선택하는가 ? 아니면 존재의 향유를 선택하는가?의 문제이죠. 허무를 선택하기때문에 자살을 경험? 하는 것도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생각을 하는 그 마음은 영원히 끊어지지 않고 상속된다고 불교에서는 말하지요. 다시 태어난다는 거지요.
그래서 번뇌속에서 태어났다가 번뇌속에서 죽고 다시 번뇌속에서 태어나는 다람쥐 쳇바퀴의 연속이죠. 슬픔도 번뇌고 기쁨도 번뇌라고 하는거지요
우리는 매순간 들숨 날숨 속에서도 나고 죽고 나고 죽고 하는 반복이라고 하지요. 그 마음을 볼수만 있다면 우울증도 사라진다고 합디다.
마찬가지로 우울증이라는 이름도 안우울증이 있어야 성립되니 영원한 우울증이라면 우울증도 없지요.
음악 끝날때까지 의식흐름 댓글달기하는데 졸라길다.
음악듣기 23분에 끝내다. -쥐피터
상대적으로만 기쁨을 느낄 수 있다니, 왠지 슬프게 느껴져요. 생각해보니 스스로 슬픔의 터널을 지나오지 않았다면 말씀해주신 것처럼 지금 행복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것 같네요.
들숨 날숨 속에서도 나고 죽고 나고 죽는다는 말이 좋아요.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져서요.
제가 올렸던 건 앨범 링크였는데 1번 트랙만 올라갔네요. 긴 곡 열심히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곡은 어떠셨는지 문득 궁금해요 ㅋㅋ
조지윈스턴의 냄새가 나요. 저야뭐 그냥 듣기좋다는 정도와 라이브인지 몰랐네요. 중간에 얼수! 혹은 탄성?하는 추임새가 인상적이었던거 같아요. 관객의 소리인지 연주자의 소리인지 듣기좋았습니다.
ps. 절대적인 행복도 있다고도 합니다. 그건 우리가 일반적으로 경험하기 힘들긴하다고 해요. 탄트라에서는 섹스를 통해서 전희를 찾아들어간다고들 표현하지요. 그렇지만 섹스를 통해서 흔히 느끼는 감각적 전희와는 다르다고 하지요. 수행자들은 탄트라 수행이든 명상수행을 통해서든 정신적 전희를 체험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감각적 전희를 초월해버린다지요. 그러나 무쟈게 어렵지요.
지금 대댓글 의식흐름 놀이하면서 다시 듣는데 피아노하고 관객이 호흡맞추어 잘흘러가내요. 이런것도 잔잔한 정신적 전희이겠지요.(관객이 전희를 느꼈나봐요. 우! 흐! 우! 연발하내요. 요런것도 관객이 느끼는 정신적 전희)
그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평상시의 잔잔한 행복도 전희이지요. 잡생각이 끼어들지 않는다면 말이죠. 고강도의 전희만 전희가 아니지요.
그래서
지금 다시 들어보니까 피아노 연주자가 잔잔한 몰입을 지대로하는거 같습니다. 의식과 손과 영감과 관객과 호흡에 맞추어 밀당리듬타기서핑을 제대로 하는거 같아요. 그 사이에 그 연주자는 순간의 즐김만이 있는 거지요. 그래서 예술가가 道꾼적 성향이 많은가봐요. 아침 명상전에 다시 들었습니다. 고마와요. 이번에는 끝까지 다 들었어요. 나루님이 마련해주신 색다른 전희적? 체험이었습니다.
살면서 소소한 행복을 누려보자고 생각했는데, 반대로 소소한 슬픔을 누릴 수도 있다는 뜻일까요... 참으로 묘한 느낌과 생각을 갖게 되어요.
말씀하신 대로 참 묘한 이야기에요. 저도 아직 해답을 찾지 못했어요. 기분이 좋을 때는 상대적으로 기쁨을 더 많이 느끼는 것 같다가도, 조금이라도 슬퍼지면 왠지 금세 또 슬픔을 느껴버린 기분이 들어요.
너무 기뻐하면 안돼. 이 기쁨이 사라졌을때 너무 슬퍼 질테니.
너무 기대하면 안돼. 이 기대가 실망이 됐을때 더 실망할테니.
너무 사랑하면 안돼. 이 사랑이 이별이 됐을때 더 아플테니까.
이런 생각에 세상에 참 할 게 없어지더군요. 나중엔 마음이 돌덩이 처럼 아무런 감각이 없어지더라구요. 돌덩이가 되고나면 아프진 않습니다. 슬프지도 않고.
근데 그거 하나 빼곤 정말 별로였습니다. 그래서 그냥 많이 웃고 많이 울고 많이 아프면서 살기로 결정했습니다. 없으니까 정말 별로였기 때문이죠. 우울함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기 때문에 끝까지 우울해 보라는 말은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우울함이 다른 좋은 것들을 침범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취하지 않았다고 우기는 친구와 분명 취했다고 우기는 친구의 다툼을 보신 적 있으시죠? 우울함과 술을 도치시켜보면 저 두 친구는 내 마음과 내 머리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쪽이 맞는지는 사실 중요한게 아닙니다. 두 친구가 술을 기울이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게 중요한 건데. 저 두 친구는 그 중요한 걸 잊고 저렇게 싸우고 있네요.
오늘 하루 들으셨다는 이 피아노 처럼만 기분이 좋아 지셨으면 좋겠습니다. ^^
저도 예전에 같은 이유로 너무 깊이 상대를 바라보지 않으려 했던 적이 있어요. 노력은 했지만 마음대로 되진 않더라고요. 그래서 감정을 절제하는 건 애당초 포기해버렸어요.
다행인건지 저는 우울함이 끝까지 이어진 적은 없어요. 금세 또 알아서 회복하는 자가치유 능력이 있답니다. (아직 삶이 힘들어 보지 않은 걸까요?) 끝까지 우울하셨던 @wisecat님의 모습이 문득 떠오르면서, 지금은 굳건히 잘 이겨내신 건가 하는 조심스런 생각도 함께 드네요.
피아노 연주가 기분 좋게 들리셨나요? 기분 좋은 연주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다시 찬찬히 들으면서 기분을 더 끌어올려 보겠습니다 :)
전 주기를 살펴보니 5년에서 6년정도에 한번씩 바닥을 찍고 올라오는 것 같더라구요. 최근엔 그 우울 주기가 멈추어서 이젠 매우 만족도 높게 살고있습니다.
연주가 슬펐었나? 분명 기분 좋았던 것 같은데 하면서 위에 올라가보니 글을 읽고 댓글쓰고 하는 동안 들어서 17분쯤에 멈춰있네요. 나머질 들어봤는데 어둠보단 빛 쪽인 것 처럼 들리네요. 빛이 정말 작아서 어둠이 많아 보이는 파트도 있는 것 같은데 그래서 반짝이는 빛이 해피앤딩일 것 같은 느낌이에요...
사소한 것에 기쁨을 느끼는 사람.. 사소한 것에 슬픔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슬픔보단 기쁨을 느낄수 있는 사소한 일들이 더 많을 것 같아요.
아직 더 슬퍼해야할 것들이 남아 있다면 조금만 더 슬퍼하시고 일어나셨으면 좋겠습니다.
예전 나루님의 여행 포스팅에 있었던 오빠들의 말처럼...
그럴수 있으니까요...
네. 맞아요. 실은 비가 와서 슬프거나, 날이 더워서 슬프진 않아요. 하늘이 예뻐서 기쁘거나, 날이 선선해져서 기쁘거나. 요즘은 이런 기쁨을 더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슬퍼해야 할 것들이 슬퍼한다고 사라지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언제나 삶 속에 함께하는 것인데, 그 슬픔을 잘 다루는 법을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네요.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말을 잘 되새겨봐야겠어요.
따뜻한 위로에 마음이 따뜻해졌어요. 늘 감사합니다:)
저도 반대 경험이 있어요.
슬픔과 풍파 휘둘리며 유리멘탈이라 작은 불행에도 우울해져서 참으로 부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어느 날 친구에게 '네 주변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은 누구야?'
라고 물었는데 뜻밖에 '너야!'라고 답변해서 충격을 받았죠.
너만큼 작은 일에도 크게 기뻐하는 사람이 없다고
전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않고 안정된 사람을 동경해왔고 인생의 목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가끔은 이렇게 많이 느낄 수 있어 다행이다라는 생각도 듭니다. 이 것 또한 끌어안아야 할 저의 모습이니깐요.
사실 여전히 괴롭고 흔들리기도 하지만..
괜찮아요. 우린 모두 강한 사람들이니깐
반대 경험이라곤 하셨지만, 저와 비슷하신 분이군요. 반갑습니다 ㅎㅎ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있던가요? 그분들도 알게 모르게 흔들리고 있을 것 같아요. '주변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 소리를 들으시다니! 그거야말로 정말 행복이네요.
어쩔 수 없이 슬픔과 행복이 공존해야 한다면 행복에 좀 더 무게를 실어주고 싶어요.
감수성이 예민하다고 하죠. 공감능력이 예술의 원동력이니 꼭 필요한 것 같은데... 그래서 예술이 어려운 것 같아요.
공감 능력과는 또 다른 듯합니다. 스스로 공감 능력은 부족하다고 느끼거든요. 그걸 쉽게 말하면 감수성이 예민하다는 표현이 될까요? 어릴 때에 비하면 많이 무뎌졌는데도, 한 번씩 무너질 때가 있어요. 예술과 떼어놓고 봐도, 그런 분들이 꽤 많을 것 같습니다.
사소한 것이 중심이 아니라 기쁨 슬픔이 중심이죠. 사소한..은 떼고 기쁨을 잘 느끼는 나루님. ^ㅇ^
댓글 달면서 천천히 생각해봤는데, 슬픔보다는 기쁨을 더 잘 느끼는 것 같아요. 지금은 기쁨 충만한 시기인데요. 그래서 지금 이렇게 찹촙님과 이야기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금방 미소가 지어졌어요. ^ㅇ^
웃음과 눈물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합니다. 만들어진 미소가 섬뜩한 까닭은 그 사람이 슬픔 앞에서도 냉소적이리라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 아닐까요.
'예술가의 섬세하고 심약한 기질'이라는 신화에 대해 경계하지만 어느 정도 고개를 끄덕이게 될 때가 있습니다. 예술이 되는 포착이란 거기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싶어서요. 예술가의 상처받기 쉬움에 대한 상투적 신화가 여전히 유행하는 건 그 대체품이 없기 때문일까 싶기도 하고..
그럼에도 사회가 너무 많은 상처를 준다는 생각입니다. 우울증이 그 대표적인 사례일 테고요. 기쁨이든 슬픔이든 견딜 수 있는 만큼만 필요할텐데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ㅜㅜ
가끔 못 견디게 슬플 때, 혹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을 때. 엉엉 울면서도 곡을 쓸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함께 했던 기억이 납니다. (실제로 곡을 쓰게 됐고요) 오래전 일이라 지금도 그렇게 느낄진 모르겠지만 삶의 힘든 지점에 있을 때, 그때 무언가가 만들어진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는 예술가의 이야기를 적었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삶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이 이런 심약함을 느끼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좀 더 따뜻하고 나은 사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완전히 같은 맥락은 아닌데 회사에서 보면, 맨날 그만두고 싶다고 얘기하는 사람은 오래다니고, 조용하게 일하던 사람들이 먼저 퇴사해요. 힘들다는걸 밖으로 표현하면서 어느정도 치유가 되나봐요.
그런데 사소한 기쁨, 사소한 슬픔을 알아차리는건 오히려 좋은 것 같은데요. 본인이 슬픈지 조차 모르고 안으로 곪아가는 것 보다는요.
ㅎㅎ 완전히 같은 맥락은 아니라고 하셨지만, 저는 완전히 같은 맥락처럼 느껴졌어요.
과거엔 저도 슬픔조차 모르고, 안으로 곪아가던 시기가 있었는데요. 그때를 돌아보면 슬픔을 인정할 수 있는 지금이 훨씬 더 나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적어도 요즘엔 곧 기뻐질 거란 사실도 함께 알게 돼, 슬픔을 나름대로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어요. 낙관처럼 보이지만, 또 좋아질 거라는 확신은 큰 위로가 되더라고요.
저도요. 힘든 일이 생기면 또 무슨 좋은 일이 오려고 이러나? 하고 있어요. 항상 반복이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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