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팀잇 연재소설) [PANic Song -chapter 4] Lucifer Effect(1)

in #kr-writing6 years ago (edited)

Previously on PANic Song(지난 챕터 보기)
Prelude - Blackened
Chapter 1 - Dog King(1)
Chapter 1 - Dog King(2)
Chapter 1 - Dog King(3)
Chapter 2 - HERO(1)
Chapter 2 - HERO(2)
Chapter 2 - HERO(3)
Chapter 2 - HERO(4)
Chapter 3 - Vertigo(1)
Chapter 3 - Vertigo(2)
Chapter 3 - Vertigo(3)
Chapter 3 - Vertigo(4)

수요일. 신일이 사랑하는 수요일이다. 오후 수업만 있어 마음껏 늦잠을 청할 수 있는 날. 일주일에 하루 정도 게으름 찬 백수 시절을 추억할 수 있는 건 틀림없는 행운이라고, 신일은 늘 생각해왔다.

평소 같으면 한참 단잠에 빠져 있을 이른 아침, 신일은 눈을 떴다. 하지만 이번 기상은 딱히 그의 의지가 아니었다.

어젯밤에도 잠을 설쳤다. 식장에 다녀온 후 벌써 며칠째 계속되는 불면의 밤이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냉장고로 향한다. 썩은 가죽이라도 물어뜯은 것처럼 입안이 텁텁하다. 생수병을 꺼내 물을 들이켜도 몸속 깊게 스민 갈증이 쉬이 가시지 않았다. 세수라도 하면 좀 나아지려나, 화장실에 들러 뜨거운 물을 내렸다. 흐릿한 거울에 비친 자화상이 안쓰러울 만큼 초라했다.

콧등에 작은 뾰루지가 솟았다. 하지만, 손톱으로 짜낸 반점은 묽은 콧기름만 토할 뿐이었다. 시큰한 통증이 콧등을 따라 눈을 어지럽힌다. 침대로 돌아와 몸을 기대 누워도 원인 모를 경련은 도통 가실 줄 몰랐다.

하필, 하필이면 그리스 신화란 말인가. 범인이 남긴 글귀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이번 사건에 그를 휘말리게 한 인연의 끈이 세차게 목을 죄어오는 기분이다.

아침을 챙겨 먹지는 못했지만 딱히 배가 고프진 않다. 오늘 같은 날에는 학교에 일찍 나가보는 게 차라리 나을 것 같다.

오늘은 날이 좀 풀리려나.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는 길, 기분 좋은 가을볕이 한산한 거리를 비친다. 이 정도면 가까운 곳으로 나들이를 떠나도 좋을 날씨다. 선선한 가을바람에 신일은 자연스레 호주머니 속 담배를 찾았다.

손에 들린 담배를 채 반도 태우지 않았는데 어느덧 정류장이다. 매일같이 오가는 풍경에 익숙해 지다보면 시간의 흐름에도 무뎌지는 걸까. 집과 정류장 사이의 거리가 점점 짧아지는 기분이다.

신일은 정류장 바닥, 꽁초 수북한 종이컵 재떨이를 내려다 봤다. 금연 정류장이라는 팻말은 무색하게 솟아있었다. 민망한 마음에 얼른 담배를 비벼 끈 뒤, 그는 괜스레 팻말에서 한 발 물러나 섰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등굣길, 쏟아지는 잠의 유혹을 뿌리치기 위해 신일은 뒷목을 보듬었다. 뒤숭숭한 기분에 며칠 간 수업 준비도 제대로 못했다. 버스 안에서라도 오늘 수업 내용을 정리해 두어야 한다. 이런 훈련이 실제 강의에 큰 도움이 된다는 어느 선배의 조언을 떠올리며, 신일은 고집스레 웅크린 자세를 고쳐 앉았다.

허벅지에 전해지는 묵직한 진동에 정신을 차릴 무렵, 창밖 경치는 제법 달라져 있었다. 그는 이미 정신없이 머리를 조아리며 몇 개의 정류장을 지나 보낸 터였다. 그새 깜빡 잠이 들다니, 어지간히 피곤했나보군. 부스스한 눈을 비비며 주머니 속 낡은 휴대폰을 꺼냈다.

“형, 저에요.”

“어, 그래, 수강아.”

“아니요, 그냥 뭐 그날은 잘 갔다 오셨나 해서요.”

“아, 덕분에. 뭐야, 수강이 너, 그것 때문에 일부러 전화까지 한 거야?”

“어쨌든 저도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분이니까요. 어째 직접 찾아뵙지 못하니까, 영 기분이 찜찜하더라고요. 경사는 못 챙겨도 조사는 챙기고 살아야한다는 형 말도 괜히 마음에 걸리고…”

“뭘 또 그런 걸 신경 쓰고 그래.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운 일이지. 사실 내가 간 게 이상한 거지.”

“아니 근데 무슨 일이래요? 새삼스럽게 형을 다 찾고?”

“음, 그게 좀 괴상한 일들이 있었던 모양이야.”

신일은 창가에 몸을 붙였다. 출근시간이 겨우 지나 한적한 버스 안에서 의문의 살인사건을 설명해야 하는 건 그 자체로 난감한 일이었다.

“충격이네요. 휴우, 이것 참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사건의 전말을 전해들은 수강은 한참을 심란한 헛기침만 내뱉을 뿐이다.

“그러니까 말이다. 나도 요 며칠 새 통 잠을 못 잤어. 사람 인생이란 참….”

“형, 그런데 있잖아요.”

“응?”

“그, 아까 형이 말한 불길한 노래라는 건 뭐에요?”

“불길한 노래?”

“아니, 그 왜 비틀즈 노래라는 그…”

“아, 그거. 뭐, 과민 반응일 수도 있는데. 그 노래가 사연이 좀 있는 노래라서 말이야.”

“사연이 있는 노래라고요?”

“응, 그 노래를 통해 범인이 또다른 뭔가를 암시하려고 하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서.”

“암시라니요?”

“수강이 너 혹시 찰스 맨슨(Chrales Manson)이라는 살인마 이야기, 혹시 들어본 적 있냐?”

“찰스… 누구요?”

“찰스 맨슨. 미국에서 가장 악명 높은 연쇄살인마 중 하나야.”

“글쎄요. 전 그런 얘기라면 영…”

charles manson.jpeg

찰스 맨슨(Charles Manson)

“그는 임신 중인 여배우 샤론 테이트(Sharon Tate)를 잔인하게 살해한 걸로 악명을 떨친 살인마야. 로만 폴란스키(Roman Polanski) 감독의 아내이기도 했던 그녀를 그와 그의 일당들이 잔인하게 난도질해서 죽였다고들 하지.”

R&S-tile.jpg

로만 폴란스키(Roman Polanski) 감독과 샤론 테이트(Sharon Tate)

“와, 완전히 미친놈이잖아요?”

“그래. 제대로 미친놈이지. 특히 맨슨은 일반적인 살인마와는 달리 이단종교의 교주로 활동하면서 광신적인 이상행동을 보였다고 전해지는데, 체포된 후 심문 과정에서 좀 괴기스러운 진술을 한 걸로 유명세를 탔거든.”

“뭐라고 했길래요?”

“대부분의 연쇄살인마가 그렇듯 맨슨은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어. 오히려 그는 자신의 행동이 우주에서 전달된 신의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뿐이라는 말만 되풀이했지.”

“역시, 단단히 미친놈이네.”

“그래. 문제는 그 신의 메시지라는 거야. 맨슨은 그 메시지가 음악, 어떤 특정한 음악을 통해 전달된다고 믿었어. 자신은 살인지령이 담긴 음악에 따라 움직인 것뿐이라고 주장한 거야.”

“자, 잠깐만요. 형, 그럼…”

“그래, 그 미치광이가 살인의 영감을 받았다고 말한 노래, 그 곡이 바로 헬터 스켈터야.”

“연쇄살인에 영감을 준…”

“록음악에 얽힌 유서 깊은 개소리 중에 하나야. 하지만 만약, 범인이 이것까지 염두에 두고 이 노래를 택한 거라면 이번 사건은 이게 끝이 아닐 수도 있어. 수사관의 불길함이란 건 바로 이 얘기일 테지. 어쩌면 살인은 이제 막 시작된 것일 수도 있다, 앞으로 이 자가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뭐 그런 거 말이야.”

“에이, 형 설마… 그냥 아니라고 믿어야겠죠.”

헬터 스켈터(Helter Skelter), 비틀즈(The Beatles), 1968

수강은 신일의 마지막 말을 애써 외면했다. 그건 굳이 일을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당장 무슨 일이 생긴 것도 아닌데 지레 겁먹고 움츠러드는 건 분명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신일 역시 머릿속 삐걱거리는 수도꼭지를 억지로 틀어막으려 애썼다. 이런 불길함은 살모사의 독처럼 빠르고 치명적이다. 재빨리 도려내지 않으면, 순식간에 깊은 어둠에 중독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어쨌든 군경이 합동으로 수사하고 있다니까 곧 무슨 단서라도 나오겠지. 범인이 그렇게 메시지까지 남겨놓고 사라졌는데….”

“형… 근데, 아까 말씀하신 마피아라는 단어 있잖아요?”

“응. 그게 왜?”

“그게 혹시 좀 다른 의미로 쓰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다른 의미?”

“아니, 그러니까… 음, 범인이 정말 경찰이 생각하는 대로 자기과시욕에 취한 미친놈이라면….”

“…그런 놈이라면?”

“자기만이 알아볼 수 있는 어떤 표시 같은 걸 남긴 걸 수도 있지 않나 싶어서요.”

“표시? 표시라고?”

“예, 그러니까 그 메시지 자체에 어떤 뜻이 담겨있다기보다 그 글자 자체가 자기만의 표식 같은 걸 수도 있지 않겠냐는 거예요. 자기 고유의 문양이라든지, 오래된 별명이라든지 하는 것들처럼 말이죠.”

자기만의 표식이라고? 신일은 삐딱하게 웅크린 자세를 고쳐 잡았다. 몸에 깃든 노곤한 잠기운이 단번에 빨려 나가는 기분이다.

이건, 꽤나 일리 있는 지적이다. 살인동기를 암호화해 남길 정도로 대범한 놈이라면, 그런 엽기적인 짓인들 못할 이유가 없다.

“그래. 어쩌면 그런 해석이 가능할 지도….”

“아뇨, 저는 그냥… 왠지 마피아라고 하니까… 에이… 아니에요. 제가 괜한 말을 한 것 같네요. 어쨌든 오늘 강의 잘하세요! 다른 일에 너무 신경 쓰지 마시고요. 저도 이제 슬슬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서요. 또 연락드릴게요. 다음에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시계를 보니, 벌써 점심때가 다 되어 간다. 신일은 신경질적으로 입을 삐죽거렸다. 오늘은 왠지 몸도, 마음도 무거운 하루가 될 것 같다.

창가에 내린 볕이 노곤한 몸을 바짝 말려준다. 약 올리듯 따사로운 가을 냄새에 신일은 심통을 부리듯 전화기를 주머니 속에 던져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