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방랑] 태어나려는 자는 알을 깨뜨려야 한다 - 에콰도르 1편

in #kr-travel7 years ago (edited)

트레블(Travel)은 여행이란 뜻. 어원은 ‘Travail’인데 ‘여가, 휴가’가 아니라 ‘힘든 일, 고생하다’를 의미해. ‘Travail’은 ‘해산(解産)의 고통’을 가리키기도 하지. 그런 점에서 진정한 여행이란 ‘스스로 자신을 낳는 행위’인지도 몰라. 방랑기질 다분했던 작가 헤르만 헤세. 그의 대표작 <데미안> 중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는 문장처럼.

'관광'을 '여행'에 포함하는 세상의 시류 덕분(?)에 여행의 진정한 의미는 점점 퇴색되어 가지만, 여전히 방랑자를 시련의 구렁텅이로 떨어뜨리는 사건이 길 위 돌부리처럼 튀어나오곤 하지. 예정된 버스가 오지 않거나 돌변한 날씨로 일정이 수포로 돌아가는 사소한 사건부터 소매치기를 당한다든가, 몰고 가던 오토바이가 진창길에서 미끄러지거나, 타고 가던 차가 전복되는 일까지.

강도를 만난 건 에콰도르의 수도, 키토에서였어.

현지인조차 오가지 않는 외딴 골목이었어. 누군가가 어깨를 낚아챘어. 쿵! 담벼락에 부딪혀 튕겨나오자 칼끝이 내 목을 겨누고 있었지. 사악한 눈을 번득이며 사내가 노려보고 있었어. 혼자가 아니었어. 녀석이 칼을 내 목에 대고 있는 동안 세 명이 좌우로 달려들더니 카메라를, 가방을, 지갑을 낚아챘어. 희번덕거리는 눈알, 소리 죽인 채 주고받는 말들. 가죽을 벗기듯 내게서 값나갈 만한 것들을 다 뜯어낸 후, 후다다닥.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어.

우리가 강도를 만날 확률은 인생에서 한두 번 있을까, 말까한 일. 강도가 강도질을 하는 건 일상. 그들은 수많은 케이스를 통해 상대의 저항정도에 맞춰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잘 알고 있지. 최선의 방법은 재빨리 저항의사가 없음을 알리는 것. 남미여행 중 사내 넷이 강도를 만났어. 쪽수를 믿고 저항했지. 네 명 모두 살해되었어. 거세게 저항하니 강도는 총을 꺼내 쏴버렸지. 어떻게 대처할지는 그들이 더 잘 알아.

칼날이 목을 겨누자마자 저항의사가 없음을 즉각 표시한 덕분에 몸은 무사했어. 그렇지만 외투, 작은 배낭, 신용카드, 지갑 속에 들어있던 거금 1000달러. 사진이 든 카메라, 메모리 카드가 송두리째 사라지고 말았어. 그순간부터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키토 구시가의 아름다운 풍광은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 경찰서에 신고했지만 강도를 잡아낼 방법은 없었지. CCTV도 없는 후미진 골목이었으니까. 숙소로 돌아갈 차비도 없었어. 경찰이 내가 묵던 호스텔로 데려다주며 이런 말을 해주더군.

"그 지역을 혼자 다니다니 넌 제 정신이 아니던가, 간뎅이가 부었군. 그 동네는 키토에서 가장 악명 높은 우범지대야. 강력범죄가 쉴 새 없이 벌어지는 곳이라고. 몸이 무사한 것만으로 다행으로 알아!"

나 역시 몸이 무사하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았어. 여권과 비상용 신용카드를 숙소에 보관하길 다행이라 여기며 잠들었지. 그러나 새벽 무렵 잠이 깬 이후론 잠이 오지 않았어.

‘왜 그 인적 드문 골목으로 들어섰을까? 쓰레기가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개떼들이 으르릉 컹컹 대던 동네. 더구나 100달러짜리 지폐 10장이 지갑에 들어있다는 걸 왜 잊고 있었을까, 그동안 찍은 사진들은 또 어떡하지? 개자식들!’

자책과 분노가 머릿속을 휘저었어. 칼이 목에 닿을 때의 느낌, 범죄자들의 얼굴. 잊으려 해도 녀석들이 내지르던 목소리 - “카메라!” “배낭!” “허리지갑!” “선글라스도 벗겨! - 가 머리 안에서 무한반복되었어. 더 이상 남미는 내게 열정과 신비로 가득한 대륙이 아니었어. 강도떼와 잔악한 범죄의 대륙. 숙소의 문을 열고 거리로 나서면 나도 모르게 몸이 경직되었어. 우선 이 도시를 벗어나자.

남쪽으로 60킬로미터, 라타쿤가로 왔어. 호스텔 주인이 이 도시는 안전하다고 말했지. 곧이곧대로 들리진 않았어. 곧바로 방안에 처박혔어. 씻기지 않는 분노, 후회, 자책감에 휩싸인 채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어.

왜 이런 일이 내게 생긴 걸까?

남미로 오고 처음엔 조심했지. 귀중품은 숙소에 두고 밤길을 나섰고, 외진 골목으론 다니지 않았어.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해 저문 뒤 거리의 사람들은 평범했어. 퇴근 후 연인을 만나는 커플, 저녁 식사하러 나온 가족. 시간이 흘렀어. 난 점점 험악한 인상의 사람에게도 다가가기 시작했어. 대부분 선량했더랬지. 1퍼센트도 되지 않을 악당 때문에 99퍼센트 선량한 사람을 멀리하거나 의심하고 싶지 않았어. 마침내 나는 남미와 관련된 악명을 무시하기에 이르렀어. 사람들 오가지 않는 골목, 불 꺼진 밤길, 심지어 아무도 없는 산과 계곡을 떠돌았어. 위험에 대한 주의나 긴장감을 완전히 잃었지. 키토에서 강도와 맞딱뜨릴 때까지.

강력범죄 피해자가 겪는 '트라우마'를 체감하며 여러 날이 지났고 있었어. 네온사인에서 T가 떨어져 나간 HOS EL엔 손님이 드물었어. 손님과 주인이 나누는 대화가 계단을 타고 올라오는 날도 있었지만 방 밖으로 나가지 않았어. 다른 손님과 마주칠 일은 없었지. 어느 날이었어. 옥상에서 시끌시끌한 말소리와 노랫소리가 내려왔어. 무슨 일일까

방문을 열고, 옥상마당으로 나가는 철문을 열었어. 다섯 명의 히피. 바이올린 가방, 드럼, 외발자전거, 틑어진 배낭, 곤봉, 낡은 모자. 인사를 나눴어. 그들은 내가 왜 별 볼일 없는 이 도시에 왔는지 궁금해했지. 난 키토에서 겪은 사건을 들려주었어. 내 얘기가 끝나자 콜롬비아에서 왔다는 마리가 말했어.

"세상엔 선한 사람이 더 많지만 어디에나 악당은 있어. 에콰도르도 시골 사람들은 정말 천진해. 어느 나라든 수도는 온갖 잡놈과 욕망이 뒤엉켜 있는 곳이지. 높은 빌딩, 매연,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우린 바빌론(히피들은 대도시를 바빌론이라고 부르곤 한다)이 내뿜는 기운을 좋아하지 않아. 그건 그렇고 넌 그 일을 겪고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네! 대부분 여행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우리도 브라질에서 3년을 지내다가 한번 강도를 만났고 그 길로 집으로 돌아갔어."

“맞아. 브라질의 국경마을을 지나다가 젊은 녀석들을 만났어. 한잔하고 가라기에 어울렸지. 아무 문제없었어. 브라질에선 자주 있는 일이니까. 그런데 해가 지자 그들은 돌변했어. 한 녀석이 내 머리를 몽둥이로 찍고 넷이서 나를 짓밟았어. 마리가 막아섰지만 여자 힘으로 사내들을 막을 수 있겠어? 우리가 갖고 있던 돈, 팔고 다니던 보석공예품들, 가지고 있던 모든 걸 빼앗기고 난 엉망진창이 되었지. 다음날 내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어. 더 이상 여행할 기력이 사라져버렸어.” 

마리의 남자친구 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어.존과 마리는 이제 불붙은 곤봉을 주고받는 묘기로 돈을 벌며 여행 중이라고 했어. 케노는 칠레에서 왔는데 디아블로(절구통처럼 생긴 서커스용품)로 묘기를 부리며 여행 중, 파블로는 아르헨티나에서 왔는데 그 역시 디아블로 묘기와 ‘생명의 나무’를 새긴 목걸이를 만들어 팔며 남미를 떠도는 중, 나노는 스페인에서 왔는데 외발자전거 묘기를 부리며 남미를 떠도는 중이라고 했어.나노가 케노에게서 건네받은 럼주를 한 모금 마시고 내게 권했어. 찌르르. 독한 술이 위를 훑으며 지나갔어. 나는 한 모금을 더 들이켜고 마리에게 술병을 넘겼어. 마리가 술병을 받으며 물었지.

"로, 이젠 어디로 갈거니?"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파블로가 바이올린을 켜기 시작했어. 선율이 바람을 타고 옥상 밖으로 미끄러져 나갔어. 저 아래 지상에서도 이 소리가 들릴까? 바이올린에 맞춰 드럼을 두드리던 존이 내게 물었어.

"내일 우린 살세도로 갈거야. 너도 같이 갈래?"

“우린 시장에서 서커스를 할 거야. 묘기를 부릴 줄 아니?” 나노가 물었어.

“음...저글링을 할 줄 알긴 해.” 내가 대답했어.

“아이들을 기쁘게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좋아. 저글링 공이 있으니 빌려줄게.” 케노가 말했어.

“이참에 우리 서커스단을 만들자!" 마리가 소리쳤어.  

"나랑 마리는 콜롬비아에서 왔고, 나노는 스페인에서, 케노는 칠레에서, 파블로는 아르헨티나에서, 넌 머나먼 한국에서 왔으니 그야말로 국제서커스단이잖아!” 존이 말했어.

삶은 어떤 우연에 의해 전혀 다른 곳으로 방향을 틀곤 하지. 오늘의 슬픔이 내일의 기쁨이 되어 돌아오기도 하고, 오늘의 고통이 내일의 환희가 되어 돌아오기도 하고. 강도 사건으로 키토를 떠나왔는데, 도착한 도시에서 만난 떠돌이 히피들. 모두가 초면이었지.중남미 방랑 국제서커스단? 내 앞에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삶이, 또 다른 세계가 기다리고 있었어.... - To be continued 


Written by @roadpherom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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